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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Jul 01. 2022

원고료를 대신하는 것들



처음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머릿 제일 먼저 떠오른 누군가가 있었다. 노트북에 타이핑하는 모습 위로 그녀의 내레이션이 살포시 얹어지며 이제 이번 에피소드 편이 마무리되었음을 넌지시 알려주던 그 드라마. 바로 '섹스 앤 더 시티'속 메인 캐릭터, 캐리이다. 드라마 속 다양한 그녀의 모습엔 별 흥미가 없었다. 내숭이라곤 1도 찾아볼 수 없는 화끈한 사만다의 열렬 팬이었던 난 뭔가 얄미운 듯한 캐리에게선 별다른 애정은  느끼지 못했으니. 짠돌이 남편을 만나 지지리도 궁상스런 삶에 허덕이던 당시 온갖 사치에 빠져 살던 그녀의 모습은 그리 곱게 보이진 않았다. 게다가 우리의 사만다는 매회 훌렁훌렁 옷을 벗어던져야 했고 심지어 미란다와 샤롯까지 영화도 아닌 TV 드라마 속에서 가슴을 훤히 드러내어 내 두 눈을 휘둥그레 만들곤 했다. 허나 무슨 이유에선지 캐리 혼자 속살을 끝끝내 드러내지 않았다. 캐리의 가슴만 보호되어야 하는 그 이유도 궁금했지만 매번 그녀만 잘났고 심지어 쿨하기까지 한 게 수상한 냄새가 풍겼다. 나중에서야 내 의심이 질투에 눈이 뒤집어져 억지로 우긴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극 중 캐리인 사라 제시카 파커가 실제 제작자로서 그 드라마 제작에 관여했다나 뭐라나. 그러니 자기 캐릭터에 그리 공을 들였던 게지.




하지만 극 중 칼럼니스트인 캐리가 글을 쓰는 모습은 뭔가 좀 다르게 와닿았다. 한껏 본인 역할에 정성을 들인 드라마여서 더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글 쓰는 직업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솔직히 무언가를 집중해서 하는 모습은 그 일이 어떤 일이든 간에 멋있어 보이긴 하다. 고급 헤어 살롱에서 염색과 파마로 공을 들인 대신 얼룩덜룩한 자가 염색에 단돈 9천 원짜리 커트머리로, 명품은 고사하고 몇 년이나 줄기차게 입어 늘어날 대로 늘어난 싸구려 면티를 걸친 채, 잘 먹었다는 살가운 인사 한 마디 없는 식구들을 위해 매끼 묵묵히 밥을 짓는 모습 또한 그러하리라 믿고 싶다.





"그래서? 그걸로 뭐 하는 건데? 돈도 벌 수 있는 거야?"

브런치에 작가로 합격된 후 주위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남들 눈엔 수익이 창출되지 않는 글쓰기는 그저 하나의 놀이로 치부될 뿐이었다. 수익이 따르지 않는데 굳이 작가로 뽑힐 필요도 작가라 불릴 이유없는 일이다. 남들 앞에 대놓고 자랑할 거리는 더더욱 되지 못했다. 누군가는 그리 쓸데없는 건 또 뭐하려 하는지 참 부지런도 하다는 반응까지 보였다. 맞긴 맞는 말이다.




드라마 속 캐리는 글을 써서 소위 밥벌이를 했다. 아니 밥벌이 정도가 아니었다. 살아본 적은 없지만 들어 본 적은 많은 뉴욕의 살인적인 집세에 생활비, 외식비 그리고 그녀의 온몸을 감싸던 갖은 명품들까지 모두 글을 써서 받은 돈으로 커버할 수 있었다. 칼럼의 주제도 남녀 간의 사랑에 관한 것들이니 그리 무겁지 않다. 그녀가 도서관에 자리 잡고 앉아 공부를 하거나 자료를 찾는 장면은 본 기억이 전혀 없다. 학구적인 전문지식은 그리 필요치 않았을 게다. 게다가 이 세상 모든 문학 작품과 노래 가사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재가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닌가. 내 이야기든 남의 이야기든 주변에 글감은 허다하다. 남다른 감성과 예리한 관찰력으로 일상이나 경험 속에서 칼럼의 소재를 찾아내어 사랑에 대한 본인만의 정의를 내리면 된다. 지극히 주관적인 그 정의에 대해선 옳고 그름을 전혀 따질 필요도 검증될 필요조차 없다. 물론 타인의 공감을 이끌어낼 만한 맛깔스러운 문장력과 논리력은 필수이며 그게 제일 중요하긴 하다. 당연히 글 쓰는 재주가 시원찮은 나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고. 이렇게나 무식했던 나의 짧은 생각으론 칼럼을 쓴다는 게 그다지 힘든 작업 같지도 않은데 돈까지 잘 벌다니. 나의 애정도와는 상관없이 그런 멋진 직업을 가진 그녀가 사실 부러웠다. 그나저나 캐리도 어릴 적 꿈이 작가였을까.






교실 밖 정감 어린 초록 문패에는 '6-14'란 숫자가 또렷이 보인다. 아이들은 한 명씩 순서대로 앞으로 나와 교탁에 서서 자신의 장래희망에 대해 발표한다. 선생님은 교실  구석 본인의 책상에 자리 잡고 앉아 아이들 얘기를 조용히 웃으며 듣고 있다. 뭔가 부끄러워하고 쭈뼛해하는 아이들 사이로 한 여자 아이가 얼굴에 미소를 띠고 교탁 앞으로 씩씩하게 걸어 나온다. 아이는 이런 발표시간이 꽤나 즐거운 모양이다. 어떠한 쑥스러움도 주저함도 없이 본인의 꿈은 작가이며 언젠가 노벨 문학상을 탈거라 당당하게 말한. 아이 얼굴엔 비장한 각오니 그 딴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환히 웃음 진 얼굴로 여유롭게 자신의 꿈을 친구들 앞에서 얘기한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40년 전, 글 쓰는 일이 그리 대중적이지도 돈을 잘 버는 직업이라 여겨지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더군다나 아이는 궁색한 집안의 딸, 딸 그리고 또다시 지겹게 태어난 딸로 출생신고마저 6개월이나 미뤄진 천덕꾸러기였다. 가시나가 공부해서 뭐할 거냐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사는 술주정뱅이 아비도 있었다. 그런데 어찌 그 당시 그런 생각을 가졌는지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기특하기도 하다. 물론 반 아이들 앞에서 잘난 척하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을 게다. 또래 친구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장래희망을 발표했지만 아무도 아이를 비웃거나 무시하진 못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예쁘다는 말과는 다소 거리가 있으며 치맛바람 날폴대는 엄마의 돈봉투 파워도 역시 없었는데 말이다. 이유는 확실했다. 왜냐하면 당시 시내 한가운데, 한 학급당 약 60명씩 14반이나 던 꽤 큰 국민학교에서 아이는 학교 대표 산수 영재에다 그 학교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 아이였다. 게다가 적극적이고 당찬 아이였던지라 엄마가 학교 한번 안 찾아와도 선생님들한테 인정을 받던 아이였다. 하긴 그 엄마가 찾아와 봤자 아이의 맘 속엔 부끄러움만 싹틀 뿐이지 도움 될 건 하나도 없었지만.




어떤 계기로 작가가 되기로 맘먹었지는 전혀 기억이 없다. 아마 책벌레였던 큰언니의 영향이 큰 듯하다. 만약 그녀가 내 딸이었음 분명 서울대에 합격하고도 남았을 거라 확신할 수 있다. 상상이 취미였던 아이는 수시로 빨간 머리 앤, '키다리 아저씨'의 쥬디, '비밀의 화원'의 메리가 되어 혼자 상황 놀이에 푹 빠지곤 했다. 일기장에 이름을 붙여가며 매일 편지식으로 일기를 쓰기도 했고 옥상에 올라가 본인만의 비밀의 화원을 가꾸기도 했다. 책상 밑에 들어가 입구를 보자기로 막은 후 앤이 타고 다니던 마차 놀이도 즐겨했다. 가끔은 하늘을 는 침대를 타고 여행을 떠나기 위해 어떤 짐을 싣고 갈지 디테일한 고민에 빠진 말괄량이 삐삐도 되곤 했다. 물론 진짜 삐삐라면 짐은 하나도 필요 없이 윌슨 아저씨와 토니, 아니카 그리고 금화만 챙겼을 테지만. 지금으로 치면 게임 속 가상현실에 몰두해 있는 거랑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찌 보면 그게 어린 내가 할 수 있던 유일한 현실도피였는지 모른다. 그리 똑똑하고 야무졌던 아이도 모든 게 결핍된 가정에서 자라면 결국 이렇게밖에 되지 못한다는 게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의 주제는 결코 아니다. 물론 참 많은 아쉬움이 남는 어린 시절이긴 하지만.






브런치에 글을 쓰기 전까진 어린 시절 한때 작가가 꿈이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심지어 캐리가 글을 쓰는 모습을 봐도 그저 부럽기만 했지 내가 왜 그걸 부러워하는지 돈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를 전혀 생각해내지 못했다. 어찌 보면 당시 그 꿈이 그리 간절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브런치에 글을 발행하면서 갑자기 문득 그 생각이 떠올랐다. 책을 출간한 것도 원고료를 받는 것도 아닌데 작가라니 좀 가당찮긴 하다. 하지만 어설픈 작가라는 타이틀로 글을 쓰고 있으니 간혹 내 모습 위에 캐리의 모습이 살짝 겹쳐질 때가 있다. 나 역시 그녀처럼 글감을 찾고 주제를 정한 후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갈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게 동화였는지 소설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줄 노트 위에 내 맘대로 갈겨쓴 몇 편의 글 이후 40년 만이다. 땡전 한 푼 못 벌어도 누군가 날 작가라 불려주고 부족한 내 글을 읽어주다니 흥분되기 시작했다.




집에서 살림만 하는 평범한 아줌마다 보니 글감이 시원찮아 어째 다 내가 주요 등장인물로 나오지만 글을 쓰면서 천천히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차마 누군가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아픈 곳을 일부러 찾아가 아물지 않은 상처에 '호'하고 바람을 불어준다. 별거 아녔다고 그래도 잘 견뎌내 줬다고 토닥토닥 위로도 건네 때로는 스스로를 대견해하기도 한다. 속 좁은 내 눈에 뭔가 못마땅한 누군가가 비치면 짐짓 점잖을 빼며 상대방을 은근히 비난하기도 하고 감사에 대한 글을 쓸 때면 다시 한번 그 순간의 감동을 떠올리며 잊지 않으려 한다. 반성은 하되 가급적 스스로를 비난하지는 않으려 하며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다 보니 글을 쓰는 일이 나에겐 치유의 놀이가 되어가고 있다. 원고료를 현금으로 못 받아서 그렇지 글을 쓰면서 얻는 나름의 소득이 있는 셈이다. 남들은 시간과 돈을 들여 일부러 심리 치료를 받으러 다니는데 나에겐 글쓰기가 바로 오은영 박사의 금쪽같은 처방전인 셈이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 글을 써야 할지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고민도 많아지고 점점 버거워진다. 쓰다만 글을 읽고 또 읽어 지겹기까지 한데 그 뒤를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지 도통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아 애먹을 때가 많다. 이게 바로 창작의 고통이라는 걸까. 아무리 가볍고 흔한 소재라도 이야기로 엮어갈 능력이 부족하니 이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스스로를 열심히 다독거린다. 멋모르고 꿈꾸던 어린 시절처럼 노벨상에 도전할 것도 아닌데 그저 내가 재미를 느낄 정도까지만 자고. 야박한 원고료인데 재미까지 얻지 못하면 그땐 과감하게 접어야지.






그나저나 어린 시절 내 소설 속 주인공이었던 티모씨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제법 많았던 캐릭터 중 유일하게 아직까지 기억이 나이름이다. 삽화까지 그려 넣은 그 노트도 어렴풋이 생각난다. 어린 작가님이 그를 어설픈 사랑에 빠지게 했는지 먼 길을 떠나게 했는지 신나는 모험을 시작하게 했는지 전혀 기억나진 않는다. 하지만 아마 정이 많은 작가님이라 그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해 줬을 거라 믿으며 지금의 나도 행복할 내일을 위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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