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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Jul 21. 2022

비난받을 용기

 

이미 모든 의욕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전날 아니 오늘 새벽까지만 해도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던 트레킹은 그냥 이대로 취소하고 도망가고 싶은 맘이 너무도 간절하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을까. 생판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서 전화로 짜증 섞인 소리를 들어야 하는 이 상황이 너무 버겁다. 무엇보다 초면에 우리를 기다리며 출발을 지체하고 있을 다른 일행들을 쳐다볼 엄두도 나지 않는다. 세상에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순간 깨달았다. 무엇보다 나는 아직까지 타인에게 비난받을 용기를 가지지 못한 사람이란 걸.






딸아이의 기말고사 끝나고 남편과 캠핑이 계획되었다. 방학이 시작되면 한 달 동안 꼼짝없이 집에서 밥 짓는 아낙으로 전략될 신세다. 게다가 방학 내 집에서 공부할 아이의 비위를 맞춰주려면 나를 위한 나름의 에너지 충전이 필요하다. 나에게선 캠핑이 바로 그것이다. 3박 4일의 여름 캠핑은 어김없이 울진으로 정해졌다. 개인적으로 여름 휴가지로써 울진만큼 멋진 곳도 사실 드물다고 생각한다. 산과 계곡, 온천, 동굴, 바다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다. 우리 부부의 가장 이상적인 캠핑은 관광과 낚시 그리고 채집 활동이 적절히 섞인 것인데 바로 울진이 이 모두를 만족시켜준다. 그러나 관광의 경우 문제가 조금 있다. 아무리 좋은 곳도 한두 번이지 모두 여러 번 갔다 오다 보니 이번엔 낚시 말고는 딱히 할 만한 게 없다. 게다가 아이들과 같이 가는 여름 캠핑은 수영이라는 중요한 활동이 있지만 남편과 단둘이 튜브를 타고 노는 건 어째 모양새가 좀 그렇다. 특히 이번엔 물때가 맞지 않아 우리 부부가 가장 좋아하는 바다에서의 채집 활동마저 힘들게 되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휴양림 안에서 쉬려고 4시간 이상을 운전해 그 먼 곳을 찾는 건 아니다. 또한 적성에도 맞지 않다. 짧지 않은 캠핑기간 동안 낚시 말고 뭔가 색다른 것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계획된 것이 '금강송길 탐방'이었다.




금강 송길은 모두 7개의 코스로 반드시 인터넷 예약을 통해 가이드를 동반해야 가능하다. 너무 힘든 코스는 캠핑 내내 피로가 누적될 수 있어 남편과 의논 끝에 비교적 거리가 짧은 3-1구간을 선택해 예약을 했다. 4시간 정도의 숲 탐방이면 적당할 것 같았다. 그런데 평일이라 그런지 며칠이 지나도 예약 인원이 남편과 나 겨우 둘 뿐이다. 아무래도 인원을 한 곳으로 몰 것 같은 예감이 들었고 역시 며칠 뒤 4코스로 변경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연락을 받았다. 4코스는 5시간 정도 소요된다는 안내와 함께 8천 원짜리 도시락도 주문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번 캠핑은 첫날부터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휴양림에 도착해 텐트를 칠 때까지만 해도 조금씩 내리던 비는 날이 어두워지자 본격적으로 폭우로 변했다. 15년 가까이 동거 동락해온 저렴한 텐트와 타프는 이미 방수 기능이 많이 떨어져 어느새 텐트 안으로 물이 새기 시작했다. 텐트를 구입해 맨 처음 설치한 날, 그날도 역시 비가 많이 왔었다. 난생 첫 가족 캠핑에 아직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문경의 어느 한 강변에서 만난 호우 경보는 그야말로 두려움 그 자체였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밤을 지새웠지만 그래도 그땐 텐트가 새것이라 방수 기능이 확실했다. 한 방울의 빗물도 새어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 앞에 장사가 없는 건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처음 텐트 위 중앙에서 새기 시작한 빗물을 어찌어찌 해결하고 나니 앞뒤 좌우 4면 모두에서 빗물이 들어와 계속 수건으로 닦아내어야 했다. 침낭을 펴지도 옷가방을 열지도 다른 짐들도 정리하지 못한 채 자포자기 심정으로 그렇게 밤을 보내고 나니 다행히 더 이상 많은 비는 오지 않았다. 아이들과 수많은 추억이 담긴 이 텐트와도 슬슬 작별을 고해야 하는 아쉬운 시간이 다가옴이 느껴졌다.




둘째 날은 드디어 기대하던 트레킹 날이다. 9시 출발이지만 8시 40분까지 와달라는 문자가 지난 오후 남편 휴대폰에 왔었다. 트레킹에 관한 모든 건 남편이 알아보고 예약하고 전화 통화도 했기에 나는 별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남편은 제법 꼼꼼한 편이라 그저 그를 믿고 있었다. 전날 남편에게 집결 장소로 가는 길은 잘 알아 놨냐고 묻자 내비게이션을 보고 가면 된다고 한다. 소요시간은 한 시간 정도 걸린다 했다. 같은 울진이라 얼마 안 걸릴 줄 알았는데 도로가 없어 산을 둘러가기에 시간이 그리 걸린단다. 늦으면 안 되기에 새벽 5시 반부터 일어나 서둘렀다. 비 때문에 어제 풀지 못한 짐도 정리하고 빨랫줄에 젖은 옷과 수건들도 널었다. 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서둘러 출발했지만 시각은 벌써 7시 40분을 가리켰다. 내비게이션을 켜서 약속 장소를 찍으니 도착시간이 8시 53분으로 나온다. 한 시간보다 훨씬 더 걸리는 거리였다. 약속 시간을 맞출 수 있을지 조마조마 해졌고 침착한 남편의 운전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처음엔 내비게이션을 따라 잘 가던 남편이 어느 순간부터 내비가 가라는 방향을 자꾸 무시하고 다른 곳을 향한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어제 검색해 봤을 땐 집결지가 통고산 휴양림 부근인데 내비가 이상한 길로 자꾸 가라 한다고 오히려 내비를 탓한다. 통고산 휴양림은 불영 계곡에서 위치해 있어 남편이 길을 잘 알고 있었다. 길 눈이 밝은 남편을 믿는 수밖에 없었지만 내비의 도착 예상 시각은 더 지체되어 9시 3분을 가리켰다. 이래저래 불안해져 왔다. 그 꼬불꼬불한 불영 계곡 옆 도로를 빠른 속도로 갈 생각을 하니 살짝 긴장도 되고 더 늦어진 도착 시간에 마음만 조급해졌다.




갑자기 내비가 이상한 산길로 들어가란다. 그게 지름길인지는 모르겠으나 혹시 아니면 더 늦어질 수 있기에 일단 차를 세우고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 지금 어디쯤인지 물어보기에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이정표의 지명을 얘기하자 우리 보고 구도로로 왔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오는 길에 높이 떠 있는 고가도로가 보였다. 남편은 그걸 보면서 내내 저게 어디로 가는 건지 궁금해했다. 그런데 그게 바로 새로 생긴 도로였고 내비가 맨 처음 안내했던 길은 그 고가도로를 타는 길이였다. 그것도 모르고 남편은 내비를 못 믿어 이 급커브가 많은 구도로로 들어온 것이다. 내비를 금강송 에코리움으로 다시 찍고 오라는 안내를 받고 다시 서둘러 출발했다. 다행히 생각보다는 많이 늦지 않게 도착했지만 남편은 집결지가 에코리움이 아니고 송광리 OOO 번지이니 나보고 다시 내비에 송광리를 입력해라 한다. 그런데 이미 기존에 입력돼 있는 게 있어 그걸 누르고 내비를 따라갔다. 금방 도착할 것 같았는데 또다시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결국 다시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빨리 도착해야 되는데 자꾸 전화만 하기 미안해서 남편이 전화해줬음 했다. 그러나 남편은 자기는 운전 중이니 나보고 걸라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전화를 걸고 다시 길을 물어보자 지금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물어본다. 그런데 산속이라 농가 말고는 딱히 이정표라 할만한 게 없어 뭐라 말할 수 없었다. 전화 건너편 남자의 목소리에는 이미 짜증이 섞여 있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냐고 자꾸 채근하는데 도대체 주위에 뭐가 있어야지. 계속 머뭇거리다가 드디어 간판이 있는 곳까지 차가 도착하여 그곳을 말했다. 그랬더니 우리가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갔다고 다시 돌아 나오란다. 나보고 문자를 제대로 안 보고 주소지를 잘 못 찍었다고 사모님, 사모님 하면서 목소리를 높여 짜증을 낸다. 당연히 모두 우리 잘못이지만 슬슬 내 인내심에도 한계에 도달했다.




지금 다른 분들 모두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그곳에 도착하게 되면 더 늦어질 텐데 더 이상 기다리시게 하는 건 너무 민폐이니 그냥 출발하시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 늦어서 못 갈 것 같다고 했다. 그러자 갑자기 전화기 너머 목소리가 약간 수그러든다. 더 이상 통화하기도 싫어 남편에게 전화기를 건넸다. 통화를 마친 남편은 그제야 제대로 된 집결지로 향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비에 저장된 주소지는 처음 우리가 예약한 3-1코스의 집결지였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내가 내비에 주소지가 저장되어 있다고 했을 때 남편이 저장된 주소지가 두 군데가 있으니 잘 확인해봐라고 한마디만 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게다가 오늘 아침까지 남편에게 제대로 길을 알아놨냐 시간은 얼마나 걸리냐고 몇 번이나 물어봤는데 그동안 뭐했는지. 캠핑을 위한 장도 혼자 보고 음식 준비며 짐도 다 나 혼자 싸고 준비했는데 겨우 몸만 달랑 오면서 이것 하나 제대로 못 알아놓다니. 게다가 남편 혼자 운전하면 힘들까 봐 서툴지만 울진에 올 때 3시간가량 운전도 했고 평상시에도 모든 계획은 내가 다 세우는데 도대체 이게 뭔 일인지. 점점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무엇보다 이제 도착한들 무슨 염치로 일행들 얼굴을 쳐다볼 수 있을까. 민폐 부부로 낙인이 찍힌 채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5시간 동안 그들과 함께 트레킹 할 자신이 난 도저히 없었다. 캠핑까지 와서 싸울 수는 없고 속이 확 뒤집어졌다. 남편보고 나는 기분이 이미 너무 상해서 도저히 못 가겠다며 차에 있을 테니 혼자 다녀오라 했다. 그런데 남편은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그냥 가냐고 한다. 이미 늦은걸 어쩌겠냐며 다른 사람들이 기다려줘야지 하며 오히려 더 큰 소리다. 그러면서 계속 나보고 미안하다고 화 풀어라 한다.




도착하고 보니 다른 분들은 이미 출발하고 없고 누군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 차로 갈 수 있는 만큼은 가서 합류하라며 그분이 자기 트럭을 타라고 했다. 그러면서 도시락을 내밀고는 멋쩍게 웃으며 도시락 값을 달라고 한다. 아, 이거 때문이구나. 이거 때문에 내가 도저히 못 가겠다 했을 때 당황했던 거구나. 이미 주문받은 도시락을 건네주고 돈을 받아야 하는데 실컷 기다렸더니 취소한다는 소리나 하고  적잖이 황당했을 것이다. 나도 경황이 없어 그것까지 미처 생각을 못 했다. 얼마나 염치없다 생각했을까. 화장실이 너무 급했지만 옆에 화장실을 두고도 말을 못 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는 건 양심상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후 차가 도착한 곳에 노부부 두 커플과 가이드 분이 바위에 앉아 우리 민폐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세 많으신 분들을 기다리게 하여 죄책감은 더 커져 죄송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모두들 괜찮다고 하시는데 내가 괜찮지 않았다. 화장실은 점점 더 가고 싶어지고 아직 화는 누그러지지도 않았으며 숲을 거니는 내내 우리 부부를 향한 뭔지 모를 싸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하긴 나 같아도 40분이나 늦었으니 곱게 보이진 않을 터이다. 하지만 남편은 이상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8시 40분까지 모이라고 해도 어차피 출발은 9시일 테고 게다가 이미 어느 정도 가서 합류했기에 기껏 10분밖에 안 늦었단다. 그러면서 별 개의치 않고 잘 다닌다. 뻔뻔한 사람...




결국 가이드 분께 혹시 숲에 화장실이 있을지 물어보니 역시  없다고 한다. 그냥 일행 뒤에 쳐져서 살짝 볼 일을 봐라고 하여 눈치껏 남편을 보초 세우고 해결을 했다. 몸과 함께 마음까지 한결 가벼워졌고 그제서야 숲도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은 후 드디어 도시락을 먹는 시간이 왔다. 뚜껑을 열자 장아찌 종류의 밑반찬들이 보인다. 그래, 이 도시락만 아니었음 아마 휴양림으로 다시 돌아갔을 수도 있었다. 모든 여정이 끝나고 산아래에서 인사를 하고 헤어지는 순간 열심히 인사했지만 그때도 역시 냉랭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나만 그리 느끼는지 남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남에게 크게 민폐 끼칠 만한 일을 한 적이 전혀 없다. 타인에게 그리 너그러운 사람은 아니지만 나 역시 타인에게 불편을 끼치거나 실례될만한 일을 하는 건 스스로 견딜 수 없어한다. 더군다나 어느 한 무리에서 나 하나 때문에 전체에 민폐를 끼쳐 계속 고개를 숙여야 하는 일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 정말 피하고 싶은 그런 일이 결국 생기고야 말았다. 내 인생 최악의 순간 중 하나였다.




그날 종일 기분이 울적했다. 예민하고 완벽주의자인 내 성격에 남에게 비난받을 만한 일을 하는 자체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잘못을 하면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빨리 털어버리면 되는데 나 스스로 너무 많이 자책한다는 걸 깨달았다. 반면 남편은 전혀 아무렇지 않아 했다. 산행 중 내내 본인의 트레킹을 즐겼고 도시락도 내 몫의 반까지 다 맛있게 먹었다. 다른 분들의 무관심한 듯 냉랭한 시선을  남편처럼 신경 안 쓰면 되는데 그게 내겐 너무 가시방석이었다. 어쩜 제 발이 저려 나 혼자 그렇게 느낀 걸 수도 있을 테고. 물론 앞으로 살아가면서 두 번 다시 이 날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할 것이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이런 일이 또 일어난다면 그땐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남편과 나를 비교하면서 나름의 답을 얻었다. 평소 무신경한 남편이 참 많이 얄밉고 답답했었는데 그게 본인에겐 최고였다. 적당히 덮을 건 덮고 보지 않으면 될 것을 계속 촉을 세우고 남의 눈치를 살피다 보니 보이지 않은 것까지 보게 된다. 아마 그 일행 분들은 이미 우리 민폐 부부의 잘못은 다 잊어버리고 좋았던 숲의 정경만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 나만 푸르던 숲의 기억보단 당시의 그 낯설고 힘겨웠던 감정에 빠져 있을 수도 있다. 내겐 무엇보다 남의 비난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낯 두꺼운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 그것도 인생에서 꼭 필요한 용기이다. 그런데 그걸 가지기 위해 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만약 비난을 받아들일 용기가 소심쟁이 나에게 정 생기지 않는다면... 그땐 무념무상 남편처럼 '어쩌겠노'를 입에 달고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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