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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Jul 27. 2022

서서히 젖어든다는 건


여느 아침처럼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물 한 병을 챙겨 들고 숲으로 향한다. 지난밤 천둥 번개를 동반한 꽤 요란한 비가 그새 그치긴 했지만 언제 다시 쏟아질지 안심할 순 없다. 비를 잔뜩 머금은 짙은 흙냄새가 쉴 새 없이 나를 자극한다. 숲 안을 향할수록 그 내음은 점점 농도를 더해 가고 있다. 눈을 감고 깊은 심호흡으로 내 안을 그것들로 가득 채운다. 사르르 온몸이 녹아내리는 황홀한 기분을 천천히 느끼면서 서서히 눈을 떠본다. 온 천치가 뿌연 안개로 자욱하다. 어제부터 계속 귓가에 맴돌던 그 노래가 어디선가 조용히 들리는 듯하다.


돌아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가 다오/ 아,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 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


안개가 자욱한 숲은 어제 본 영화의 잔상들로 가득하다. 영화를 본지 얼마 안 되어서일까 아니면 진한 흙냄새에 취해서일까. 그것도 아님 안개 때문일까. 해준처럼 안구건조증을 가진 내 두 눈은 자세히 보려 눈에 힘을 주면 줄수록 더 흐려 보인다. 뿌연 안개 때문인지 눈앞이 답답해져 온다. 당장 눈물약을 주머니에서 꺼내 넣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아니다. 그냥 이대로가 좋다. 뿌연 숲 사이로 서래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시 해준의 모습도 그려진다. 먹먹해져 오는 가슴에 아직 깊은 여운이 남아 있다.






주제가 뭔지, 시사하는 바가 무언지, 감독이 곳곳에 남겨둔 희미한 흔적의 의도는 무언지 이런 걸 찾느라 영화를 보는 내내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그건 나중에 똑똑한 사람들이 쓴 평론을 참고하며 뒤늦게 깨달아도 충분하다. 나 같은 평범한 일반인이 감히 박찬욱 감독의 작품을 평가할 생각 따윈 집어치우고 작정을 하고 영화에 나를 맡기기로 했다. 그런 건 모두 다른 사람의 몫이고 난 그저 오롯이 내 느낌에만 충실할 것이다. 예전 '미나리'를 볼 때도 그랬다. 이번처럼 영화에 100% 스며들 만발의 준비를 하고 극을 마주 했지만 애석하게도 그땐 실패했었다. 극에 젖어들지를 못했다. 아니 젖어들지가 않았다.




미국인이 좋아하는 한국어 영화라니 여기저기서 떠들썩했고 수많은 기사와 평론들이 매일 쏟아져 나왔다. 결국 영화를 보기 전  많던 평론 기사들을 빠지지 않고 읽은 게 화근이었다. 찬양 일색이었던 대부분의 평론들은 영화를 보는 순간 지나친 효용론적 관점의 해석이란 걸 알게 되었다. 보이지 않은 부분까지 주관적으로 해석해대는 그들의 능력 때문에 영화 보는 내내 실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쉽게 말해 꿈보다 해몽이었다. 잔잔한 감동을 전해주던 그 영화를 갖은 조미료 범범이었던 평론들 때문에 오히려 망친 기분이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말고 영화부터 볼 것을 땅을 치며 후회했다. 더 기가 찬 것은 영화를 본 한 지인이 며칠 전 읽었던 어느 평론과 똑같은 대목에 똑같은 표현을 사용하여 마치 자기 소감인 양 내게 얘기하는 것이다. 아마 같은 기사를 읽었던 모양인 게다. 평론이란 게 모든 감상을 일률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무서운 힘까지 있는가 보다. 분명 본인만의 것이 있었을 텐데. 나중에 그 영화에 미국인들이 왜 그토록 열광하는지 정말 제대로 된 평론을 읽고 난 뒤 한국 관객과 미국 관객의 관점 자체가 아예 달랐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다.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 없는 온전히 내가 느낀 감정들을 전문가들의 잣대로 맞춰진 평으로 인해 흩트리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비록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해석에 도움을 받긴 하지만.






드디어 어두워지고 극이 시작되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온 몸의 힘을 뺀 후 극이 전개되는 대로 의식을 천천히 흘러 보낸다. 어느새 해준의 시선을 따라 서래를 훔쳐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망원경 너머 그녀의 작고 디테일한 행동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조금씩 뭔가 갈망하는 듯하다. 이따금 잠복수사인지 관음인지 그 경계가 모호해 보일 때도 있다. 곧 서래의 모습들은 마치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듯 선명해진다. 수사가 진행되면 될수록 천천히 해준의 시야가 흐려져옴이 느껴진다. 안개 때문도 안구 건조증 때문도 아니다. 서래를 향한 미묘한 감정들은 해준을 똑바로 볼 수 없게끔 만든다. 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서래는 그런 해준을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스스럼없이 대한다. 분명 이 사람은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다 생각하면서.




해준의 이런 태도는 내 눈엔 마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듯하다. 언제 그 줄에서 떨어질지 모른다. 아내가 있고 무엇보다 냉철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취해야 하는 형사이기에 떨어지면 그 후유증도 만만치 않을 터이다. 이미 한쪽으로 많이 기운 불안한 상태로 겨우 겨우 중심을 잡고 줄 위를 가까스레 한 발씩 내딛는다. 조금씩 위태위태한 발걸음을 이어가지만 의심과 관심이란 상반된 감정이 해준을 양옆에서 잡아당긴다. 결국 힘의 균형은 깨어지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지극히 본능적인 욕구에 이끌려 눈앞이 흐려지고 만다. 하지만 그런 그를 나 역시 비난하지 못한다. 이미 난 해준에게 깊이 젖어들었다. 어느새 해준의 시선으로, 그가 화자인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영화를 바라보고 있다. 누군가 그랬다. 화자는 무조건 'good man'이라고. 그 말이 틀리지 않는 듯 아직까진 해준이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있다. 그의 부인에게 일말의 동정심을 느끼며 내 남자에겐 절대 일어 나선 안될 일이라 단정 짓지만 어느새 서래와 해준의 설렘이 곧 나의 설렘이 된다.






어설픈 한국말에서 느껴지는 묘한 신비로움과 아름다움까지 해준에게 서래는 모두 익숙지 않은 낯선 것들에 대한 설렘이다. 단시간에 생성된 그 감정들은 어쩌면 곧 시간이라는 사포질에 의해 곧 무덤덤해질 것들이다. 미결의 사건이라는 핑계로 자신의 사진들로 가득 채워진 벽면을 보게 되는 서래가 과연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이젠 완결되었으니 그 사진들을 태우자고 했을 때 해준은 완강한 거부를 나타낸다. '왜'라는 서래의 물음에 '이뻐서'란 이유를 수줍은 듯 말하는 그의 솔직함은 서래를 본격적으로 흔들게 만든다. 결국 담뱃재를 털어주는 사소한 행동까지 그녀의 가슴에 크게 와닿게 된다. 그렇게 서래도 서서히 해준에게 젖어들게 된다.




영화가 후반을 향할수록 이번엔 서래의 슬픈 감정이 나를 압도한다. 휴대폰 속 저장된 해준의 음성을 듣고 또 듣고 계속 반복해서 듣는 그녀의 모습은 이내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며 내 맘을 시리게 만든다. 25년 전이었다. 대낮의 빈 기숙사 방에 전화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다. 이 시간대엔 모두들 근무 중이라 당연히 아무도 없을 텐데 그냥 잘못 걸려 온 전화는 아닌 듯하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끔씩 그렇게 아무도 없는 대낮에 전화가 혼자 울리고 있었다. 통화를 하고자 전화를 한 건 아니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자동 연결음의 목소리마저 때때로 듣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회사 옆 인적 드문 공중전화부스에 들어가 한껏 부풀어 오른 눈망울로 수화기를 붙들고 그리움을 삭혔다. 그리고 그렇게 서서히 누군가를 잊어갔다. 그 사람에 젖어들 때와 같은 속도로.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이 사랑이 끝났다고 했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어요'

슬픈 사랑은 항상 이 모양이다. 끔찍한 장면을 보고 놀랄 해준을 걱정해 피로 물든 죽은 남편의 시신을 깨끗이 씻기고 바닥의 핏물을 치우는 서래의 모습이 마냥 안타깝다. 한편으로 이 모든 걸 담담하게 해내는 모습이 엉뚱하기고 호러스럽기까지 하다. 본인이 한 행동들이 살인의 의심을 살만한 일이란 걸 영리한 그녀가 모르진 않을 텐데. 그러나 그녀에겐 그것보다 해준에 대한 걱정이 먼저이다.




서래는 결코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아니 무서운 사람이다. 죽여달라고 했다고는 하나 본인의 엄마를 포함한 두 명의 노파를 약으로 죽게 한다. 첫 남편을 살해하기 위해 수직 절벽의 위험한 암벽을 오르고 결국 정상에서 남편을 아래로 밀어버린다. 두 번째 남편은 타인을 이용해 처참하게 살해당하게 만든다. 나중엔 그녀 스스로도 목숨을 버린다. 자기가 들어갈 모래 구덩이를 직접 파고 그 속에 웅크리고 앉아 병째 술을 들이키며 밀물을 기다린다. 그리고 서서히 밀려오는 밀물이 구덩이 속으로 들어와 그녀를 집어삼키는 걸 피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과 다른 4명의 목숨을 앗아가게 만든 독하고 무서운 사람이 서래다. 어쩜 그녀에겐 죽고 죽이는 일은 그리 두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서래가 정말 두려워하는 건 사랑하는 사람이 그녀와 헤어질 결심을 하는 걸 지켜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결국 그녀도 죽음으로써 그와 헤어질 결심을 하고 아울러 그에게 평생 기억될 미결의 사건이 되기로 한다.






이성과 달리 그런 서래에게 연민이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감독의 의도 때문일 게다. 감독은 그녀를 한낱 살인자로 관객들이 치부하게 내버려 두진 않았다. 우리 모두의 눈에 뿌연 장막을 쳤다. 무언가 잘 보이지 않은 듯 해준이 눈물 약을 넣는 장면은 이제껏 해준의 시선으로 서래를 봐 오던 나 역시 순간 눈앞이 뿌예진 마냥 눈을 깜빡이게 만들었다. 극 중 무심히 여러 번 흘러나오던 정훈희의 노랫소리와 안개 자욱한 영상 또한 관객들의 시선을 흐리게 만들었다. 심지어 별 대수롭지 않던 옷 색상도 초록색이니 파란색이니 번복해가며 계속 관객들을 헷갈리게 했다.




흐려 보이는 것은 모든 걸 아름답고 아련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하지만 나에겐 서래에게 빠져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감정에 솔직하며 그것에 충실한 사람이 그녀이다. 서래와 나의 유일한 공통점이기도 하다. 어쩜 태어나 처음 받아본 해준의 섬세하고 매너 있는 모습은 그녀를 설레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순애보 같은 사랑을 택하는 그런 수동적인 인물은 또한 아니다. 두 번째 결혼에서 보이듯 첫 남편이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녀는 다시 결혼을 선택한다. 왜 그런 남자들하고만 결혼했냐고 따지듯 묻는 해준은 안타까움에서 하는 소리이겠지만 그게 서래에겐 현실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약 평범한 사람을 만나 지극히 평범한 사랑을 나눴더라면 서래는 아마 그런대로 또 잘 살았을 것이다. 때때로 남편의 일상적인 평범한 모습과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매너 있게 행동했을 해준의 모습을 비교해가며 가슴 어딘가 아련해짐을 느꼈을 테지만. 사실 해준의 결혼 생활도 지극히 평범하고 무덤덤하다. 시간은 모든 걸 둔감하게 만든다. 관계의 시작만 설레고 뜨거울 뿐이다. 서로에게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진 해준이가 부엌에서 담배를 들고 있는 서래에게 뭐라 할지 잠시 상상에 잠겨 본다. 담배 좀 끊어라는 잔소리부터 시작하여 피우려면 담뱃재나 좀 털고 피우든지 그리고 제발 부엌에선 피우지 말라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그런 해준을 흘겨보며 서래는 담배를 들고 밖으로 나가 예전에 그가 담뱃재를 털어주던 다정했던 모습을 떠올린다.




반면 해준은 끝끝내 자기감정에 솔직하지 못했다.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했냐며 서래에게 따질 때 나는 보았다. 그녀 눈에 비친 황망함을. 과연 해준에겐 어디까지가 사랑이었고 어디까지가 호기심이었을까. 모호한 그 경계에서 한 명은 부인하고 다른 한 명은 모든 걸 감내한다. 






영화가 끝나고 집으로 오는 내내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를 수가 없었다. 엔딩 크레딧에서 흘러나오던 송창식의 읊조리는 듯 한 노랫소리와 노랗게 물든 석양의 바다가 사람을 아련하게 만들다 못해 또다시 먹먹하게 만들어 놓았다. 정훈희의 맑고 고운 소리는 한 마리의 작고 가벼운 새가 되어 안갯속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는 듯했으며 송창식의 읊조리는 듯 한 낮은 노랫소리는 모든 게 다 부질없는 것들이라 조용히 타이르는 같았. 꼭 글을 쓰겠다 다짐했다. 감상문이 되든 넋두리가 되든 이 느낌을 남기고 싶었다.






누군가에 젖어든다는 건 어찌 보면 누군가에게 푹 빠지는 것과 같지만 그 시간과 속도면에서 분명 차이가 난다. 단 시간 내 서로에게 급하게 다가가 정말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빠져드는 관계는 시작할 때와 같은 속도로 무뎌수도 무너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젖어든다는 건 조금씩 조금씩 상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때때론 한 자리에서 잠시 머물며 숨 고르기를 할 때도 있다. 천천히 서로를 관찰하고 본인도 모르게 하나씩 상대의 행동을 따라 하게 된다.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서서히 흐려오는 것이다. 그렇게 다가간 관계는 보다 견고하다. 쉬이 허물어지지 않는다. 무너뜨리기 위해선 결심이 필요하고 그 무너진 관계는 붕괴가 된다. 하지만 아직 시간의 역할이 남아있다. 붕괴된 관계 역시 시간이 지나면 안갯속 흐릿해 보이는 무언가처럼 아름답고 아련해질 뿐이다. 가끔씩 꺼내 볼 그리움이 우리 모두의 가슴에 남아 있는 것도 나쁘진 않다. 오랫동안 잊고 있다가도 불쑥 떠오를 때가 있다. 시리든 아련하든 먹먹하든 다 지난 나의 초상들이다. 추억으로 먹고 살 날이 더 많아진 지금 내 마음속의 안개는 영원히 걷히지 않았음 한다. 가끔 그 안갯속을 헤매어 걸으며 지난날의 내 자취를 더듬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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