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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Aug 01. 2022

제 스트레스는 제가 관리할게요

하마터면 낚일 뻔했네



안경 너머 나를 힐끔 쳐다보는 눈매가 그리 친절해 보이진 않는다. 언뜻 봐도 나이가 70은 족히 넘어 보이는 노인네다. 그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는 그런 그를 관찰한다. 관상이 아닌 그냥 인상이지만 누가 보더라도 아주 고집스런 얼굴이다. 나이가 들면 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인상이 굳어질 수 있을 게다. 아마 나는 더 하지 싶다. 지금부터라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순간 든다.

"성격이 많이 급하지요?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요. 뭘 자꾸 일을 만들려고 하는데 그러지 말아요.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편하게 살아요. 밤에 자려고 누웠는데도 뭔가 빼먹은 게 있음 다시 벌떡 일어나지요?"

어... 내가 언제 그런 걸 물어봤다고 갑자기 저런 소릴 하지? 그나저나 틀린 얘기는 아니긴 한데.






원래 이곳을 찾을 생각은 아니었다. 바로 옆 건물에 있는 소아과와 내과를 겸하는 병원에 갈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지금 사는 아파트에 입주한 후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15년 이상을 다닌 곳이다. 우리 가족 모두의 진료 기록이 다 있는 곳이기에 간단한 치료나 처방이 필요할 때면 그곳을 찾는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실내 인테리어 공사로 이번 한 주 빠른 휴가에 들어간다는 안내문이 병원 입구에 떡하니 붙어 있다. 아이들이 성장한 후 이젠 들릴 일도 거의 없어졌는데 하필 몇 년 만에 찾아온 날에 허탕을 치게 되다니. 진료를 받으려면 아직 며칠이나 기다려야 한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 다음 주가 될 때까지 기다리면 병원 방문을 하루 이틀 자꾸 미루게 될 것이 분명하다. 맘먹고 집을 나선 김에 다른 병원이라도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게다가 별 다른 치료 없이 그냥 약만 처방받으면 되기에 발걸음을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작년엔 여기서 코로나 잔여 백신을 예약해 3차례나 접종했기에 그리 낯설지도 않았다. 그땐 간호사 2명이서 정신없이 업무를 보고 있었으나 백신 접종이 거의 끝난 지금 한 명만이 조용한 병원을 지키고 있다. 대기실에는 먼저 온 한 명의 환자만 더 있을 뿐 그나마 내가 병원 문을 나설 때까지 다른 손님은 누구도 오지 않았다.




드디어 이름이 불러지고 진료실로 향했다. 2년 전에도 같은 증상으로 옆 건물 소아과에서 약을 처방받아 복용했었다. 나이가 지긋한 의사는 내 증상을 확인 후 한 달 치의 약을 처방해 주었다. 소아과에서는 항상 두 달치 씩 처방받았었기에 그렇게 해달라 부탁했다가 이미 한소리를 들은 이후였다. 싫으면 그냥 가란다. 다른 곳에서 그렇게 해주면 그리로 가라고 손을 내젓는다. 그러면서 의료보험 공단에서 온 듯한 공문을 손에 들어 내게 내밀면서 이것 봐라고 한다. 그가 가리키는 부분엔 빨간색 펜으로 여러 겹 줄 쳐져 있다.

"이거 보세요.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어요. 자기네들이 큰 병원에다가는 이런 걸 보내겠어요? 우리처럼 작은 곳에나 이딴 걸 보내고 말이지"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제대로 볼 틈도 주지 않는다. 다만 과잉진료에 관한 것이지 않나 싶다. 그것하고 두 달치 약 처방하는 것 하고는 별 상관없을 것 같은데. 어차피 난 적어도 몇 달 이상은 똑같은 약을 복용해야 하므로 다음 달에 와서도 그냥 약만 처방받아야 한다. 게다가 얼마 전 산부인과에서도 3달 치 약을 처방받아 복용하고 있다. 아마 그 공문은 이미 몇몇 환자들에게도 나와 똑같은 방식으로 보여줬을 테고 앞으로도 그럴 요량으로 옆에 두고 있는 듯했다. 오래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아 웃으며 그냥 그렇게 처방해달라 하고 의자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돗자리를 편 사람처럼 나보고 성격이 급하니 어쩌니 하면서 스트레스를 줄여라 잔소리를 하기 시작한다. 뜬금없는 소리에 처음에는 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듣다 보니 내 얘기랑 비슷한 면이 많은 것 같다. 가만있지를 못하고 뭔가 자꾸 일을 만드는 편이다. 남들은 귀찮아서도 안 하는 걸 호기심 때문에 시작하는 경우가 잦다. 게다가 완벽주의 기질이 있어 내 성에 차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뭐든 악착같이 하는 편이다. 또한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될 것도 예민한 성격 탓에 그냥 넘어가지를 못한다. 내가 봐도 스트레스 지수가 좀 높을 듯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 중 많은 것들은 과거의 내 모습이었지 더 이상 지금의 내가 아닌 것이 더 많다.






나이를 먹으면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변화들이 있다. 우선 점점 '부지런'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대신 많은 것들이 '귀찮음'으로 다가온다. 예전 같은 부지런함을 유지하기 위해선 정말 얼마나 나 자신을 닦달해야 하는지 모른다. 40대였을 때만 해도 내 몸 하나 귀찮은 것보다 더 막중한 자식과 가족에 대한 의무와 책임감이 나를 몰아붙였다. 50대가 된 지금 그 무게는 확연히 줄어들었지만 게으름이란 놈이 어느새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오히려 적당히 대충 사는 내 모습에 서글픔이 느껴진다. 호기심도 점점 사그라들어 무언가를 새로이 시작하는 것에 대한 설렘보단 두려움이 조금씩 앞서고 있다. 또한 멀티가 가능했던 나의 집중력은 그야말로 노화라는 직격탄을 맞았다. 이젠 무엇이든 한 번에 하나씩 변화된 나만의 속도에 맞춰야만 가능하다. 몇 번의 크고 작은 실수 이후 기존의 급한 성격으로는 뭐든 하나도 제대로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느려지고 있는 몸에 발란스를 맞춰 다른 것들의 속도도 조절하고 있는 중이다.




나에게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가장 큰 요인인 '예민, 꼼꼼, 완벽'중 가장 다루기 힘든 부분은 예민이다. 꼼꼼과 완벽은 노화에 따른 인지 능력과 분별력의 저하로 어쩔 수 없이 둔화되고 있다. 수시로 깜박하는 스스로를 더 이상 믿지도 못한다. 그런데 이 놈의 예민은 오히려 더 촉이 살아나고 있다. 상황 판단도 눈치도 빠르고 똑같은 걸 봐도 남보단 더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요모조모 쓰임새가 많은 동시에 스트레스를 받는 가장 큰 원인이 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은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 일에 혼자 신경 쓰고 맘 상해한다. 보지 말아야 할 것들도 보이지 않는 것들도 다 보게 된다. 결국 그것에 대한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 필요했다.




아침마다 숲으로 향한 지 어느새 2년이 넘었다. 숲을 거닐며 내 안의 소리에 집중하고 복잡해진 마음을 정리해 본다. 다시 새롭게 시작된 하루를 위해 마음의 지저분한 방들을 비우고 청소한다. 조용한 아침 숲을 걷다 보면 예민한 나를 달래고 위로해주는 많은 것들을 마주치게 된다. 요즘은 비를 잔뜩 머금은 진한 흙냄새와 안개 낀 숲의 정경, 습한 숲 여기저기서 불쑥 고개를 내밀고 있는 신기하게 생긴 버섯들,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주는 풀벌레들의 울음소리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그냥 그 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긴장이 풀리고 스트레스가 줄어든다. 혼자만의 시간에 빠져 나 자신에 집중하다 보면 본인의 감정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된다. 아울려 무엇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고 스트레스를 받게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파악할 수 있다. 외면이란 나름의 좋은 방법은 그런 곳에 사용한다. 내게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킬만한 곳엔 아예 갈 생각도 관심도 두려 하지 않고 그런 사람들과는 만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실 스트레스받을 일이 대폭 줄어들었다. 아이들 교육 문제가 가장 그러했는데 큰애는 모두가 간절히 바라던 대학에 합격하여 재학 중이다. 고1인 딸아이는 우리 가족 누구도 받아 본 적 없는 성적을 매번 받아와 2년 후의 모습이 어떨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아이들이 공부에서 좋은 성과를 보여주니 우리 같은 평범한 집안에서는 가족들이 건강만 하다면 별 불란될만한 일이 없다. 게다가 남편도 지난날의 내 수고로움을 다 알아줘 부인을 위해 주려 하니 나름 제2의 신혼을 누리는 듯 알콩달콩 재밌게 산다. 불과 몇 년 전의 내 삶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치열했던 40대를 열심히 보내고 나니 여유롭고 편안한 50대가 날 기다리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거기까지만 하고 그쳤으면 괜찮았을 텐데 그의 말에 내가  맞장구를 쳐주자 노인네는 신이 났는가 보다. 그만 그의 진단에 큰 불신을 일으킬만한 소리를 한다.

"밤에 잠을 잘 못 자지요?"

아닌데... 잠 하나만큼은 너무나 잘 잔다. 불면증 같은 것은 나에게서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아이의 공부가 끝나는 11시 반까지는 자리를 지키고 있으려 안간힘을 다 쓰고 있다. 게다가 잘 때는 모든 정신을 다 내려놓고 오롯이 육체만 이끌고 이불 속에 들어가는 습관을 들여놨다.

"아뇨, 잠은 잘 자는데요"

"아침에 일어나면 몸이 찌뿌듯할 건데..."

"전혀요. 아침에 벌떡 일어나 매일 2시간씩 산에 갔다 오는데요"

"2시간씩이 나요? 그게 얼마나 됐나요?"

"2년이 넘었는데요. 그전엔 또 10년 이상 새벽에 한 시간 가량 하천 공원 길을 걸었고요"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이내 그가 말을 이어간다.

"그것 때문에 지금 살아 있는 겁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벌써 힘들었을 거예요"

지금 내게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건지 어이가 없어진다.

"지금처럼 운동 많이 하세요. 특히 바깥에서"

아니, 캠핑이며 등산, 낚시 등을 다닌다고 새까맣게 탄 내 피부색을 보면서도 바깥 운동을 권장하고 싶은지 참 할 말이 없다. 그런 건 올여름 햇빛 한번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뽀얀 사람들에게나 할 소리인데.

"지금은 괜찮을지 몰라도 나중에 60대가 되면 스트레스로 많이 힘들 거예요. 아무 병원 가도 상관없는 거는 됐고 스트레스 증상이 오면 나한테 와요. 바로 앞 전 분도 그런 환자입니다. 그런데 지금 몇 살이지?"

그러더니 내 진료지를 자세히 들여다본 후 이렇게 덧 붙인다.

"이제 만 50이면... 60 될 때까지 내가 여기 있을 수 있겠나..."

잠재 고객 확보가 실패로 끝났음을 짐작해서인지 본인의 나이가 서글퍼져서인지 갑자기 까랑까랑하던 목소리에 힘이 빠진다. 이렇게 정정하신데 무슨 그런 소릴 하시냐며 어설픈 립서비스를 한 후 서둘러 진료실을 나섰다. 병원을 나설 때 보니 대기실에 스트레스 집중 관리라고 적힌 진료항목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병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며 다신 그곳을 가지 않겠다 했다. 남편은 실실 웃으면서 다 맞는 얘기라고 날 놀린다. 하긴 나도 만약 잠에 관련된 것과 바깥 운동 열심히 해란 소리만 안 했어도 귀가 솔깃했을 수 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무식한 나라도 그 자리에 앉아 그 정도의 소리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말이 좀 빠른 사람을 보면 성격이 급하다는 추정이 가능할 테고 게다가 이 세상에 스트레스 없는 사람은 없다. 스트레스가 있다는 말에 반응을 보이면 그것이 초래하는 대표적인 증상인 불면증도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있다. 불면증이 있다면 당연히 밤에 푹 자지 못하니 아침에 일어날 때 개운하지 못할 것이고. '아닌데요'란 소리가 아직 들리지 않는다면 나처럼 다소 마른 체형의 사람에게 식욕부진과 우울까지 들먹일 수 있다. 문득 점집에서 무속인들이 사람들 점괘 봐줄 때 하는 행동이랑 아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든 두리뭉실하게 얘기해서 뭔가 하나 걸려들게 만든 후 어찌 보면 아주 보편적인 얘기들로 사람을 혹하게 한다. 그들의 말이란 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셈이다.




당연히 그 병원을 두 번 다신 가지 않을 것이다. 비록 의사는 아니지만 난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만큼의 스트레스를 갖고 있지 그 이상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 앞으로도 그것 때문에 병원을 찾을 일은 없을 테고 혹 있다고 해도 정신과를 찾지 내과를 찾을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의사야말로 과잉 진료를 시도하려 한 것 같아 살짝 불쾌한 생각이 든다. 그리고 굳이 스트레스를 제로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 의사 말처럼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게을러 빠진 사람들을 위한 달콤한 변명일 뿐이다.

"스트레스받게 그런 걸 뭐하러 해. 신경 쓰기 싫어"

나이가 들수록 이런 소릴 입에 달고 살면서 인생에서 아무런 도전이나 발전 없이 시체 놀이만 하고 있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봐오고 있다. 하지만 나의 경우 적당한 스트레스는 삶의 자극이자 동기부여이다. 어차피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스트레스를 내 몸에서 완전히 배척해야 될 적으로 여길 것인지 아님 적절히 이용해 더 신나는 인생을 만들어 갈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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