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니 Aug 06. 2022

커피 탐구 생활

  

아침 숲 산책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오면 항상 똑같은 생각을 가지게 된다. 샤워를 하는 동안 누군가 나를 위해 스크램블과 버터와 잼을 곁들인 토스트, 싱싱한 샐러드와 몇 조각의 과일 그리고 갓 내린 향기로운 커피로 차려진 아침을 준비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렇게 힘든 코스는 아니지만 숲 산책을 하려면 나름 산 속이라 오르막길도 제법 걸어야 하고 시간도 1시간 반이상 소요된다. 집으로 돌아와 땀범벅인 몸을 샤워하고 나면 약간의 나른함마저 느껴진다.               


 


누군가가 차려주는 아침을 먹은 지가 너무 오래다. 남편은 먹는 거 하나만큼은 그 누구보다 자신 있어 하지만 요리라면 질색하는 1인이다. 아들이 결혼해서 요리에 임하는 자세가 지 아빠와 똑같다면 며느리에게 집밥보단 밀키트나 외식을 권유할 것이다. 딸아이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가족들 아침 식사를 주말에 소꿉놀이하듯 가끔 차려줬다. 그 어린것이 직접 원두를 갈고 뜸을 들인 후 커피메이커를 사용해 나만을 위한 커피까지 내려줬는데 손끝의 야무짐이 어른 못지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본인에게도 그게 노동으로 와닿았는가 보다. 더 이상의 호사를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때때로 칭찬은 고래도 춤추지 못하게 할 경우도 있다.             



  

샤워를 끝낸 개운한 몸으로 음악을 틀어 놓고 그대로 소파에 앉아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고 싶지만... 실상은 한 숨 돌릴 틈도 없이 시계를 봐가며 부지런히 가족의 아침 식사를 준비해야 한다. 아침 메뉴만큼은 비교적 간단한 샌드위치나 토스트, 과일, 샐러드 등으로 준비하지만 그래도 30분은 족히 걸린다. 딸애의 식사가 다 준비되면 아이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다. 방학이라 이불속에서 게으름을 피우는 걸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앞으로 20분 이상은 계속 달래듯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깨워져야 한다. 조금이라도 귀찮은 내색을 비추거나 목소리 톤이 다정의 범위를 벗어나게 되면 그날 하루는 정말 피곤해진다. 남들과는 출근 시간이 다른 남편의 것은 언제든 일어나면 먹을 수 있게 따로 챙겨 놓는다. 그 후 늦게 일어나든 안 일어나든 점심때까지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10분 안에 일어날 확률이 95% 이상이다. 부엌에서 만들어지는 부산한 작은 소음과 연신 딸아이를 깨우는 내 목소리를 들으며 남편도 새로운 하루를 맞이 할 준비를 서서히 한다.




남편과 딸아이의 식사가 모두 준비되고 나면 그제야 나를 위한 커피를 내리기 시작한다. 가끔 수동으로 원두를 분쇄하는 게 너무 귀찮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해서 핸드 드립으로 내린 커피를 아침에 마셔야 본격적인 하루를 시작할 부스팅이 된다.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난 후 내 몫의 식사와 커피를 앞에 두고 식탁에 앉을 때면 순간 소소한 행복감이 밀려온다. 산책을 갔다 온 뒤 먹는 아침밥은 언제나 맛있다. 특히 캔 옥수수와 치즈 한 장을 넣어 만든 에그 스크램블만큼은 매일 먹어도 질리지가 않는다. 게다가 커피와 함께 먹는 빵들은 또 왜 그리 맛있는지. 다양하게 만들어 먹는 샌드위치도 맛있긴 하지만 역시 아침엔  토스트기에 금방 구워낸 바싹한 식빵이 제격이다. 거기에 아주 조금의 버터와 직접 만든 딸기잼이나 오렌지 마멀레이드를 발라먹으면 호텔 조식이 하나도 부럽지 않다. 입안이 약간 퍽퍽해지는 느낌이 들면 그때 커피 한 모금으로 그 메마름을 적셔준다. 덕분에 아침에 마시는 커피는 사실 주연이 아니라 조연이다.  




             





그렇게 나만의 아침 식사를 천천히 즐기고 있는 순간, 카톡의 알림이 울린다. 그녀다.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확인해보니 며칠 전 나에게 선물해준 원두에 대한 얘기다. 무슨 맛이 느껴지는지 개인적인 평을 듣기 바라는 눈치다. 갑자기 여유롭던 아침 식사가 숙제로 바뀐다. 하지만 빵과 함께 이것저것 다양한 맛을 접한 혀는 더 이상 예민하지 못하다. 잠시 물 한 모음으로 입안을 헹궈내 보지만 그녀가 바라는 미세한 맛들을 찾아내기엔 역부족이다. 무엇보다 장금이나 여느 미식가들처럼 섬세한 맛들을 잘 캐치해내고 그걸 적당한 단어로 표현할 능력이 내겐 전혀 없다. 그저 '입맛에 맞다 안 맞다, 맛이 있다 없다, 너무 진하거나 연하다' 이것이 커피에 대해 내가 내리는 지극히 주관적인 평의 전부이다.       



        

그녀는 이제껏 내가 만난 사람들 중 커피에 대한 호기심과 지식이 가장 풍부한 사람이다. 심지어 다양한 종류의 원두를 직접 로스팅한 후 그 맛을 비교해가며 마시는 걸 즐긴다. 아침마다 3개의 드리퍼에 모두 다른 종류의 원두를 내려 출근하는 가족들 가방에 한 병씩 넣어 준다고 했다. 나 역시 그녀에게서 매번 다른 종류의 로스팅한 원두를 수시로 선물 받는다. 그녀에겐 원두를 로스팅하고 커피를 내리는 일은 귀찮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큰 즐거움이라 했다. 또한 직접 로스팅한 원두를 나눠 주는 것 역시 기쁨이라 했다. 덕분에 나를 비롯한 그녀의 지인들은 아무런 발 품 없이 가만히 앉아 다양한 원두를 맛볼 수 있는 행운을 가지게 되었다.                             




이틀 전엔 세계 3대 커피 중 하나라는 '게이샤'를 선물 받았다. 처음엔 드립백에 포장되어 있는 걸 사서 나눠 준 것인지 알았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직접 로스팅하여 분쇄 후 드립백에 넣은 것이라 했다. 집에 일회용 드립백과 실링기까지 모두 구비하고 있단다. 주변에 그렇게까지 다양한 커피 용품들을 구비하고 있는 집은 본 적이 없다. 다시 한번 그녀의 커피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게이샤에 대한 유명세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맛보는 건 생전 처음이었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최대한 입안도 깨끗하게 만들고 온 몸의 감각을 총동원해 조심스레 한 모금 입 안에 넣은 순간... 눈이 저절로 동그랗게 떠졌다. 어떻게  맛을 표현해야 하는데 그저 부족한 어휘력과 표현력을 탓할 수밖에. 비싼 커피 마시고 저렴한 평을 내리기 너무 민망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게이샤'를 찾는 이유만큼은 충분히 짐작하고 남았다. 일단 내가 좋아하는 너무 무겁지 않은 느낌에 미각을 자극하는 균형 잡힌 산미, 거기에 정말 다양하고 풍부한 맛이 담겨 있었다. 누구는 그것을 과일향이니 꽃향이니 하던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맛을 음미해보니 과연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어째 설명만 들으면 예가체프나 케냐 AA와 비슷한 것 같지만 확실히 그것들과는 차별화된 귀품과 또 다른 깊은 맛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가 정작 궁금해한 것은 한 주 전에 내게 주었던 '케냐 AA'와 '과테말라 볼케이노'에 관한 것이었다. 순간 뜨끔했다. 그전에 받았던 '케냐 타무'까지 사실 원두가 좀 밀려 있었다. 집에서 먹고 있던 걸  다 먹고 개봉할 생각에 맛도 보지 않고 그대로 냉동실에 넣어 둔 것도 있었다. 일단 그녀에게 표현력이 부족해서 적당한 말을 찾기가 힘들지만 다시 한번 천천히 맛을 음미한 후 최대한 정리해보겠다 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하루에 한 종류씩, 추출에도 특별히 신경 쓴 후 노련한 바리스타마냥 그 맛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일단 코로 향을 들이켠 후 그녀가 커피를 마시는 방식대로 따라 해 본다. 물을 전혀 희석하지 않은 채 입 안에 한 모금을 넣고 천천히 혀로 굴린다. 순간 얼굴에 오만 인상이 다 쓰인다. 내가 아무리 커피를 좋아한다 하지만 이렇게 쓰고 진한 맛은 즐길 수가 없다. 그녀는 만날 때마다 항상 집에서 커피를 추출해온다. 그녀의 커피는 사실 나에겐 너무 진하여 물을 조금만 더 섞었음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그런 커피는 맹물 같은 커피라고 그녀는 정의 내린다. 그래도 집에서 만큼은 내 스타일대로 물을 좀 첨가해서 마셔야 제대로 된 맛을 그녀에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선 케냐 AA부터 맛을 음미해보았다. 원래 마시는 원두도 케냐 AA라 익숙한 맛이긴 한데 일단 훨씬 고급스런 맛이 느껴진다. 원두를 비교해보니 분명 집의 것이 더 크고 굵어 좋아 보이긴 한데 맛은 그녀가 로스팅해준 게 더 낫다. 산미가 높은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혀에 거슬리지 않는 정도다. 혼자 따로 놀지 않고 다른 것들과 조화를 이뤄 뭔가 맛의 시너지가 느껴진다. 평소 개인적으로 풀향이라고 생각했던 맛은 이번 기회에 다른 사람들처럼 꽃향이란 표현으로 바꾸기로 했다. 그러나 카카오 맛이 느껴진다는 그녀의 말은 동의할만한 단서를 찾지 못하겠다. 대신 내 혀와 코 끝에선 단맛이 탐지된다. 많고 많은 단 맛 중 조청에서 느낄 수 있는 향과 맛이다. 왜 하필 조청이냐고 물으면 그냥 조청 맛이 나서 조청이라 한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다음 순서는 과테말라 볼케이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화산재에서 자란 원두의 스모키하고 묵직한 맛이 날 것만 같았다. 개인적으로 남미 커피는 내 취향이 아니다. 하지만 웬걸. 이건 무겁지가 않다. 산미도 뛰어나다. 이제껏 갖고 있던 남미 커피에 대한 선입견을 한 방에 날리기에 충분했다. 이 정도의 맛이면 나 역시 즐겨 마실 의향이 있다. 그녀의 표현에 의하면 고소한 누룽지 맛이 난다고 하는데 그건 나도 100% 동의. 하지만 동시에 아주 섬세한 느낌도 감지된다.




마지막으로 케냐 타무. 원두 차이 때문인지 로스팅에서 기인하는 차이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셋 중 가장 산미가 강하다. 이건 또 뭐라 말해야 할지. 솔직히 하루에 한 종류씩 마시다 보니 전날에 마신 그 느낌은 어느새 고스란히 잊어버려 비교하기가 어려워진다. 두 개를 동시에 추출해 한 모금씩 마신 후 비교하지 않고는 이틀 전 마신 케냐 AA와 큰 차이점을 찾을 수가 없다. 게다가 며칠 후 다시 마셔보면 이전과는 느낌이 또 다르다. 점점 힘들어진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편하고 맛있게 즐기고 싶지 이렇게 분석해서 마시는 건 나에겐 다소 무리다.             



                    

며칠 뒤 그녀를 만나 그동안 내가 나름 열심히 찾아낸 맛을 설명해보았다. 그전에 다시 한번 부족한 내 표현력에 대한 양해도 부탁했다. 그녀는 조청 맛이 난다는 표현에 호응해 주었다. 나처럼 원두에서 단 맛을 느끼는 사람도 있단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서 커피 맛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거라 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 일주일 동안 숙제 아닌 숙제를 하면서 나름 커피 맛에 대한 공부를 좀 한 것 같다. 사람들이 말하는 꽃향과 과일향이 뭔지 이젠 좀 알게 되었고 어설픈 지식으로 갖고 있었던 몇몇 선입견도 지울 수 있게 되었다.






그녀에게서 받은 원두의 봉지를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더니 어느새 9개나 된다. 서로 알게 된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아마 그녀는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을 알게 되어 자신의 즐거움을 나눠주고 싶었을 것이다. 나 역시 뭔가 공통점을 가진 사람을 알게 되면 그 공감대를 나누려 한다. 하지만 주로 내가 나눠주는 입장이었지 받는 편이 아니었다. 그녀를 보면 가끔 내 모습이 보인다. 적극적이고 호기심 많고 뭔가 남들에게 새로운 걸 알려주는 역할을 자처하며 언제나 에너지가 넘치는. 그러나 그녀는 내가 갖고 있지 않은 대범함과 긍정적인 마인드 심지어 타고난 사교성까지 있다. 배울  참 많은 사람이다. 솔직히 그녀를 알게 된 것 자체가 올해 내게 온 가장 큰 행운이다. 본인의 품을 팔아 직접 로스팅 한 원두를 선물한다는 건 분명 그녀가 내게 마음의 한 켠을 내준 것이 틀림없다. 받는 것이 있으면 당연히 주는 것도 있어야 하는 게다. 그녀 역시  알게 된 것을 새로운 기쁨으로 여길 수 있게끔 나 또한 이 인연에 감사하고 노력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 스트레스는 제가 관리할게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