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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Mar 26. 2022

맞습니다. 저는 꼰대입니다

잠이 오지 않는다. 이제껏 별다른 수면 장애는 없었는데.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최대한 편한 자세를 취하며 집 나간 잠을 불러들이려 하지만 오히려 정신은 더 또렷해지고 있다. 차라리 그냥 일어날까? 그러나 일어나도 달리 할 일이 없다. 텔레비전 보는 것도 취미가 아니고 이 야심한 시간에 휴대폰이나 책을 들여다보는 것도 눈이 아프다. 조금만 더 버텨보면 잠이 돌아오지 않을까 미련이 남기도 하고. 이럴 땐 시계를 보지 말란 기사를 읽은 것 같은데 결국 유혹을 참지 못하고 휴대폰 시간을 슬쩍 확인해본다. 어라, 벌써 근 2시간째 이러고 있는 중이다. 그래, 내가 졌다.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딸애가 깨지 않게 조용히 일어나 카디건을 걸치고 거실로 나왔다. 무얼 할까 고민하다 마침 할 만한 게 생각났다. 이O아에서 사놓은 행주가 있다. 싼 맛에 샀지만 마감 처리가 시원찮아 몇 번 사용하면 시접이 다 풀릴 게 확실하다. 네 귀퉁이만 손바느질로 보강하자 하던 게 벌써 몇 달 전이다. 조용히 딸애 방으로 들어가 바느질을 시작한다. 세상에, 이 늦은 시간에 잠이 오지 않아 바느질을 하다니.




사실 잠이 안온 이유가 따로 있다. 잠자리에 들 땐 이런저런 고민이나 걱정거리들은 내일 아침까지 잠시 작별 인사를 해두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 밤 이것들이 끈질기게 잠자리까지 따라왔다. 지난 한 주 내내 머릿속에 맴도는 찜찜한 무언가가 있었다. 생각할수록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고 이 상태를 그냥 놔두는 것도 스트레스가 쌓이는 일이다. 그래서 내일은 어떻게든 담판을 지으려 마음먹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또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잠자리에 들어서도 계속 그 생각만 하다 결국 이렇게 야밤 바느질을 해야 되는 지경에 이르렸다.






매주 월요일 한 복지관에서 초등학생을 위한 요리 수업을 한다. 조리 시설이 하나 없는 일반 교실에서 하는 거라 수업에 필요한 여러 도구들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집에서 출발하기 전 필요한 목록들을 담당 복지사 선생님에게 미리 알려주면 챙겨서 교실로 가져다준다. 수업이 끝난 후 설거지가 필요한 것도 한 곳에 모아두면 역시 복지사 선생님이 알아서 다 정리해준다. 이런 일들이 안 그래도 바쁜 복지사 선생님을 더 바쁘게 만들어 2달 전부터 사회복지학과 휴학생을 자원 봉사자로 뽑아 그 일을 대신하게 하고 있다. 아울러 내 수업 보조도 같이 해주고.




혼자서 동분서주하다 도우미 선생님이 생기자 너무 좋았다. 안 그래도 방학이라 아이들 수가 배로 늘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손이 하나 더 생기자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봉사 선생님에게 나이를 물어보니 우리 큰애보다 겨우 1살 많다. 엄마뻘인 사람과 같이 일하는 게 얼마나 불편할까 싶어 좀 안쓰러워 보였다. 동시에 아동 센터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큰애 생각도 나고. 그래서 나름 편하고 재밌게 봉사 활동하고 갈 수 있게 신경을 썼다. 집에 가서 먹어라고 수업 시간에 하는 것들도 따로 챙겨도 주고 정 바쁠 때만 도움을 받으려고 했다. 사실 봉사 선생님은 손은 굉장히 빠른데 꼼꼼함과 섬세함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라 도움받고자 하는 일도 좀 한정적이다. 가만 보면 손 끝 야문 초등생보다 못하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언젠가 딸기 보틀 케이크를 만드는데 그날따라 코로나로 아이들이 왕창 결석을 하게 되었다. 재료도 많이 남고 수업 듣는 아이들 수도 작아 그냥 앉아서 같이 하나 만들어라고 챙겨줬다. 근데 만드는 걸 보니 23살 아가씨가 만들었다 보기엔 모양이 영... 이왕 만드는 거 좀 이쁘게 만들어라 했더니 어차피 집에 가서 자기가 먹을 거라서 괜찮다고 한다. 몇 주 전 비슷한 말을 한 아이가 생각났다.

"어차피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은데 굳이 왜 이쁘게 만들어요?"

도대체 고 녀석은 집에서 엄마, 아빠가 무슨 얘기 하는 걸 들은 건지.







그 선생님에게 원했던 업무는 다음과 같다. 내가 도착하기 전 조리 도구들 챙겨놔 주기, 수업 중 다니면서 아이들 책상에서 나오는 쓰레기와 다 사용한 그릇 치워주기, 날 애타게 찾는 아이들 중 간단한 것은 가서 도와주기, 완성된 음식은 용기에 담아 애들이 들고 갈 수 있게 해 주기, 수업이 끝난 후 나랑 같이 교실 정리하기. 막상 나열해 적으니깐 좀 많은 것 같지만 이 정도면 그리 힘들지도 지겹지도 않게 봉사 시간을 채울 수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본인의 주 업무를 조금씩 미뤄두고 자꾸 내 영역을 침범해 들어온다.




이왕 하는 거 잘하고 싶은 욕심에 손이 좀 가는 요리들로 수업한다. 요리라고 하나 조리 시설 하나 없는 곳에서 하는 것이니 어째 보면 일종의 조립식 만들기이다. 시간 내에 아이들이 완성할 수 있게끔 집에서 재료 하나하나 신경 써서 준비해 가는 내가 더 힘들지 아이들은 별 힘들어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집중해서 하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이 선생님은 맨날 어렵다 한다. 아니, 초등학교 1학년들도 아무 소리 안 하고 만드는데 도대체 자기가 왜 힘들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되었다. 모든 재료 준비도 수업도 내가 다하고 선생님은 그냥 보조만 하면 되는데. 수업 중 발생할 수 있을 실수들을 줄이기 위해 전날 집에서 꼭 한번 시뮬레이션을 하고 사진을 찍어가 아이들에게 보여준다. 그러면 아이들 반응은 언제나 비슷하다.

"와!", "이쁘다!", "맛있겠다!"

그러나 봉사 선생님은 반응이 다르다.

"선생님, 너무 어려워요",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요?", '초등학교 저학년을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거 아네요?"

슬슬 귀에 거슬린다. 아이들 가르치는 건 내가 해야 하는 일인데 가만 보니 수업 중 그 투박한 손으로 자꾸 아이들 옆에 가 있는다. 이 선생님이 아이들 가르치는  좋아서 러나 싶어 한번 이렇게 물어봤다.

"선생님, 지금 하고 있는 봉사 활동이 재미있으세요?"

당연히 다른 봉사 활동보다 재미있고 이색 경험을 하는 거라 생각할 줄 알았다. 그러나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한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열심히 하려고요"







어느 날 수업 중 갑자기 봉사 선생님이 칠판 쪽으로 오더니 내가 그림과 곁들여 설명해 놓은 판서에 뭔가 덧붙여 적고 있다. 무슨 내용인가 봤더니 이미 내가 그림과 함께 설명을 한 것이다. 자기 딴엔 그냥 말로 흘러 보내기보단 아이들이 칠판을 보고 수시로 확인하게끔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내용은 내가 꼭 칠판에 적어주고 다시 아이들에게 묻고 재확인을 한다. 칠판 가득 그림과 내용들이 이미 적혀 있다. 게다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게 나오면 1, 2학년 아이들은 선생님을 목청껏 부르고 찾지 칠판에 적힌 글을 잘 확인하지 않는다. 근데 이 선생님이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기분이 좀 이상해진다. 봉사 활동으로 보조하는 선생님이 내가 하는 수업에 이렇게까지 나서는 건 실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솔직히 좀 당황스러워 그냥 넘어갔는데 바로 지난 수업 시간 또다시 앞으로 나와 칠판에다 무언가를 적는다. 이번엔 좀 불쾌하다고까지 느껴진다.




내가 이상한 건가 그 선생님이 실수한 건가 판단이 안 섰다. 남편에게 이 얘길 하니 오히려 날 나무란다. 열심히 하는 선생님에게 왜 그러냐고. 그래, 열심히는 하지. 그건 나도 인정하는데 그녀가 열심히 해야 되는 부분은 따로 있다. 난 내 수업에 크나큰 자부심을 갖고 나름 철저한 준비와 공부를 한다. 그런데 그런 과정에 어떤 관여도 안 하는 잠시 와서 도와주는 선생님이 수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하고 수업 도중에 칠판에다 판서까지 하는 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다. 손도 그리 야무지지 않은 사람이 아이들 옆에 서서 자꾸 직접 가르치려고 하니 수업이 어렵다는 얘기를 수시로 하게 된다. 무엇보다 그러다 보니 정작 본인이 해야 할 제일 중요한 일은 소홀히 된다. 복지사 선생님에게서 한 아이가 완성품을 들고 집으로 가다 떨어뜨려서 못 먹게 되었다며 떨어뜨려도 별 상관없게끔 잘 포장해달란 부탁까지 듣게 되었다. 수업 중 정신없이 바쁜 나를 도와 봉사 선생님이 열심히 해 줄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그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선생님에게 어떤 식으로든 얘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 역시 점점 헷갈리는지 그 선생님과 나를 동일한 위치에 놓고 보기 시작한다. 내가 진짜 지들 요리 선생님인데. 하지만 조리 있고 설득력 있게 말하지 못하는 내가 딸 뻘인 그녀에게 어떻게 얘기하지. 내 새끼들도 엄마 잔소리 듣기 싫어하는데. 잘못했다간 복지관에서 내 평만 나빠질 수 있고 게다가 꼰대 소리까지 덤으로 들을 수 있다. 분명 그 선생님도 열심히 하려고 그러는 건데.




일주일 내내 그 생각에 사로잡혀 지냈다.

'그래, 그냥 넘어가자. 굳이 뭐하려 듣기 불편한 소릴 하려고. 봉사 시간 채우고 나면 관둘 사람인데. 처음부터 역할 분담을 확실히 하지 않은 내 잘못이지. 이제 와서 뭐라 하면 오히려 기분 나쁠 수도 있고'

'아니지, 봉사 시간을 얼마나 채워야 하는지 모르잖아. 휴학생이라 시간도 많을 거고 분명 수업에 더 관여하려 할 건데. 그렇게 되면 내가 감수할 불편함은 점점 켜질 테고 수업에 향한 나의 열정은 반대로 식을 고. 그래, 이건 내 수업이야. 내가 재밌고 기분 좋게 수업을 해야 아이들에게 더 도움이 된다'

결국 그 선생님에게 정확하게 의사를 표현하고 앞으로 해야 할 업무에 대해서 다시 얘기해주기로 했다.






드디어 수업이 있는 날이 밝았다. 이른 아침 숲길을 걸으며 지난밤 열심히 준비해 둔 대사를 마지막으로 점검해본다. 사실 아직까지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남편은 그런 소릴 하지 말라고 계속 얘기한다. 그러나 이미 마음은 굳혔다. 이렇게 매번 속으로 언짢아할 바엔 얘기를 해서 시정하는 게 더 나을 수 있다.




교실에 도착해보니 선생님이 안 보인다. 수업 1시간 전부터 봉사 시작 시간이라 평상시 같으면 용기들을 챙겨두고 날 기다리고 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교실로 들어왔는데 막상 선생님이 보이지 않자 뭔가 김 빠지는 느낌이다. 그때 담당 복지사 선생님이 들어온다.

"선생님, 오늘 봉사쌤 못 와요. 어머니가 코로나 렸대요"

이럴 수가... 내가 봉사 선생님과 진지한 얘길 나누기 위해 한 주 동안 얼마나 고민 고민하고 심지어 지난밤 잠도 대로 못 잤는데. 지난 시간 나의 고뇌들이 아무런 쓸모가 없어졌음을 깨달은 순간 그냥 웃음이 다.

'사람이 마음을 곱게 써야지. 그 어린 봉사 선생님이 요리 선생님 역할 좀 한다고 그리 기분 나빠하더니 꼴좋네. 다른 사람보고 꼰대 짓 한다 뭐라 하지 말고 너나 꼰대 짓하지 마'

맘 한구석에서 날 비웃는 목소리가 들린다. 맞는 얘기긴 하다. 그래도 그동안 맘고생한 날 위해 스스로 위로의 말을 건네본다.

'그래, 각본대로 지 않는 게 인생이잖아. 대신 내가 그 맘 알아줄게. 나 같아도 기분 나빴어'




집으로 돌아와서도 아직 그 여파가 남아 있다. 지난밤 잠도 자지 않고 손바느질한 이O아 행주가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세탁기에 넣고 돌렸더니 물이 빠져 얼마 전 고등학교 입학한 딸애의 흰 교복 셔츠를 푸르게 물들였다. 바느질만 허술한 게 아니라 염색도 시원찮았다. 깊은 한숨과 함께 락스와 과탄산소다를 이용해 그 물을 빼려 애쓰며 이런 생각을 한다.

'아... 인생이란 참 맘먹은 대로 되지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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