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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Apr 25. 2022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언니야"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순간 뜨끔해진다. 전화해봐야지 생각해놓고 계속 며칠을 깜빡하고 있었다. 전화하는 걸 즐기지 않지만 약간의 의무감으로 한 번씩 연락을 해야만 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녀와의 관계에선 그런 부담이 덜 하다. 서로 어느 정도 잘 알기에 그녀와의 통화는 언제나 볼 일이 있을 때만 이다. 우리 사이에 안부 전화니 그냥 전화해봤다 이런 건 없다. 바로 옆 아파트에 사니 할 말이 있거나 근황이 금하면 만나서 직접 얼굴을 보면 된다. 그렇다고 그리 자주 보는 것도 아니지만. 그런데 2달 전 그녀의 갑작스러운 수술로 인해 당분간 얼굴 보는 게 힘들어졌다. 회복 중이라 바깥 외출이 좀 제한적인 그녀를 위해 나름 안부 전화를 한다고 하는 게 1주일에 고작 한 번이다. 허나 지난주는 또 뭐가 그리 바빴는지 그것도 그냥 넘어갔다. 오늘은 꼭 해야지 생각하고 있던 참에 그녀에게서 먼저 전화가 온 것이다.




그녀 역시 내게 그냥 전화하는 일은 드물다. 대부분 한 가지 이유에서 즉 온갖 먹거리들을 나눠주기 위해 전화를 한다. 원래 이맘때면 그녀로부터 배달될 것들이 있다. 거제도에 별장 같은 집이 또 하나 있는 그녀는 주말에 시간이 나면 남편과 그곳을 찾는다. 지금 그녀의 거제도 집 뒷산에 가면 온갖 산나물과 나무의 어린순들이 지천이다. 나 같은 눈 뜬 봉사는 봐도 뭐가 뭔지 모르는 것들이지만. 온 산을 흩고 다니며 나물을 뜯고 어린순들을 따서는 깨끗이 씻고 다듬은 후 양념까지 해서 나에게 배달된다. 하지만 이건 수술 전 이야기이고 올해는 그녀의 맛있는 봄나물을 맛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녁 준비할 때쯤을 맞춰 전화가 온 것이다.




"밥해? 그럼 오늘 반찬 하지 말고. 나물 몇 개 무쳤다"

역시. 몸도 아직 성치 않은데 무슨 나까지 줄려고 그러냐 한 소리하자 웃으며 그 정도는 할 수 있단다. 멀쩡한 내가 회복 중인 동생을 위해 반찬을 해줘야 하는데 오히려 얻어먹으려니 평소와 다르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도 줄 게 뭐 있을까 생각해보니 마침 저녁 메뉴로 오향장육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고기 삶아서 좀 들고 갈 테니 그때 나물도 받아간다 하고 급히 전화를 끊었다. 다행히 핏물은 미리 빼놓았지만 1시간 안에 고기를 삶고 집에 있는 생크림으로 딸기 샌드위치까지 만들어 들고 갈려니 마음이 급해졌다. 시험기간이라 예민해진 딸애의 저녁 시간도 늦어지면 안 되기에 갑자기 몸과 마음이 동시에 바빠졌다.






다행히 가족들 저녁 식사시간에 늦지 않게 모든 걸 마무리 짓고 그녀에게서 받아온 무거운 종이 가방을 열어 보았다. 비닐봉지에 싸여진 나물 반찬이 꽤 여러 개다. 예전에 그녀에게 뻔뻔스러운 부탁을 했었다. 가만 받아먹을 땐 너무 좋지만 빈 그릇을 반납할 때 손이 부끄럽다며 제발 1회용 비닐봉지에 넣어달라고. 사실 반납해야 될 용기가 쌓일 때마다 그 안을 뭘로 채워 다시 돌려줘야 하나 고민도 쌓인다. 마땅한 것도 없지만 무엇보다 내 솜씨로 그녀를 만족시킬 수도 없다. 괜찮다고 그냥 맛있게만 먹어주면 된다고 했지만 내가 괜찮지 않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 후 그녀는 내 뜻대로 비닐봉지에 이것저것을 싸준다. 그런데 딱하나 비닐봉지가 아닌 밀폐 용기에 가득 담겨 있는 것이 있다. 바로 가죽 고추장 장아찌이다. 그녀의 가죽 장아찌를 초등학생이던 딸아이가 아주 맛있게 먹었다는 말을 듣고 그 후 해마다 빼놓지 않고 만들어 나눠준다. 이건 오래 두고두고 먹고 또 가지런히 담아서 보관해야 하기에 용기에 넣은 것 같다. 아마 이 통은 1년은 지나야 지 주인에게 돌려질 운명일 게다. 봉지를 하나씩 풀어 그릇에 담아보니 그 종류가 5가지나 된다. 집 마당에서 딴 당귀잎과 바로 먹을 수 있게 데친 두릅까지 있었다. 그녀 말에 의하면 본인은 양념만 하고 나머지는 남편이 다 했다지만 그래도 이걸 종류별로 데치고 무치려면 적잖은 시간과 노고가 들어가야 한다. 그 몸으로 오랫동안 서 있었을게 확실하다.




가죽 고추장 장아찌와 당귀잎 그리고 두릅



용기에 옮겨 담으면서 끊임없이 입에 집어넣는다. 그녀의 된장 양념은 정말 기똥차다. 쌉쌀한 봄나물에 구수한 된장 양념은 그야말로 환상의 조합이다. 토속적인 것들이 어울려져 만들어내는 소박하고 정겨운 시너지 효과에 입 이 즐거워진다. 이것 통에 담으면서 한 젓가락 입에 넣은 후 감탄을 하고 다음 것 통에 담으면서 또 한 젓가락 입에 넣고는 그 맛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분명 다 다른 맛인데 어째 또 다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똑같은 된장 양념에다 모두 데친 나물들이라 색도 비슷하니 더더욱 그런 것 같다. 혼자 이 상황이 우스워 픽 웃음이 났다. 저녁을 먹으러 나온 남편과 딸아이의 반응도 나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이거 다 똑같은 거 아냐?"

하나씩 먹어보면 다른 게 확실히 느껴지는데 골고루 먹고 나면 뭐가 뭔지 아리송하다. 제피 잎은 그 특유의 향 때문에 제일 먼저 신분이 탄로 났지만 나머지는 정체를 밝히기가 좀 애매하다. 그저 쌉쓰리한 정도의 차이만 두드러진다. 이건 좀 많이 쓰고 요건 덜 쓰고. 저건 뒷 맛에서 달큼한 맛이 살짝 나고.




갑자기 '히든 싱어'라는 방송이 떠올랐다. 출현자들은 각자의 공간에 들어가 한 가수의 같은 곡을 모창으로 한 소절씩 이어 부른다. 들을 땐 분명 목소리 톤이 다 다른데 노래가 끝나고 나면 뭔가 뚜렷한 구분이 잘 안 된다. 모두 한가수의 모창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에 분명 다른 점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어째 또 다 비슷한 것 같다. 오늘 그녀의 나물 반찬이 꼭 내게 그러하다. 각자의 특유한 향과 맛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한자리에 모이니 '쌉쓰리함'과 '봄나몰'이라는 공통점에 묶여 개성이 희석되어 버린다. 이래서 '범주화'니 '카테고리'니 하는 게 무서운 게다. 각각의 독특함을 무시한 채 그저 하나의 뭉텡이로 만들어버리니.




취나물도 있다고 했는데 그건 또 어디에 같이 섞여 있는 건지...



혀끝으로 향긋한 봄의 풍미를 제대로 느끼긴 했는데 그녀가 날 위해 열심히 만들어준 나물 이름은 알고 있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서 답이 왔다. 가시오가피 나물, 엄나무 순, 제피 잎, 취나물, 방풍과 곰취 나물 그리고 두릅까지 정말 다양하기도 하다. 오늘 저녁 이렇게 다채롭고 풍성한 봄 밥상을 선물 받은 사람은 아마 나 말고 드물게다. 앞으로 일주일은 다른 밑반찬이 전혀 필요 없을 듯하다. 이제껏 인복은 없는 편이라 생각해왔는데 그녀 덕분에 풍성해진 식탁을 보니 말년에 인복이 들어온 것 같다. 그녀가 내게 봄나물은 보약이라 하니 약이라 생각하고 많이 먹으란다. 이렇게 맛있고 정성이 들어간 약이 세상에 어디에 또 있으며 가족 말고 누가 날 이리 챙겨 줄까 싶다. 그저 모든 게 고마울 뿐이다.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분명 그녀도 나랑 닮은 구석이 있을 테고 같은 범주화에 들어가는 속성을 꽤 가지고 있을게다. 그러고 보니 둘 다 첫인상이 좀 강한 편이고 한번 보면 잘 안 잊히는 얼굴들이다. 매사 좋고 싫음이 확실한 것도 자식에 대해 평소 갖고 있는 생각도 비슷하다. 본인이 좋으면 아무리 힘들어도 시간과 정성을 들여 뭐든 남에게 갖다 바치는 것 또한 닮았다. 이제껏 별 생각이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그녀와 나사이엔 닮은 점이 꽤 있구나. 그러나 비슷한 듯 비슷하지 않은 봄나물들처럼 남들이 볼 땐 어쩜 비슷해 보일지 모르나 사실 그녀는 나보다 훨씬 더 부지런하고 똑똑하며 손맛 또한 좋다. 게다가 나이가 7살이나 많은 나를 허물없이 대해주는 다정함까지 있다. 오늘 저녁 향긋한 봄나물들 덕분에 그녀와의 관계를 한번 찬찬히 되짚어 시간을 가져 본다. 동시에 봄나물만큼이나 진한 향을 가진 그녀가 별 탈 없이 잘 회복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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