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니 May 28. 2022

우리는 가끔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오늘도 오전 원어민 영어회화 수업은 언제나처럼 똑같은 걸 묻고 답하는 걸로 시작되었다.

"What did you have for breakfast?"

앉은 순서대로 한 명씩 본인의 아침 식사 메뉴를 말한다. 대부분 아침은 간단히 먹고 오기에 별 특별한 건 없다. 차라리 어제저녁에 뭘 먹었는지 말해라 하면 훨씬 다양한 메뉴들로 모두의 이야깃거리가 더 풍성해질 텐데. 다소 짧은 영어 실력의 나조차도 한동안 떠들 수 있다. 버터와 마늘을 듬뿍 넣고 구운 향미가 장난이 아닌 마늘빵, 갖은 해산물을 아끼지 않고 마지막에 모차렐라 치즈를 뿌려 사르르 녹인 토마토소스 스파게티, 거기에 직접 담은 라임청으로 만든 상큼한 에이드까지 내가 만들었지만 정말 만족스런 지난 저녁 식사였다. 이에 반해 나를 포함한 모두의 아침 식사는 늘 비슷비슷하고 다소 따분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오늘은 좀 다르게 얘기를 해보자 맘먹고 내 차례가 오기 전까지 열심히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해본다.






항상 때가 되면 제철에 맞춰 미리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지난달엔 딸기를 사서 일 년 치 먹을 딸기잼을 만들어 두어야 했다. 나에게 있어선 김장만큼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뭐가 그리 바쁘고 정신이 없었는지 잼을 직접 만들어 먹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그 시기를 놓쳐버렸다. 5월이 되고 더 이상 늦추어지면 안 되기에 서둘러 딸기를 사서 잼을 만들려 했으나 철이 지나서인지 딸기가 잘 보이지도 않았다. 간혹 눈에 띄는 것도 잼용으로 쓰기엔 너무 아까운 것만 비싼 가격으로 팔리고 있었다. 좀 더 부지런하지 못했던 나 자신이 원망한들... 몇 군데를 돌아다닌 끝에 예년보다 다소 비싼 가격으로 겨우 4박스의 딸기를 사서 잼을 만들 수 있었다.  




여느 때 같으면 잼을 만들 때 눈대중과 혀끝의 자체 당도 측정기로 설탕을 계량한다. 그러나 이번엔 잼을 만들어 나눠 줄 지인도 있고 해서 평소와 달리 신경이 좀 쓰였다. 레시피를 검색한 후 저울까지 동원해 설탕량을 재고 정성 또한 더 들였건만... 결과는 최악이었다. 레시피에 나와 있는 설탕량보다 30%는 적게 넣었는데도 너무 달고 뻑뻑한 게 흡사 시중에서 파는 잼처럼 돼버렸다. 그 맛이 싫어 매년 손수 잼을 만들어 먹는 건데. 심지어 딸아이는 이게 엄마가 만든 게 맞냐고 내게 물어본다. 나 역시 내가 만들었다고는 차마 믿기 싫은 그런 상태였다. 이상하게 더 잘해보겠다 욕심을 부려 뭔가를 하면 오히려 기대 이하의 결과가 나올 때가 간혹 있다. 역시 인생이란 마음을 비우는 게 최고란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이걸 일 년이나 두고 먹기엔 너무 입맛에 안 맞아 결국 이 잼을 살리기 위한 응급조치를 실시하기로 했다. 그동안의 실패로 얻은 나만의 노하우가 있다. 잼의 당도와 농도가 마음에 안 들 땐 즉 이번처럼 너무 달거나 되직한 경우 딸기를 첨가해서 다시 만들면 소생시킬 수 있다. 생딸기는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기에 냉동딸기를 사서 레몬까지 듬뿍 짜 넣어 죽은 잼을 살리기 위한 긴급 수술에 들어갔다. 다행히 수술 결과는 만족스러워 딸아이의 고개가 끄덕여지는 맛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살려낸 딸기잼으로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는 얘기를 하자 한동안 그것에 관한 대화가 이어졌다. 레시피를  따라 만드는 것보다 요리 경험이 많은 내 손이 더 정확할 거라고 옆에 앉으신 분이 친절히 말씀해주신다. 그 말에는 나의 요리 실력을 인정해주시는 듯한 감사한 뉘앙스가 깔려 있음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눈에 보이는 그대로 보고 따라 하는 것보다 내가 원하는 나만의 방식으로 하는 게 더 좋은 결과를 낳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원어민 강사는 레시피나 책대로 그냥 따라 하는 걸 'by the book'이란 표현을 쓴다고 알려줬다. 그 후 또다시 다른 사람들의 평범한 아침 메뉴가 이어지는 동안 순간 누군가 생소한 음식에 대해 말하는 게 귀에 쏙 들어온다.






'카이막'이라 했다. 그녀는 터키 문화원에서 원 클래스로 전통 터키 음식을 배웠단다. 우유와 생크림만이 그 재료로 빵에 발라먹는 건데 일전에 백종원 씨가 천상의 맛이라 찬사를 보냈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불현듯 뭔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코로나 이전에 백종원 씨가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그곳의 음식을 먹고 소개해주던 프로그램이 있었다. 당시 터키를 찾은 그가 아침 식사로 빵에 하얀 무언가를 발라 먹던 게 기억났다. 정말 맛있게 먹던 모습이며 그 맛에 반해 한국에서 생산하려다 기대한 맛이 안 나와 포기했다고 말하던 게 생각났다. 그게 바로 '카이막'이었다. 카이막은 원래 물소젖으로 만드는 건데 우리나라에서는 물소젖을 구할 수가 없으니 도저히 그 맛이 나지 않았다 했다. 무엇인지 알고 먹는 사람과 처음 접해 본 사람의 기대치는 다르겠지만 백종원 씨도 포기한 걸 만들어서 맛있게 먹었다니 흥미로웠다. 게다가 그녀 말에 의하면 수업료가 한 클래스에 6천 원이란다. 안 그래도 요즘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고 싶었는데 저렴한 가격에 터키 전통 음식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아 나도 수업 신청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문화원도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자전거를 타고 가면 될 것 같았다. 다른 분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그녀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고 그녀는 본인이 알고 있는 한 열심히 설명을 해주었다. 그런데 다시 수업료를 언급하는데 가만 보니 6천 원이 아니라 6만 원이란다. 하긴 재료비도 안 되는 6천 원은 내가 생각해도 너무 낮은 듯했다. 그러나 문화원에서 요리 수업을 하는 이유는 자국의 문화를 알리기 위한 것일 텐데 그 목적에 비해 수업료가 많이 비싼 듯했다. 다른 분들도 수업료가 비싸다고 한 마디씩 한다.




천상의 맛이라며 카이막을 맛있게 먹는 모습



잠시의 break time 동안 그녀에게 백 종원 씨가 카이막을 먹는 방송을 예전에 본 적이 있다 했다.

"재료가 우유와 생크림뿐이라면서 그에 비해 수업료가 많이 비싼 것 같아요. 난 처음에 6천 원으로 알아 들었는데"

"빵도 같이 만들었거든요. 그냥 터키 문화 경험해본다 생각하고 한번 참가해봤어요"

그러자 다른 분도 한마디 던진다.

"나도 6천 원으로 었는데. 빵도 재료비가 얼마 한다고 수업료가 비싸긴 비싸다"

그때 조금 전 나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주셨던 분이 던진 한마디에 모두들 빵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분은 우리 수업 최고의 엘리트이자 전직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이시다.

"난 만 육천 원으로 알아 들었는데"

다른 분도 아니고 영어를 제일 잘하시는 분이 우리처럼 잘못 알아듣다니 내심 반가웠다. 한편으로 모두 영어 초보도 아니면서 어쩜 이렇게 다 다르게 이해했는지 신기하기도 했다. 옆에서 가만히 대화를 듣고 계신 한 분이 웃으면서 만 육천 원이 그나마 가장 합리적인 가격이라 말씀하신다.




영어로 누군가 숫자를 말하면 이상하게도 듣는 순간 바로 알아듣는 게 힘들다. 한참을 입안에서 그 단어를 중얼거리고 나서야 겨우 아라비아 숫자로 머릿속에 그려진다. 근데 나뿐 아니라 다른 분들도 숫자에 유독 약하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sixty thousand'라 말한 걸 몇몇은 'six thousand'로 또 몇몇은 'sixteen thousand'로 알아들었다. 그녀는 자기 발음이 시원찮아서 그런 거라 하지만 분명 아닐 게다. 아마 듣는 사람의 마음이 그러길 바래서 인지 모른다. 솔직히 수업료가 6만 원이나 될 거라고는 모두들 전혀 생각을 못했기에 'six'라는 단어가 들리자마자 뒤는 제대로 듣지도 않고 본인이 듣고 싶은 대로 가격을 정해버렸다. 나의 경우 문화원에서 하는 수업이라 이익 창출이 그 목적이 아니기에 부담 없는 가격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생각해서 6천 원으로 책정했다. 게다가 저렴한 걸 무척 즐기는 궁상맞은 기질 또한 내 안에 있고. 또 어떤 분은 재료비와 약간의 인건비를 생각해서 나름의 가격을 정했을 게다.






살다 보면 그게 아닌데도 착각과 오해 속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을 보고 듣는 경우가 종종 있다. 증상이 심각해지면 꼰대도 스토커도 정신 병자도 될 수 있겠지만 오늘처럼 별 대수롭지 않은 일에 이런 착각이 생기면 오히려 재밌기도 하다. 한편으론 때로는 그런 세상이 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결과 다소 독창적이거나 창의적인 것이 만들어지기도 하니깐. 가령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맘에 드는 사진을 하나 선택하고 스케치를 한 후 어떤 색으로 이 그림을 풀어 나갈까 한참을 들여다 보고 고민한다. 예전에는 사진 속 색상을 그대로 재현하려고 애썼지만 요즘은 나만의 감성을 더해 나가려 한다. 가만히 사진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음 남들 눈엔 보이지 않는 색상들이 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사진에선 찾아볼 수 없는 색상이지만 내가 느끼고 싶은 대로 물감을 섞어 칠하다 보면 꽤 나쁘지 않은 결과가 나온다. 인상파 화가 같은 그런 표현력까진 전혀 구사하진 못하지만 가끔 사람들이 내가 만들어낸 색감에 감탄을 해줄 때면 나의 시선대로 바라보는 세상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눈에 보이는 대로 레시피를 따라 했다가 맘에 안 드는 딸기잼이 완성되는 것보단 훨씬 나을 것이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잠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속이 좀 꼬여있는 나만 한 번씩 내 멋대로 해석하여 세상을 보는 줄 알았더니 다른 사람들도 다 비슷하구나.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참 다행이다'

무엇보다 원어민과 대등하게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여 잘못 알아듣기가 힘든 분마저 그런 착각을 하는 걸 보니 더 큰 위안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분이 정말 그냥 잘못 알아 들었을 뿐인데 그분의 마음도 나랑 비슷했을 거라 착각하고 나 혼자 위안을 받는 상황일 수도 있을게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내 마음은 이미 어루만져졌다. 남에게 피해 주는 것도 아닌데 나 편한 대로 잠시 오해하고 착각하는 것도 꼭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적당한 타이밍에 착각 속에서 깨어나면 된다. 나이는 실패한 딸기잼을 살릴 수 있는 경험을 내게 주었을 뿐 아니라 착각도 그걸 깨닫는 순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후다닥 제 길로 돌아올 수 있는 뻔뻔함과 능청함도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실 듣고 싶은데로 듣고 보고 싶은데로 보는 게 제일 속 편한 세상이니깐.

매거진의 이전글 제발... 절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될까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