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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May 31. 2022

제가 요즘 좀 바빠서...

거절의 또 다른 표현

가끔 정신없이 바쁜 때가 있다. 머릿속에 두서없이 떠다니는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끄집어 당겨 순서를 정해준 뒤 차례대로 해치워 나가야 한다. 조금 나아졌긴 했지만 해야겠다고 맘먹은 일들을 아직 끝내못했거나 미뤄졌을 때의 그 찝찝함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일종의 강박관념이다. 지금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다이어리에 그날그날 해야 할 일들을 쭉 나열해 적었다. 빨간 볼펜으로 하나씩 끝낸 일들을 지울 때마다 그리고 하루를 마감하며 모두 빨간 선으로 그어진 다이어리를 볼 때마다 가슴속 벅차오르는 그 뿌듯함과 쾌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 오늘 하루도 열심히 잘 살았구나'하며 스스로를 대견해했다. 동시에 가끔 눈에 띄던 빨간색으로 미처 덮혀지지 못한 것들은 나태했던 나의 흔적들이자 눈에 거스리는 가시였다. 물론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스스로 만든 굴레였지만 어느 순간 나만 왜 이렇게 혼자 발을 동동 구르며 살아야 하나 싶었다. 이렇게 열심히 살면 주위에서도 좀 알아주고 같이 도와주면 좋으련만 항상 나만 바둥거리는 것 같아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더 이상 나 자신을 옥죄지 말자 싶어 3년 전 과감하게 25년 가까이 적어오던 다이어리를 끊어버렸다. 이젠 모든 걸 그냥 머릿속으로만 정리하고 나쁜 기억력 때문에 놓쳐버린 건 그냥 놓친 대로 놔두고 살기로 했다.




지난 3, 4월은 다이어리 생각이 간절했던 그런 시기였다. 조금만 정신줄을 놓아버리면 꼭 해야 될 일조차 깜빡하게 되기에 약간의 정신 무장까지 필요했다. 월요일에 있는 단 한차례의 요리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 주중 몇 번의 장을 봐야 했으며 일요일 오후부터 이미 그다음 날의 수업 준비로 바빠지기 시작했다. 나름 완벽주의자로 남에게 뭔가 지적받을 만한 게 있거나 내 성에 차지 않는 일이 있음 며칠을 두고두고 계속 그 생각에 빠져있다. 사전에 그런 일을 막기 위해 철저한 준비는 필수이다. 부산한 마음은 월요일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오후 4시까지 쭉 이어진다. 화요일에는 원어민 영어회화 수업을 들으러 가야 했으며 금요일엔 펜 드로잉 수업이 있었다. 그림의 경우 꼭 그럴 필요까진 없었지만 가능한 1주일에 한 작품씩 완성해야 했다. 쓸데없이 꼼꼼한 탓에 침침하고 비문증이 있는 눈을 어떻게든 달래 가며 남보다 많은 시간 동안 붓을 들고 있었다. 주중 하루 비교적 여유 있는 날엔 당구장을 찾아 좀체 늘지 않는 실력을 연마해야 했고 1주일에 한번 남편과 가는 소풍도 빼먹지 않으려 했다. 고등학교에 막 입학해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해 있던 예민한 딸아이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이것저것 신경 쓸 일도 많았다. 게다가 브런치에 글도 나름 열심히 써야 했으므로 지금 생각해보니 꽤 숨이 가빴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숨 넘어가지 않고 모든 걸 골고루 부지런히 해 낸 나 자신이 대견하다 느껴진다.


 


5월이 되고서도 그 부산함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원래 직장 다니는 사람보다 집에서 노는 사람이 더 바쁜 법이다. 나름 이 생활에 만족하고 재미있게 산다고 생각한다. 귀찮다며 움직이지 않고 집에 가만있는 건 지루하고 따분한 삶일 뿐이며 내 적성에 맞지도 않다. 게다가 직접 나서서 뭘 하는 건 귀찮고 누가 대신 나서 주길 바라는 그런 얌체의 기질은 더더욱 싫어하다 보니 항상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런들. 적성에 맞지 않거나 후회할만한 일을 멋모르고 덤볐더라도 아니다 싶을 때 그냥 돌아 나오면 되는데. 그래도 분명 내 삶에 남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 믿는다. 이제껏 아이들 때문에 메여 살다 큰애 대학 보내고 겨우 얻은 이 자유의 시간을 맘껏 즐기고 싶다. 하긴 이 달콤한 자유의 시간도 시한부이긴 하다. 내년엔 큰애 임용고시에 그다음 해는 작은애 수능까지 묵직한 부담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올해는 내게 주어진 안식년 같은 해다. 이것저것 생각 않고 그냥 열심히 나를 위해 달리고 싶다.






바쁘게 지내다 보면 몸이 좀 고달프긴 하나 심적으로 오히려 편안해질 때가 있다. 머릿속 복잡해지는 일이 있을  이것저것 생각 않고 바쁜 일에 몰입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비워진 듯한 개운한 느낌을 받은 적이 누구나 한 번씩 있을게다. 요즘은 또 다른 장점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에둘려 말하는데 서툰 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은 일을 누군가로부터 제안받았을 때 좀 버겁다. 상대방 기분 안 상하게 적당한 핑곗거리를 찾아 거절해야 하는데 없는 얘기를 지어내 이유로 내세우는 게 쉽지 않다. 눈치껏 알아서 행동해주면 참 좋으련만 달갑지 않다는 내색을 은근히 내비치어도 그 작은 뉘앙스를 잘 잡아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고 상대방을 배려해서 고분고분 받아들이는 성격 또한 아니다. 결국 서로 좋지 못한 인상을 남길 때가 간혹 있다.




하지만 요즘은 '제가 좀 바빠서...'라며 떳떳하게 거절할 수 있다. 우선 빈말이 아니니깐. 그러니 양심에 아무런 가책 없이 자연스럽게 내 입에서 흘러나온다. 상대방도 그럴 줄 알았는데 그냥 한번 얘기 꺼내봤다는 식으로 말해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뒤끝까지 좋으려면 정말 남들 눈에 바빠 보여야 한다. 별로 바빠 보이지도 않으면서 그런 식으로 얘기하면 괜히 속만 빤히 들여다보이는 꼴이 된다. 나 역시 내 제안에 그런 식으로 말하는 많은 이들을 보지 않았나. 진짜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러지 않으면서 그냥 핑곗거리로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하지만 정작 나는 바쁘다는 핑계를 잘 대지 못했다. 왠지 비겁하게 느껴졌다. 




직장인이나 학생들처럼 어딘가에 메여 있는 삶이 아닌 탓에 내가 정한 일의 순서들은 대체로 유동적이다. 꼭 해야 할 일들도 있지만 굳이 지금 안 해도 되는 것들이 더 많다. 그림도 바쁘면 2주일에 하나 완성하면 되고 당구장이나 다른 수업도 한번 빼먹으면 된다. 가족들 식사도 한 번씩 각자 알아서 먹어라 할 수 있고 집안일도  미루면 된다. 무언가를 거절한다는 건 바쁘다기보다는 솔직히 마음이 내키지 않거나 다른 것들에 비해 순위가 밀리기 때문이다. 나뿐 아니라 남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내가 요즘 좀 바빠서'라는 말을 듣는 순간 대부분 거절의 표현으로 알아듣는다. 본인이 좋으면 열일을 제쳐서라도 어떻게든 하게 된다. 그래서 바쁘다는 이유보단 마음이 안 가서 아님 우선순위의 것들이 있어서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바쁜 OO가 그럴 시간이 있겠어요" 얼마 전 내 시간을 생각해주는 듯 말로 거절을 표시하는 이가 있었다. 보통 본인이 바빠서 안 되겠다고 얘기하는데 역으로 치고 나오니 듣는 순간 오히려 기분이 약간 이상해졌다. 이제껏 또 이런 방법이 있는지도 몰랐지만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닌 게 확실하다. 사실 살아가면서 내가 거절할 수도 아님 거절당할 수도 있는 많은 일에 일일이 이유를 대고 듣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더군다나 그렇게 정성을 쏟을 필요가 없는 사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테다. 그냥 깔끔하게 '내가 요즘 좀 바빠서'라고 얘기 하자. 왜  바쁜지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다 안다. 바쁘다는 말이 무얼 뜻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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