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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Jun 12. 2022

커피와 함께하는 인연



"커피 직접 내려 마시죠?"

어떻게 알았지. 커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 본 적도 아니 서로에 관해 별로 아는 것도 없는 사이인데. 몇 마디 대화도 나눠보지 않고 나에게서 커피의 흔적을 찾아내다니 분명 예리한 사람임이 확실하다.

"내가 생두를 직접 로스팅해서 먹거든요. 다음에 만날 때 내가 한 거 좀 들고 올 테니 맛 한번 봐요"

순간 마당 한켠에 자리를 잡고 수망에 생두를 넣어 가스 불위에서 흔들어 볶는 그런 여유로운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녀가 아파트에 산다는 건 이미 알고 있기에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로스팅을 하는지 호기심이 생긴다. 부엌 가스 불 위에 팬을 얹어서 로스팅하냐고 물어보니 웃으면서 집에 작은 가정용 로스터기가 있다고 한다. 그녀 말에 의하면 타이머를 맞추어 놓은 후 신경 끄고 있다가 팝이 시작되면 그때부터 지켜보면 된다고 했다. 그래도 생두 선택부터 냉각 그리고 흩날리는 실버스킨 뒷정리까지 얼마나 품을 많이 팔아야 하는데. 게다가 어느 정도의 섬세함과 도전의식도 필요하다. 아마 숱하게 많은 원두를 실패하고 나서야 지금의 로스팅 수준에 도달했을 게다. 나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이거 집에서 내려 먹어봐요"

다음번 만남에서 약간의 상기된 표정으로 그녀가 내게 무언가를 내민다. 정말 직접 로스팅한 원두를 가져왔다. 보아하니 바로 전날 로스팅한 것 같다. 순간 내가 이걸 받아도 될지 약간 망설여진다. 얼마큼 친해져야 서로에게 작은 선물을 부담 없이 주고받을 수 있을지에 관하여 아직까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아직은 살짝 이르지 않냐는 생각에 솔직히 마음 한편이 부담스러워진다. 동시에 나는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걱정도 되고. 게다가 원두는 각자 취향이란 게 있는데 이래 봐도 나는 좀 깐깐하다. 입에 맞지 않음 안 먹는다. 내가 차 종류를 좋아하는 걸 아는 지인들은 집에 선물로 들어온 처치 곤란의 것들을 나에게 건네준다. 혹은 선물로 일부러 사서 주기도 한다. 그러나 깐깐한 내 입맛을 통과 한 건 많지 않다. 나 역시 다시 넘겨줄 누군가를 찾다 실패하면 오랜 시간 공간을 차지하게 내버려 둔다. 그 후 유통기간이 지났음이 확인되면 미련 없이 그대로 쓰레기통에 넣어버린다.




나의 원픽은 케냐 AA이다. 오랜 시간을 들여 이것저것 마셔보고 내린 결정이다. 다른 것에 비해 가격이 좀 나가긴 하지만 나를 위한 다른 사치는 전혀 안 하는 탓에 당당하게 사 먹는다. 그래 봤자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 몇 잔의 가격으로 3주 정도 하루 석 잔의 커피를 즐길 수 있다. 어떤 원두를 사용하냐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예가체프를 한동안 마시다 케냐 AA로 갈아탔다고 했다. 내 말에 케냐 AA는 비싸다고 응수하더니 곧이어 유쾌한 표현을 덧붙인다.

"케냐 AA는 발로 볶아도 맛있어요"

깐깐한 내 입을 만족시키는 섬세한 원두라 로스팅에도 별도의 주의가 필요할 줄 알았는데 어떻게 로스팅해도 맛있는 원두라니. 살짝 실망스럽다.






누군가를 생각해서 품을 들여 무언가를 준비했는데 정작 받는 사람이 부담스러워하거나 그리 달가워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냥 돈만 들인 게 아니라 시간과 정성 그리고 마음이 더 들어간 거라 그런 낌새가 느껴지면 김이 새기 마련이다. 그래서 약간의 호들갑으로 감사를 표현했다. 게다가 마침 집에 원두가 똑 떨어져 집에 가는 길에 사려던 참이라 한편으로 반갑기도 했다. 집에 오자마자 그녀에게서 받은 원두를 꺼내 보았다. 좀 전엔 경황이 없어 몰랐는데 지금 보니 봉지 위에 캘리그래피로 이쁜 글씨가 쓰여 있다. 원래 인쇄되어 있던 건지 선물 포장을 위해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직접 쓴 건지 헷갈릴 만큼 멋지다. 뚫어지게 쳐다보니 아무래도 직접 쓴 것 같다. 순간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나 역시 정성이 들어간 잘잘한 선물을 주위에 나눠주길 좋아하고 포장에도 최대한 신경 쓴다. 그렇다고 따로 돈을 들여 박스와 포장지, 리본 등을 사는 게 아니라 그냥 집에 있는 것들을 활용한다. 거기다 숲에서 꺾어온 꽃이나 열매 아님 직접 그린 작은 그림 등을 더한 후 혼자 흐뭇해하며 포장에 정성을 들인다. 그러나 간혹 내용물만 확인하고 포장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다. 만약 품 대신 돈이 많이 들어간 포장이었음 분명 시선을 끌었겠지만 소박한 거다 보니 그대로 무시당할 때가 있다.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대체로 그런 사람들은 섬세함과 감수성이 다소 부족한 탓에 눈앞에 두고도 보지 못할 뿐이다. 일러주면 그제야 알아본다. 그래서 그들을 대하는 전략을 바꾸었다. 받을 사람에 따라 포장에 쏟는 수고를 달리 한다. 괜히 내 정성을 알아주네 마네 할게 아니라 상대방이 관심 가지고 볼 수 있는 부분까지만 신경 쓴다. 강아지에겐 사료가 중요하지 사료를 담은 그릇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원두의 향을 맡아보니 뭐가 뭔지는 잘 몰라도 구수하다. 단일 종은 아니고 몇 개가 브랜딩 되어있다. 물을 끓이고 원두를 분쇄하여 천천히 나만의 핸드 드립으로 커피를 추출하기 시작한다. 확실히 신선한 원두다 보니 커피빵도 많이 부풀어 오른다. 약간의 설렘임으로 한 모금 마셔보니 내입엔 케냐 AA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맛있다. 일단 합격이다. 맛도 맛이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정성에 후한 가산점이 더해졌다. 고마우면 고맙다고 표현을 해야 한다. 당장 금방 내린 커피 사진을 첨부하여 맛있다는 글을 그녀에게 보냈다.









그녀와 나는 지역구에서 진행했던 당구 수업에서 만났다. 수업이 진행될 동안에는 서로 말을 건넨 적이 거의 없었지만 종강된 후 몇 번 당구장에서 만났다. 규칙적으로 당구장에 가는 것도 아니고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가는 거라 몇 번 만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이렇게 정성이 많이 들어간 선물을 나눠주다니 그저 감사할 뿐이다. 살짝 그녀도 나와 비슷한 부류가 아닌 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호기심 많고 뭐든 직접 부딪혀 보는 걸 좋아하고 내가 좋아하는 걸 다른 사람도 느끼게 해주고 싶어 하고.




그냥 가만 받고만 있을 순 없다. 나 역시 선물을 해야겠는데 그렇다고 받은 즉시 무언가를 사서 바로 되갚는듯한 느낌을 줘서는 안 된다. 마침 거제도에서 캐 온 모시조개가 있다. 뜨거운 땡볕 아래 남편과 허리 아픈 걸 참아가며 쪼그려 앉아 캔 것이기에 어느 정도 수고로움이 들어가 있다. 하지만 한 움큼의 모시조개를 건네주던 날, 그녀는 또다시 로스팅한 원두와 나눠 받았다는 양파, 게다가 한꺼번에 주문해서 집에 많다는 스테이크용 안심까지 들고 왔다. 조개를 건네는 내 손이 초라해져 온다. 이렇게 자꾸 얻어먹을 순 없어 또다시 선물 거리를 생각해본다. 그래서 직접 담은 자몽청을 선물했고 그날도 역시 그녀는 원두를 두 봉지나 들고 왔다. 다음 달 그녀와 나는 같이 캘리 그래피 수업을 듣기로 했다.






한동안 내가 만들어 버린 어긋난 관계 때문에 생각이 많았다. 그리 자책은 하고 싶지 않다. 나도 노력은 했고 시간도 가져보았지만 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결국 혼자 조용히 마음의 정리를 하기로 했다. 아마 그 만남도 처음 시작은 지금의 그녀와 나 같은 관계에서 시작했겠지. 나를 떠나간, 내가 떠나보낸 수많은 인연들에 연연하지 않으려 한다. 인생이란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또 다른 새로운 인연이 이어진다. 그저 지금 내 곁에 머물러 있는 이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다. 그게 어쩌면 현명한 방법일 거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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