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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Sep 08. 2022

지금 나는 오후 몇 시쯤의 햇살일까

 

"손재주가 참 좋아요"

어느 정도 나에 대한 파악이 끝난 사람들은 한결같은 소리를 한다.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일단 뭘 시작하면 그런대로 괜찮은 결과물이 나왔다. 자신 없는 것은 시작 자체를 잘 안 하니 어찌 보면 당연한 소리인지도. 게다가 작정하고 시작한 건 남보다 더 열심히 하려는 편이다. 타고난 재주 때문인지 남 모를 노력 때문인지 아님 꼼꼼한 성격 탓인지 어쨌든 두 손으로 무언가를 해 내는 건 은근 자신 있었다. 나 스스로도 내가 뭘 만들기로 일단 마음을 먹으면 괜찮은 놈이 또 하나 탄생하겠구나 하는 기대가 앞섰다. 완벽한 금손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14k 정도의 금손이라고는 자부할 수 있다. 아니... 있었다. 노안이 이렇게 심해지기 전까지 그리고 손 끝의 수분이 지금처럼 바짝 말라붙지 않았을 때까지 말이다.




아이의 문제집을 채점하고 있을 때였다. 그 곁을 지나가던 아이가 갑자기 짜증 난 소리로 내게 외친다.

"엄마, 제발 책에 침 좀 발라서 넘기지 마"

그러고 보니 무의식적으로 책장을 넘길 때마다 손끝에 침을 바르고 있었다. 안 봤으면 모를까 아이 입장에선 책 한 귀퉁이에 남아 있는 얼룩이 무척 찝찝했을 테다. 그 말을 들은 이후로 부쩍 신경을 써서 침을 바르지 않고 책장을 넘기려 하지만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인지 미처 몰랐다. 한 장씩 오직 단 한 장씩 내 손끝에 잡기 위해 언제나 몇 번의 수고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가끔씩 나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린 채 검지를 혀 가까이 가져가려다 허둥지둥 다시 내려놓기도 한다.




그뿐이 아니다. 손끝을 이용해야 하는 그런 섬세한 작업들은 예전에 비해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렇다고 뭐 아주 대단한 것들도 아니다. 예를 들면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처럼 무언가 아주 작고 가는 걸 집을 때가 대표적이다.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 숨 넘어가기 직전이 됐을 때쯤 겨우 내 손에 잡혀진다. 바늘에 실을 꿰는 일이 힘들어진 것도 단순히 노안 때문만은 아니다. 돋보기를 쓰고 가까스로 바늘귀를 통과한 그 짤막한 실을 손끝으로 잡아당기는 일 또한 쉽지 않아 졌다. 낚시 바늘이 보이지 않게 미끼로 바늘을 감싸 꿰는 것도 예전만큼 매끈하못하다. 물고기들 눈엔 미끼가 예쁘게 꿰어졌는지 어쩐지 전혀 보이지도 관심사도 아니겠지만 나 스스로 뭔가 만족이 되지 않는다. 손끝이 자꾸 헛도는 느낌이 든다. 더 이상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손가락들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혹시 손끝의 지문이 다 닳아졌나 해서. 그러나 검지의 지문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내 눈에 그 작은 포물선들이 보일 리 만무하다. 돋보기를 낀 채 목을 뒤로 최대한 빼어서 봐도 몇몇 희미한 선들만 겨우 보일 뿐이다.




평범한 일상에서나 매번 보던 사람들과 함께 일 때는 그걸 잘 깨닫지 못한다. 감각이나 아무런 지각의 필요 없이 그냥 몸에 박힌 습관처럼 무의식적으로 움직여지는 것들이 많다. 지인들도 같이 나이 들어가는 처지라 그저 서로의 예전 같지 않은 모습에 크게 공감하며 위로할 뿐이다. 그러다 낯선 환경에서 게다가 나보다 훨씬 어린 사람들과 함께 일 때 무언가 이상해졌음을 깨닫게 된다.






얼마 전 가죽 공예 수업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다소 부담스런 재료비 때문에 한 번도 배울 생각을 못 했지만 지자체에서 100%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운 좋게도 치열한 경쟁을 뚫고 수강 신청에 성공하였다. 드디어 수업의 첫날, 대충 훑어보니 10명의 참가자들 중 60대 후반의 할머니가 한분 계시고 나머지는 모두 나보다 한참 어린 사람들이다. 그래도 뭐 기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정도 수업은 저 젊은이들만큼은 아니 어쩌면 더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혼자만의 야무진 착각에서 깨어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단체 수업이다 보니 기계를 사용해야 하는 부분은 항상 선생님이 미리 다 해 놓았다. 참가자들은 그저 가죽에 약품을 발라 광을 내는 작업과 바느질만 하면 되었다. 가죽공예를 배운다기보다는 어찌 보면 일종의 체험 학습 정도였다. 별 그리 어렵지 않은 수업이었지만 대부분 가죽공예가 처음이다 보니 바느질과 실매듭짓는 방법이 좀 낯설 뿐이었다. 그런데 나에겐 뜻하지 않은 복병이 몇 가지 있었다.





실을 길게 잘라 그 양끝을 2개의 바늘에 각각 꿴 후 매듭을 짓는 것이 일반 천 바느질과 차이가 났다. 초보자들은 바느질 실수가 많은 편이라며 선생님이 쉽게 풀어지는 매듭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면 굳이 실을 끊지 않고도 잘못된 부분까지 실을 풀어서 수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잘 풀리는 매듭이란 게 의도적일 때만 풀어지는 게 아니라 하다 보면 가끔씩 저절로 잘 풀렸다. 게다가 매듭을 짓는 방법도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가늘게 꼬여 있는 실 틈에 바늘을 세 번을 돌려 통과해야 한다. 사실 요즘 노안이 부쩍 심해져 기존에 쓰던 돋보기의 도수를 바꿔야 하는데 그냥 사용하고 있는 터였다. 물론 안 쓰는 것보단 훨씬 잘 보이긴 하지만 실을 바늘에 꿰는 것은 물론이요 그 가느다란 실 틈에 한 번도 아닌 세 번이나 바늘을 통과시켜 매듭을 짓는 건 나에겐 좀 버거운 과정이었다. 수업 시간의 반을 실을 꿰고 매듭짓는데 다 소모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다 쓰다 보니 다급해진 마음에 바느질도 이쁘게 되지 않는다. 나름 꼼꼼하며 완벽주의인 나 자신이 맞나 싶을 정도로 수시로 시계를 봐가며 그저 남들 따라가기 급급하다.




분명 더 잘할 수 있다. 하지만 두 눈과 손끝이 더 이상 내게 우호적이지 않다. 어딜 가나 중간 이상이었던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측은함이 느껴진다. 처음 겪는 이 상황이 부끄럽기도 하고 자신감도 뚝 떨어진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아 매듭짓는 게 너무 힘들다며 선생님께 핑계 같은 하소연을 하자 기껏 30대 초반밖에 안 되어 보이는 선생님 왈.

"저도 안 보여요. 그걸 굳이 보려고 하지 마시고 그냥 손끝의 감으로 하세요"

손끝의 감이라니... 남아 있는 수분이라고는 거의 없는 맨들맨들한 손끝에 뭘 얹어도 자꾸 미끄러지기만 하는데. 하긴, 나도 저 나이 때는 감히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남들이 안 볼 때 몰래 내 타액의 힘이라도 빌려 보고 싶지만 마스크를 내릴 수도 없으니 그 지저분한 일은 시도조차 할 수 없다.




수업이 있는 화요일 오전만 되면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늘은 가서 또 얼마나 버벅거리게 될지 걱정이 앞섰다. 정말 중간에 관두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나 간절해졌다. 자신감이 사라지니 점점 더 소심해지고 사람들과 말도 잘 섞지 않게 다.

'조금만 더 참고 해 보자. 어차피 여기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날 신경 안 쓸뿐더러 마스크 때문에 내가 누군지도 잘 몰라. 여기서 그만두면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다. 조금만 힘들어져도 다 포기하게 돼. 끝까지 완주해 보자'

그렇게 나 스스로를 독려해가며 8번의 수업을 무사히 마쳤다.



언제나 나의 눈이 되어주는 돋보기와 마지막 완성품인 가방



매시간마다 긴장된 마음으로 수업을 시작했지만 후반기에 접어들면서는 제법 익숙해져 시간에는 더 이상 쫓기진 않게 되었다. 무엇보다 드디어 풀리지 않는 매듭법을 선생님이 가르쳐주어서 매듭이 풀리는 일도 다시 바늘에 꿰야하는 수고로움도 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바느질에 더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완성된 가방을 들고 나서는 순간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별거 아니지만 꾹 참고 잘 버텨준 나 자신이 대견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쉽긴 하지만 누구나 지금의 내 나이를 거쳐간다. 늙었다고도 그렇다고 젊다고도 할 수 없는 50대에 막 접어든 요즘 점점 인생의 후반기를 향해 가고 있음이 문득문득 느껴진다. 40대일 땐 하루빨리 50대가 되길 바랬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이 그저 의무와 책임만으로 가득했던 내 삶이 너무 힘들어 거기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속박의 무게를 내려놓게 된 지금 예상치 않은 공허함이 내 속에 새로이 자리 잡고 있다. 재밌고 즐겁게 살아가고 싶은데 문득문득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쉽게 피로해지는 체력, 무겁고 저린 두 다리, 돋보기 없인 아예 무언가를 읽기 힘들어진 눈, 둔탁해져 가는 손끝의 감각, 매번 깜빡하는 기억들... 이 모든 것을 당연시 받아들여야 하는데 내 속엔 아직 그걸 부정하는 내가 있다.




햇살로 치면 지금의 나는 하루 중 과연 몇 시쯤의 햇살 일지 가만히 생각해본다. 오후 3시? 아님 4, 5시? 물론 활기찬 아침 햇살을 가장 좋아하긴 하지만 가끔 여유로운 늦은 오후의 햇살이 사랑스러울 때도 있다. 나 자신을 너무 측은하게 여기지도 자신감 없어하지도 않았음 한다. 때때로 나이 때문에 생각도 못한 좌절감을 느낄 때도 생기겠지만 꿋꿋이 내 잘난 맛에 살고 싶다. 늦은 오후 노천카페에 앉아 즐기는 커피 한 잔 같은 지금, 그저 욕심 없이 감사할 수 있는 여유를 갖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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