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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인생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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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korwriter Aug 22. 2024

잡초

시가 있는 에세이 (13)

잡 雜  초  草



  짓밟아라

  파헤쳐라

  베어보아라


  나는 장미처럼 화려한

  꽃 피울 능력 없으나

  나는 포도처럼 탐스러운 

  열매 맺을 능력 없으나


  이 슬픔의 도심都心

  삭막하고 차가운 비정非情의 시간時間 속에

  척박하고 험난한 고통苦痛의 공간空間 속에

  고작 내게 주어진  

  손톱 끝 틈새

  악착같이 부여잡고


  보란 듯이 내 삶

  이어 나갈 능력 하나

  천성天性으로 지니었다.



 내가 TV 드라마 ‘대장금’을 뒤늦게 보게 된 것은 순전히 중국 사람들 때문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한국 사람이라면 당연히 대장금을 보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묻는데 보지 않았으니 할 말이 없었다. 특히 콘도에서 같은 층에 사는 중국 할머니 한 분은 나만 보면 말을 건네는데 ‘따이장끔(대장금의 중국식 발음)’ 한 마디 밖에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드라마에서 궁녀들이 만드는 궁중음식의 이름을 물으신다는 것을 영어를 하는 딸이 통역해 주어서야 알게 되었다. 나도 차츰 내용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마침 한국 비디오가게에 54편 전편의 비디오가 나와 있었다. 


 처음에는 한두 개로 시작했으나 드라마의 중독성에 빠져 연휴가 끼면 대 여섯 개의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줄줄이 보게 되었다. 예전에 차범석 극작가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한 시간 짜리 한 편의 드라마에 대 여섯 개의 갈등요소가 없으면 드라마가 아니라고 했다. ‘대장금’ 드라마는 그것을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대장금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중종실록에 불과 몇 줄 나온다. 중종 19년에 ‘의녀 대장금의 의술이 무리 중에 조금 나으니 대궐에 출입하여 간병인으로 일하게 하라’, 중종 28년에 ‘임금이 여러달 병을 앓다가 회복되었는데 그 공을 치하해서 의녀 대장금에게 쌀과 콩을 각각 15석씩, 관목면(官木綿)과 정포(正布)를 각기 10필씩 내리고--’, 39년 1월에 ‘감기와 해수증이 재발했는데 약 제조를 의녀 대장금에게 의논하라’, 동년 2월에 회복의 공을 치하하며 ‘의녀 대장금에게 쌀과 콩을 도합 5석 하사하라’ 라는 내용이 전부이다. 그것을 가지고 이렇게 사랑과 우정, 음모와 갈등이 얽히고설킨 재미난 대하드라마를 만든 시나리오 작가와 PD가 존경스럽다. 


 드라마에서 여러 가지 대사가 나오는데 그 중에서 어머니의 원수이며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위해 끊임없이 대장금을 괴롭히는 최상궁(견미리 역할)의 한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끈질긴 것. 짓밟아도 베어도 어느새 일어서는 잡초 같은 것”


 잡초. 국어사전에 보면 ‘저절로 나서 자라는 여러 가지 풀’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사람의 손으로 씨앗 또는 묘목을 심고 정성으로 가꾸어야 자라는 것이 아니다. 원래는 산과 들에 자생하던 풀이었겠으나 바람에 실려 천지 사방으로 번지게 된 식물이다. 꽃피고 열매 맺는 것도 있으나 대개 꽃은 작고 보잘 것 없으며 열매는 사람이 먹지 못하는 것이 많다. 반기지도 않는데 사람 사는 곳으로 들어와 화단에서, 정원에서, 논밭에서 그저 대책 없이 피어난다. 뿐만 아니라 도시의 건물, 즉 아파트의 갈라진 벽 틈이나 옥상 위, 보도 블럭 틈새를 보면 억척같이 솟아오르는 가녀린 그것들을 볼 수 있다. 밴쿠버에서 정원사 일을 하는 분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잔디밭의 잡초는 아무리 잡초제거기로 베어 내고 뿌리째 파헤치고 제초제를 뿌리고 해도 그 이듬해는 또 돋아난다고 한다. 


 이민자를 잡초에 비유할 수 있겠다. 저마다 원산지(조국)로부터 낯선 곳으로 날아 왔다. 먼저 온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차별은 얼마나 심하던가. 기후가 다르고 풍습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이민지에서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꿋꿋이 남의 땅에 자리 잡은 선배 이민자들을 보노라면 그들의 잡초처럼 강인한 생명력에 절로 고개가 수그려진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인 커뮤니티가 성장하고 발전해 나가지 않았는가 싶다. 이제 이민 3년차(2006년도)가 되어 간다고 1년여 미만의 이민후배들이 ‘취직도 안 되고 장사도 신통찮고 돈은 자꾸 까먹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물어오면 30~40여 년 전의 이민선배들이 거의 맨손으로 와서 온갖 굳은 일을 하며 이루어낸 결실을 이야기 하며 함께 위로를 받는다.


 한국인은 조상으로부터 ‘은근과 끈기’를 물려받지 않았는가. 지금 조금 힘들다고 좌절하지 말고 양희은의 어떤 노랫말처럼 ‘비바람 불고 눈보라 쳐도 떨치고 나아가’승리하여야 한다. 여기서는 잡초로 분류되는 노란 민들레가 잔디밭 한 귀퉁이를 점령하고 있는 것을 보는 오늘. 그들의 미소가 유난히도 화사하다. 


<되돌아 보니>

 2003년 7월에 밴쿠버로 거주지를 옮겼다. 어언 11년. 늙은 나이에 왔지만 소위 이민선배들이 말하는 ‘신고식’을 다 치렀다. 장사 한답시고 수만불($)   날려 먹고, 무료라고 해서 언덕배기에 차를 주차했다가 굴러가서 전봇대 들이박는 바람에 수천불 날려 먹고, 영어를 잘 몰라서 백인들에게 이래저래 사기당해 수천불 날려 먹고---


 그래도 나는 이만하면 양호하단다. 어쨌든 연금 받는 나이 되도록 굶지 않고 살아왔고, 은퇴 후는 평생교육원 비슷한 비영리단체를 운영하면서 심심치 않게 노후를 보내고―-- 무엇 더 바랄 것인가.


 인생은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작은 결실도 값어치를 느낀다. 나는 그래서 흙  수저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출세하는 이야기가 좋다. 요즘 한국드라마 잘 보지 않는 이유가 흙 수저 남녀가 금 수저 남녀를 낚아채려고 각고의 노력(?)을 하는 꼴이 보기 싫어서이다. 사랑에 빈부격차가 없다고? 어쩌나. 현실에는 있다. 보통사람들의 대리만족을 위해 천편일률적으로 그런 드라마를 만드는 방송사들의 장사속이 얄밉다.


 금 수저들. 가만히 있어도 만사형통이면 무슨 재미가 있나. 등산도 한 걸음 한 걸음 땀 흘리며 정상에 도달해야 맛이 있지, 케이블카 타고 휙 오른다고 보람이 느껴질까? 땀 흘리며 산길 오를 때 좌우로 보이는 꽃과 수목, 그리고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의 아름다움을 진정으로 음미할 수 있다. 


 늙어도 항상 나는 잡초처럼 살려고 노력한다. 아무도 돌보지 않지만 혼자 스스로 성장하여 마침내 지나는 길손에게 작은 위안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리고 홀씨 뿌려 세상을 덮을 수 있다면 대장부 한 평생 이 아니 당당할까. (2024년 8월 19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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