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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인생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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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korwriter Aug 20. 2024

삼풍 신드롬

시가 있는 에세이 (12)

삼풍신드롬


외이셔츠를 옷걸이에 걸지 않고

방구석 아무데나 던져 놓으면 

구겨진다고 아내는

종알종알


여름 속옷은 매일 갈아입고

머리는 이틀에 한 번 샴푸하고

술안주 찌게국물 바지에 흘리지 말고

술자리 늦어도 밤 열두시 넘기지 말고

종알종알종알종알

아내는 마치 직업인양 

부지런히 종알거린다


에잇, 귀찮아 그러다가

삼풍백화점 무너질 때 묻힌

고만한 이 땅의 살림 사는 보통여성들의 

주검들을 보고나서

갑자기 아내의 종알거림이 눈물겹도록

그립고 소중해졌다


아아. 아내여 당신에게

변변히 해 준 것은 없지만

나 세상 하직하는 날까지 아무 탈 없이

곁에서 종알거려 준다면

정말 

고맙겠소   


 6월 28일은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지 11년째 되는 날이다. 대참사로 우리의 뇌리에 남아있는 이 사건은 1995년 6월 28일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4동 1675-3번지의 삼풍백화점 건물 2개동 중 북측건물(지상5층, 지하4층)이 연쇄적으로 지하층까지 붕괴되어 사망 501명, 부상 937명, 실종 6명의 무고한 희생자가 기록된 사건이다. 사고 당시 헌신적인 구조노력을 기울인 소방관들과 관련당사자들의 노력으로 많은 생존자들을 구출해 내기도 하였다. 그 후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희생자 유가족들과 생존자들은 아직도 많은 후유증에 시달리며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그 해 나는 사고지점과 비교적 가까운 도곡동에 살았었다. 어렴풋이 굉음 소리를 듣고 어느 건설현장에서 발파작업을 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TV를 켜니 긴급 보도가 나오는데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사건현장에 몰려들고 있었다.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부부가 상대편을, 형제가 형제를, 친구가 친구를 찾는 모습에 내 일처럼 가슴이 답답했었다. 그중에서 개그맨 김학래 씨를 보는 순간 코끝이 찡했다. 만인에게 웃음을 안겨 주던 그의 모습은 간데 없고 거의 초죽음이 된 얼굴로 아내이자 동료 개그맨이던 임미숙 씨를 찾고 있었다.

 

 다행이 임미숙 씨는 사건발생 이전에 현장을 나간 것으로 알려져 김학래 씨의 얼굴이 다시 펴졌지만 주로 시장을 보러 왔던 많은 젊은 주부들이 희생되어 가슴이 아팠다. 그 뒤로 나는 아내가 밖에 나갔다가 조금만 늦어도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결혼 14년차였다. 아무리 잉꼬부부라도 시들해질 때이다. 더구나 그 당시 나는 직장일이 복잡해서 아내에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틀에 박힌 경상도 남자 아니랄까봐 퇴근하고 나누는 아내와의 대화는 고작 ‘아(아이)는?’, ‘밥묵자’, ‘자자’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거나 하루 종일 전화통 붙잡고 전화국 매상 올려주는 일은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아내는 그래도 여자인지라 내게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양념 저며 가며 재미있게 이야기해 주었건만 나는 그저 건성으로 응, 응 하다가 슬그머니 침대 속으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그러다 삼풍참사 이후 나는 달라졌다. 아내를 잃은 사람들의 남겨진 삶을 통해서 도대체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내가 아내 없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중학생인 아들을 어미 없이 자란 아이처럼 보이지 않게 잘 키울 수 있을까? 말린 빨래를 흐트러지지 않게 차곡차곡 장롱 서랍에 잘 개어 넣을 수 있을까?

 

 어물전에 가서 상한 생선과 싱싱한 생선을 구별하여 잘 살 수 있을까? 매년 양력 날자가 달라지는 어머니의 음력 생신과 아버지의 기일을 잘 기억할 수 있을까? 세상에 대한 절망으로 잠 못 이룰 때 애써 재미있는 이야기들 모았다가 베게머리에서 들려주며 편안한 꿈의 나라로 보내는 능력을 아내 아닌 누구에게서 찾을 수 있을까? 모든 것이 하나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내가 ‘있을 때’ 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잘 지켜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소망은 이다음에 나이 들어 하늘 부름 받으면 아내의 무릎베개 베고 잠들다 가는 것이다. 그런데 아내는 한 날 한시에 손 붙잡고 함께 가자는 것이다. 올 때도 따로 왔는데 어떻게 함께 갈 수 있다는 말인가. 조금 이기적이기는 하지만 늙어서 아내 없는 생활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고 들어 왔기에 내가 먼저 가야지 하는 생각도 있다. 그러나 더 이기적인 생각은, 아내의 애정 어린 잔소리가 없는 적막한 세상을 견뎌나갈 능력이 내겐 없기 때문이다. 삼풍 참사이후 11년이 지났건만 나는 여전히 아내가 볼일에서 늦으면 불안하고 초조해지는 증세를 가지고 있다.


<되돌아 보니>

금년(2024년) 11월이 아내와 나의 결혼 44년차가 된다. 참 오래 함께 했다. 강산이 네 번 바뀌었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아내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하다. 


아내가 서울서 온 친구 만나려 자리 비운 4시간여. 


처음 한 시간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마음껏 텔레비전에 유투브 즐기고, 인터넷 산책하고, 노래도 불렀다 하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는데 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슬슬 아내가 기다려졌다. 


라면을 끓여먹고 싶은 데 냄비가 어디 있는 지, 김치는 냉장고 어느 칸에 있고, 계란은 어디 두었는 지, 물은 얼마나 부어야 하고, 몇 분을 끓여야 식감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지 도대체 감을 잡지 못한다. 때로는 설익거나 때로는 부풀어 터진 라면을 먹으면서, 왜 아내가 끓여주는 라면 맛과 다른지 의아해 한다. 그래서 연신 아내에게 카톡 날린다. 계란 넣고 얼마 동안 물 끓여? 스프는 다 넣어도 될까? 언제 쯤 집에 와? 그러면 아내는 답한다. ‘알아서 하세용.’ 무슨 할머니가 이래. 


요즘 아내는 자기가 먼저 세상 하직할 거라고 한다. 어림없는 말씀. 누구 맘대로. 영어도 못하고, 은행일도 잘 모르고, 어쩌고 하면서 낯선 타국에서 나 떠나면 혼자 못 산다고? 그럼 나는? 아내가 있음에 사는 의미가 있는 것이지. 여자는 오래 살아도 혼자 밥해먹고, 손주들 돌보고, 청소도 하고, 살림에 도움이 되지만 남자는 버릴 수도 없는 애물단지가 되어 며느리, 자식 눈치만 보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좀 일찍 가려고 아내 몰래 혈당치 올라가니 먹지 말라는 초콜릿, 아이스크림 먹고, 가끔 아내 없을 때 포도주도 홀짝홀짝  마신다. 열심히 운동하면서 건강 지켜야 무엇하는가. 마누라 없으면. 그래서 요즘은 대충대충 산다. 마누라는 모를 것이다. 나 먼저 가려고 아내의 ‘건강수칙’을 슬쩍슬쩍 어기는 것을. (2024년 8월 17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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