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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korwriter Aug 23. 2024

엠블사이드 공원, 해변의 길손

주마간산 여행기 (2)

 엠블사이드(Ambleside Park) 해변 길을 걷는다. 복잡한 주말을 피하니 호젓하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의 경이로움은 사라졌지만 이젠 제법 눈에 익어서 편안하다. 여러 개의 시(市)로 형성된 메트로밴쿠버(광역 밴쿠버)에서 한국인들 사이에 강남으로 불리는 웨스트밴쿠버의 해변 공원. 태평양이 한국의 동해안에서부터 숨가쁘게 달려 오다가 드디어 나를 발견하고는 좋아라 고 물보라를 날리는 곳. 한 줌 향수를 붙잡으려고 나는 자주 이곳에 온다.


 공식적으로 공원 지정이 된 것은 1918년. 59에이커의 공원부지와 600m의 모래사장, 그리고 1.2km의 해변산책길을 가지고 있지만 이곳은 원래 원주민(First Nation)들의 땅이었다. 하기야 캐나다 전체가 예전에는 모두 원주민의 땅이었지 않은가. 이는 그들이 소유한 땅이라는 말이 아니다. 대지는 신의 선물이기 때문에 잘 사용하며 후대에 물려주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 그러나 유럽에서 개척민들이 들어 오면서 소유의 획이 무자비하게 그어졌고 원래 거주민들은 보호구역으로 밀려 나갔다. 

 지금도 엠블사이드 동쪽에는 보호구역이 있어 슬픈 그들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인가? 태평양을 향해 두 팔 벌려 이주민을 환영한다는 대형 목각 원주민여인상의 얼굴이 그리 밝지 않다. 태평양을 통해 오는 것은 피부색이 비슷한 아시아인일 터. 만여 년 전에는 한국인처럼 태어나는 아이 엉덩이에 몽고반점을 지닌 사람들이 조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부족은 멀리 시베리아를 지나 얼어붙은 바다를 건너 알래스카로 가고, 거기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흩어져 원주민이 되었고, 우리 조상들은 중국대륙을 호령하다가 만주로 흘러가고, 거기서 다시 한반도로 들어와 한국인이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그렇다면 밴쿠버도 먼먼 조상들의 땅. 하얀 피부에 큰 코를 가진 이주민들에게 주눅들 필요가 없다. 


 그러고 보니 이 16피트 (약 4.88m) 높이의 사이프러스 산(Cypress Mountain’;밴쿠버 서북쪽에 위치한 명산)  삼나무 목각상을 제작한 스쿼미시(Squamish) 원주민 조각가 세퀼리엄(Sequiliem)의 의도는 무작정 이주민의 환영과는 거리가 있다. “이 스쿼미시 원주민 조각상은 우리들의 전통을 면면히 지켜 내려오고 대지와 살아있는 동물, 그리고 우리 고향 해변을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존중해야 한다면서 우리들을 가르쳐 온 우리 어머니들의 어머니들을 표현하였다.”라고 밝힌 제작의도에는 이주민들에게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라고 훈계하는 듯한 어조가 깃들어 있다.


 목각상에서 서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엠블사이드 공원의 입구가 있다. 부근에 “Sna7m Smanit”라는 수수께끼 같은 이름의 조형물이 있는 데 영어로는 “Spirit of the Mountain(산의 정령)”으로 표기되어 있다. 공원이 소재한 웨스트밴쿠버 시가 2006년 연방정부로부터 “문화중심도시(Cultural Capital)”로 선정됨을 기념하기 위해 2007년 원주민  조형예술가  슈와렉턴(Xwa lack tun)이 만들었다. 

 이 조형물은 버라드 만(Burrad Inlet)을 가운데 두고 양립된 서북밴쿠버(West&North Vancouver)와 밴쿠버 다운타운을 연결하는 라이언게이트 다리(Lions Gate Bridge)의 형상을 반영했다고 한다. 스쿼미시 원주민의 상징인 “천둥 새(Thunderbird)”의 모습과 웨스트밴쿠버 지역민들과 스쿼미시 원주민들이 한 배를 타듯 앞으로도 잘 지내자는 뜻으로 대형 카누(canoe)의 모양을 조각해 두었다고 하는 데 내게는 아무래도 고물상 뒷마당에 있는 찌그러진 고철더미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를 하니 해변산책길에 동반한 아내는 “당신, 시인 맞아요?”한다. 아직도 나는 살바도르 달리나 피카소 보다는 루벤스나 렘브란트를 좋아하는 ‘사실주의 파’인가 보다.


 엠블사이드 공원을 지나면 서쪽으로 계속 센터니얼 해변길이라 이름 붙여진 그림 같은 산책로가 이어진다. 어디선가 케니지 (Kenny G)의 색소폰 선율에 흐르는 “해변의 길손(Stranger on the shore)”이 들리는 듯 하다. 내가 사는 버나비시에는 중국인들을 비롯한 아시안들이 많아 타국에 살면서도 외로움을 덜 느끼는데 백인들이 많이 사는 웨스트밴쿠버의 해변가에서는 도리 없이 이방인(stranger)이 된다. 그러나 아내의 작은 손을 맞잡고 함께 걸으면서 외로움을 덜어 낸다. 사랑하는 이가 있는 타향이 그가 없는 고향보다 훨씬 덜 외롭다는 것을 느껴온 세대이기 때문이리라. 

 공원 입구에서 해변 길 따라 한 블록쯤 가면 인공연못 안에 무너진 고대 건축물의 잔해처럼 입방체의 화강암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유명한 예술대학인 밴쿠버의 에밀리카(Emily Carr)에서 성인교육과정을 다닌 돈 바흔(Don Vaughn)의 조경건축물인데, 역시 그리스의 올림포스 신전 잔해에서 영감을 얻었단다. 세월은 물처럼 흘러 가지만 역사는 전설이 되어 우천 년을 기릴 것이라 생각하였는가? 지금은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놀이터인양 입방체의 바위들을 훌쩍훌쩍 뛰어다니면서 깔깔거리고 있다. 불현듯 어린 시절 고향 시냇가에 징검다리처럼 놓인 바위 사이를 친구들과 폴짝폴짝 뛰어 놀던 시절이 생각난다. 발을 잘못 디뎌 시냇물에 빠져도 그냥 즐거웠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지 생각하니 마음 흐뭇해 진다. 

 화강암 연못에서 서쪽으로 다시 한 블록을 걸으면 꽃 시계를 볼 수 있다. 이름하여 밀레니엄 꽃 시계(Millennium Floral Clock). 새천년(2000년)을 기념하기 위해 웨스트밴쿠버 시의 위탁을 받아 조경예술가인 피터 크렉(Peter Kreuk)이 2001년 1월에 조성하였다. 이 꽃 시계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이 있어 해마다 12월 31일 저녁 웨스트밴쿠버 주민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신년을 맞기 위한 카운트다운을 한단다. 조명시설이 되어 있어 밤에도 꽃 시계를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계절에 적합한 꽃을 심으므로 겨울이라도 신년맞이 행사에 지장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아내와 내가 꽃 시계를 찾았을 때는 시간이 멈추어 있었다. 대략 오후 1시 20분경에 시침과 분침이 정지되어 있었다. 한참을 지켜보면 분침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20여분을 주변에서 서성거렸는데도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아니 시간은 흘렀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을 인간에게 알려주기 위해 만들어진 시계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째깍 째깍 째깍/사랑하던 미워하던/괴로워하던 즐거워하던/행복하던 불행하던/그건 내 알 바 아니다./나는 그저/세월의 유영(遊泳)을 고지(告知)하면서/영원 불멸하리라 기대하는/그대의 삶이/대소쿠리에 물 새듯/그렇게 새어 나가고 있음을/경고할 따름이다.(시계, 필자의 시집”이방인 향단이” 중에서)


 생각해 보니 미웁고 괴롭고 힘들어서 잠 못 이루던 밤은 그 놈의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얼마나 더디고 싫었던가.  또한 사랑하고 행복하고 즐거워하던 시간들 속에서는 째깍거리는 소리가 얼마나 빠르고 얄미웠던가. 훈련병 시절의 10분간 휴식, 직장에서의 점심시간. 결혼 전 애인이었던 아내와의 데이트 시간, 마냥 어린 아들을 무등 태우고 산과 들을 누비던 시간------시간의 흐름이 얼마나 원망스러웠던가. 그러나 시계를 탓한들 무엇 하랴. 그저 삶의 유한함을 가리킬 뿐. 그래서 해변의 꽃 시계는 초침이 없어 한결 여유 있다. 어차피 사라지는 삶. 초를 다투지 말고 느긋하게 살라고 한다. 더구나 고장이 나서 멈추어버린 순간에는 아예 시간의 흐름을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저 즐겁게만 살라고 충고하는 듯하다. 


 드디어 해변산책길의 최종 목적지인 해변의 집(Beach House) 레스토랑 입구에 도착한다. 해변을 바라볼 수 있는 발코니가 있는 운치 있는 식당이지만 사람들이 많아 여간 해서는 발코니 차지가 쉽지 않다. 오래 살아도 아까운 생각이 드는 팁(tip)계산이 싫어, 맞은 편의 간이매점을 찾는다. 가격이 별반 차이는 없지만 셀프서비스이니 팁을 몇 퍼센트 주어야 하나 하는 걱정에서 자유롭다. 게다가 주변 벤치 아무데나 앉아 시장기를 채우며 경치도 감상할 수 있으니 일석 이조. 


 해운대나 경포대 해수욕장 같은 백사장은 없지만 그래도 해변가에는 제법 모래가 있어 백사장 흉내는 내고 있다. 가끔 금발의 미녀들이 수영복 차림으로 누워서 일광욕을 즐긴다. 힐끗힐끗 눈이 가는 것은 늙어도 숨길 수 없는 남자의 본능이다. 아내에게 미안하지만 무슨 해괴한 마음을 품기 때문은 아니다. 예순을 넘기니 여자는 더 이상 이성(異性)으로 보이지 않는다. 처음에는 참으로 이상했으나 이제는 별 부담 없이 받아들이는 것 중 하나는 남녀간 대화이다. 사업상, 또는 친교모임상 여성들과 통화할 때가 있는데 어떤 때는 한 시간을 넘긴다. 한국에서라면---물론 그때는 젊기도 했었지만—어림 반 푼어치도 없을 일이지만 타국에서는 자연스럽다. 그만큼 모국어로 대화할 상대가 적기 때문이리라. 이성이 차츰 친구처럼 되어 가는 것도 늙어감의 특혜일 것이다. 나는 그래도 아내가 남자들과 장시간 통화하는 것이 싫었는데, 처음보다는 많이 완화되었지만 지금도 싫다. 사업상 이야기를 하는 데도. 이건 남자의 독선일 것이다. 아니 본능인가?


 그래서 힐끗힐끗 금발의 미녀들을 감상하지만 그냥 전시관의 미술품 보듯 이다.  미녀들은 조물주가 잘 빚어낸 예술품인 듯 하다. 그러나 좀 덜 생긴 여성들이라도 슬퍼할 필요가 없다. 살다 보면 여성의 아름다움은 외모보다 내면에서 빛난다. 성질 나쁜 미인이 늙으면 추해 보이지만 성격 좋은 여인이 늙으면 우아하고 고상할 뿐 아니라 예뻐 보이기까지 한다. 내면의 평안이 외모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요기를 하고 나면 반드시 하는 일이 있다. 식당 앞에 놓여진 대리석 지구의를 돌려 한반도를 찾는 일이다. 이민자들이라면 거의 모두가 자신이 온 모국의 모습을 찾기 위해 이 지구의를 돌린다. “독일인들의 우정이 담긴 지구의(German Friendship Globe)” 라고 해석될 수 있는 이것은 웨스트밴쿠버 주민이자 광역밴쿠버 독일교민회 회장인 헤랄드 링케(Harald Linke)씨가 2003년 독일교민들의 성의를 모아 시에 기증한 것이다. 제작도 독일인 대리석공예가 쿠세르 아이차(Kusser Aicha) 씨가 담당했다. 

무게가 제법 나가 보이는 이 지구의는 바닥에 분수대가 있어 멀리서 보면 물위에 떠있는 듯하다. 설악산 흔들바위처럼 다른 곳으로 옮기려면 수십 명의 힘이 필요하겠지만 그 자리에서 돌리는 것은 세 살배기도 할 수 있다. 그만큼 움직임이 유연하고 부드럽다. 

 이 대리석 지구의에서 조차도 한국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기 어렵다. 이 작은 나라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일어선지 불과 60여 년 만에 세계 제 13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그리고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당당히 5위를 차지하였다. 좁은 모국에서 살 때는 서로 헐뜯고 시기하고 배 아파하던, 그래서 상처를 주거니 받거니 하였고, 그것이 싫어 훌쩍 떠나버렸지만 이민자 비율이 50%를 넘어서는 밴쿠버에서 지금 한국인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현대, 기아자동차가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이 제법 눈에 띄는가 하면, 고가전철차량 외부에 버젓이 농심라면 광고를 달고 다닌다. 한국인 가게가 아닌데도 웬만한 슈퍼에는 어렵지 않게 새우 깡, 양파 깡 같은 스낵을 비롯해서 김치, 김, 각종 라면 류 등을 볼 수 있다. 가전제품 판매점은 떠 어떤가? 제일 눈에 띄는 자리에 삼성, 엘지(LG)제품이 버티고 있다.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컴퓨터, 심지어는 복사기까지. 중국인들은 한국드라마를 더 재미있어하고 젊은이들은 K-Pop을 흥얼거린다. 이제는 단지 잘 먹고 잘사는 나라 사람들이라는 형이하학적인 수준에서 벗어나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한인 예술인들이 문화행사를 자주 벌인다. 내가 시작한 캐나다 작가들과 한인 교민작가들과의 문학교류행사인 “한마음문학 제”도 금년이 벌써 4회째. 차츰 타민족과 함께 즐기는 지역행사로 자리잡아가니 보람은 더욱 커진다. 그래서 대리석 지구의를 돌리는 내 손길이 한결 자신감에 넘친다. 


 지구의가 있는 곳을 반환점으로 하여 해변산책길에서의 방향을 돌린다. 다시 엠블사이드 공원 쪽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 인생도 반환점을 지났다.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목적지를 향할 때는 주변을 자세히 보지 않았지만 시장기도 채우고 한가롭게 돌아가는 해변 길은 풍광을 즐길 수 있어 여유롭다. 내 여생도 그러하기를 꿈꾼다. 


 바다가 보이는 잔디밭과 꽃이 있는 정원, 그리고 꽃 화분으로 장식된 전봇대. 산 사람의 눈으로 그릴 수 있는 천국의 정경이 아닐까 싶다. 맑은 공기, 아름다운 경치, 예의 바른 사람들, 여유 있는 가난함. 이런 것들이 이주 초반의 힘들었던 적응 기를 충분히 보상해 준다. 


엠블사이드에 갔었지/바다 바람 시원한 여름 해변/철부지 아이들이/나뭇가지에 매달린 색동망아지를 때리면서/사탕 비에 환호하고/햇살이 시샘하는 금발의 여인들이/인어같이 미끈한 몸매를 익히고 있었고/두고 온 산하가 그리운/이방인들은/대리석 지구를 기웃거리고/아직도 버리지 못한 숫한 희망들이 형형색색으로 해변을 채우며/태평양을 향해 넘실거리는데/꿈을 빼앗긴 네이티브 여인네는/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포구를 보며/밀려오는 타인들을/그저 무표정하게 맞이하게 있었지 (여름, 엠블사이드. 필자의 시집 “이방인 향단이” 중에서)


 밴쿠버로 이주하였을 때 이 땅은 내게 낯선 곳이었다. 마분지처럼 두꺼운 종이로 만든 망아지속에 사탕을 잔뜩 넣고 긴 장대로 터뜨리기를 하는 아이들의 놀이를 보면서 신기해 하면서도 함부로 사진을 찍지도 못하고, 지나가는 백인들이 ‘하이’하는 인사에 당황해서 ‘예!’라 대답하고, 작은 일에도 입에 달고 다니듯 하는 그들의 ‘생큐(thank you)’ 소리에 그 또한 ‘어, 예’ 하던 때가 있었다. 모든 게 익숙하지 않고 부자연스러워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이제는 내가 터줏대감이 되어가고 있다. 해변 길을 거닐며 만나는 백발의 노년 부부를 보면 먼저 ‘헬로’를 던지고, ‘생큐’에 얼른 ‘유어 웰컴(Your welcome)’ 또는 ‘노 프러블럼(No problem)’ 으로 자연스럽게 답한다. 


 해마다 엠블사이드 공원에서 비치하우스 앞까지의 해변 길을 걸으면서 나는 차츰 관광객들이나 신참 이주민인듯한 사람들에게 길안내도 해 주고, 쓰레기를 슬쩍 버리는 등 공중도덕을 위반하는 사람들에게 정중하게 훈계도 한다. 관광객들이야 이곳을 스쳐 지나 가지만 나는 평생을 여기서 살 것인데 천혜의 자연경관을 망치거나 오염시키는 것을 차마 두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느새 나는 스쿼미시 원주민 할머니 목각상처럼 자꾸만 밀려오는 타지 인들이 슬그머니 반갑지 않고 그들에게 대지와 자연과 질서를 존중하라고 타이르고 싶어진다. 요즘 경제성장으로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 중국 본토인들이 계속 밴쿠버로 몰려 와 졸부행세를 하는 것을 보면 80년대의 우리 자화상이 떠오른다. 세계의 공항에서 퍼 질러 앉아 화투 판을 벌이고 여객기 승무원에게 술 취해 행패부리던 졸부근성의 한국인들이 차츰 사라진다는 소식은 반갑다. 백인들이 일본인들을 좋아하는 것은 그들이 2차 대전 전범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그 친절하고 상냥함이 과거의 흔적을 지우고 나가기 때문이다. 그들 못지 않은 대접, 이제 우리도 받을 만하지 않는가?

 여름, 엠블사이드. 그래서 여기 올 때마다 5000년 역사의 문화민족임을 자랑하며 아시아의 수준 높은 나라의 민족임을 은연중에 나타내기 위해 노력해 본다. 경제성장과 스포츠강국을 자랑하면 겉으로는 ‘대단해요(Great)’하면서도 속으로는 질시를 하는 것이 인간의 인지상정. 그러나 월터 휘트만과 쉐익스피어, 루시모드 몽고메리(빨강머리 앤 저자)와 앨리스 먼로(캐나다 유명소설가)를 이야기하면 그들은 피부색깔을 따지지 않는다. 그때만큼은 내가 문학을 사랑하는 시인임이 스스로 고맙다. 또한 노을 지는 해변 길을 이제는 해운대나 경포대 해변 길 가듯 편안하게, 익숙하게 걸어가게 해 준 내 운명이 고맙다. 내 삶의 모든 추억을 두고 울며 조국을 떠나 캐나다에 왔지만 이제는 웃으며 내가 사는 곳의 이야기를 한국의 정다운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축복을 선물한 신이 그저 감사하고 고맙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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