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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korwriter Aug 25. 2024

개스타운(Gastown), 수다쟁이 잭의 전설

주마간산 여행기 (3)

한국에서 발간되는 문예지 ‘수필시대’에 ‘문학이 살아 숨쉬는 현장’이라는 제목의 기획특집으로 센트랄 공원에 이어 엠블사이드 공원까지 소개하는 글을 게재하게 되었다.  집필자료 수집에 공들인 것이 아까워 교민들께도 소개하고자 밴쿠버 주요 일간지에 원고를 송부하였다. 게재불가란 답을 들었다. 한국에 있는 독자라면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흥미를 유발할 수 있지만 밴쿠버 교민들에게 살면서 지겹도록 가보는 장소를 소개해 봐야 무엇 하겠느냐는 논리다. 나는 기행문을 쓰는 것이 아니라 특정장소에서만 얻어지는 문학적 영감 이라던지 개인적인 삶의 고백을 함께 나누고자 함이라고 했더니 그냥 묵묵부답. 결국 밴쿠버에서는 내 글을 소개할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레이디 경향’에서 흔쾌히 게재를 허락해서 한국과 캐나다 밴쿠버 독자들께 동시에 ‘문학적 영감을 얻는 내 삶의 흔적이 담긴 현장’을 보여 드릴 수 있어 기쁘다. (지금은 또 브런치 독자들께 선보여서 더욱 기쁘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니 서울 도심에서 20여 년 이상 직장생활을 한 내게 명동이 이러느니 광화문이 저러느니 하면 재미 있을까? 심심산골에서 살다가 처음 서울도심을 찾은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서울도심이 경이로움 그 자체일 터. 이 골목 저 골목 먹자골목까지 꿰뚫고 있던 당시의 내겐 오히려 지겨움 그 자체였다.


 밴쿠버의 도심, 소위 다운타운(downtown)이 그랬다. 처음 내 눈에 비친 다운타운은 경이 그 자체였다. 그곳을 찾았을 때가 7월. 밴쿠버로서는 최상의 달이다.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줄기차게 비 내리는 비의 도시(rain city) 밴쿠버. 그러나 3월 말부터 비 오는 날이 줄어들면서 청명한 날이 이어지다가 7~8월에는 절정을 이룬다. 호주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를 닮은 캐나다 플레이스의 선착장에는 연신 크루즈가 꾸역꾸역 세계각지에서 몰려온 관광객들을 쏟아내고, 비행기로, 기차로, 자동차로 밴쿠버를 찾은 국내외 관광객들 또한 도심의 다양함에 한몫을 거든다. 이곳에서 일하고 생활하러 왔지만 나도 처음에는 그들처럼 즐거웠다. 


 다운타운에 개스타운이 있다고 했을 때 나는 약간 혼란스러웠다. 개스타운? 프로판가스 충전소 같은 것이 있어서인가? 아니면 휘발유(Gasoline)을 줄여서 개스(Gas)라고 하니 큰 주유소들이 밀집된 지역인가? 한국사람들에게 물어보았더니 그냥 예전부터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무어 그런 동네 이름 따위에 신경 쓰느냐는 생각들이었다. 잘 안 되는 영어로 끙끙거리며 개스타운에서 가게를 하는 백인에게 물어보았더니 개시 잭(Gassy Jack)이라는 사람이 살던 동네라서 그의 이름을 따 왔단다. 


 그의 본명은 존 데이튼(John Deighton). 1867년 그 지역이 아직 황무지였을 때 백인들이 세운 제재소(sawmill)가 하나 있었다고 한다. 백인들은 목재로 집을 짓고, 가구를 만들고, 각종 생활용품들을 만드는데다 지금도 숲 속 도시인 밴쿠버가 약 145년 전에는 완전 삼림이었을 터. 지천으로 널린 나무를 베어 가공하는 공장이 무엇보다도 필요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은 열심히 일하고 퇴근 후 동료들과 한잔 하는 것이 삶의 낙(樂)인데 공장 안에서 술을 마시지 못하게 했고---술 마시고 작업하다가 나무 대신 사람 팔뚝을 자르는 일이 허다했을 터이니----공장 주변에도 술 파는 곳이 아무도 없었다. 남자들은 그저 기계의 부속품처럼 일만 하다가 공장과 동떨어진 집으로 가서야 한 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요즘 남자들도 잘 알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끌벅적하는 술집에서 한 잔 하는 것과 자기 집에서 친구들과 한잔 하는 것은 천양지차의 분위기라는 것을. 예컨대 요즘 새로 들어온 미스 아무개는 미모가 장난 아니다, 직장 상사 아무개는 자기 윗전에는 간 쓸개 다 내어줄 듯 하면서 아랫전은 뭣 부리듯 한다, 동료 아무개는 선배를 제치고 고속 승진했는데 알고 보니 여당 중진국회의원 모씨가 그의 삼촌이라더라----등등 가십거리를 안주 삼아 즐길 수 있는 곳이 술집이다. 그러나 자기 집에 친구들을 초대해서 술 마시며 나눌 수 있는 대화는 아무래도 한정되어 있다. 게다가 아내와 자식들이 들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 초대한 주인은 금기시되는 대화 내용은 삼가야 한다.


 그런 처지가 옛날의 밴쿠버라고 다름 있었으랴. 이 때 혜성같이 위스키술통을 들고 나타난 사람이 바로 존 데이튼. 영국인 항해사였던 존은 이미 그 당시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의 수도였던 뉴웨스트민스터에 술집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의 사업가적 수완이 술집 없는 공장지대를 놓칠 수 없었다. 그는 공장사람들에게 술집을 하나 주변에 지어주면 술을 팔겠다고 선언했다. 얼마나 갈망했던지 술집은 하루 만에 지어졌고,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게다가 주인의 입담이 보통 아니었다. 코메디언 백남봉, 남보원씨가 원맨쑈 하듯 항해사로서의 경험담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꾸며대니 사람들은 그를 수다쟁이 잭---그의 이름은 존이지만 백인들이 보통 이름을 잘 모를 때 아무개라는 말 대신 여자이름은 질, 남자이름은 잭이라고 부름. 마치 한국인들이 철수와 영희를 거명하듯---이라고 불렀다. 옛날 영어 식 표현으로 수다쟁이를 ‘gassy’라고 불렀고, 그의 이름은 개시잭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으며, 개시가 술집을 경영하는  동네라는 뜻으로 개스타운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큰 목재공장이 있고, 개시의 술집이 있고, 그 주변으로 상점들이 또 들어서고, 그래서 개스타운은 번창하기 시작했으며 한때 캐나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이민자들이 계속 늘면서 밴쿠버시가 형성되고 1886년 4월 6일 개스타운은 밴쿠버 시로 통합되어 그냥 하나의 동네로 남게 된다. 그러나 그 해 6월 13일 밴쿠버시의 400여 개 건물 대부분이 화염에 휩싸이는 대화재가 발생한다. 이후 건물들은 차차 재건되었지만 목재공장도 없어지고 사람들도 더 이상 찾지 않는 개스타운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술집경영으로 돈을 벌은 개시잭은 호텔까지 경영하였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잘 걷지도 못하고 숨쉬기도 어려워하다가 1875년 5월 29일 44세의 나이로 병사한다. 4년 전 그의 인디안 아내가 병사했고, 이어 재혼한 인디안 아내 코하일야(Qua-hail-ya)사이에서 아들을 얻었지만 그의 사망후 6개월 후에 죽고 만다. 그리고 그가 심혈을 기울여 경영하였던 호텔건물도 대화재의 참변을 피해갈 수 없었다.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은 개스타운 창시자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의 동상 앞에서 숙연해 진다. 삶이란 다 그런 것 아닌가. 운세가 불같이 일어날 때가 있고 재처럼 사그라들 때가 있는 법. 그래도 90세까지 산 그의 아내가 노스밴쿠버의 인디안 보호구역에서 살다 사망할 때 “남편은 아주 훌륭하고 좋은 사람(a nice, good man)”이었다고 한 것을 보면 그는 남자로서 자랑스러운 삶을 산 듯하다. 젊었을 때는 항해사로서 모험을 즐겼고, 중년에는 술집경영으로 고단한 노동자들의 삶을 즐겁게 했고, 호텔을 만들어 이민자들에게 타국에서의 안식처를 제공했고, 그리고 죽어서도 아내의 기억 속에 좋은 사람으로 남았다면 비록 짧은 생애였지만 위대한 보통사람의 길을 후회 없이 간 듯 하다. 술집이 있던 부근 워터(Water)거리와 카렐(Carral)거리의 교차점에 큰 단풍나무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개시잭의 동상이 놓여있다. 술통을 밟고 올라선 그의 동상을 보면 지금도 그의 수다스러운 이야기가 들려오는 듯 하다.

개시잭으로 알려진 존 데이톤의 실제모습  

                       개시 잭의 동상


 개스타운의 또하나 명물이 증기시계(Steam Clock)다. 1977년 밴쿠버시가 쇠락했던 개스타운을 부흥시키고 관광지역으로 조성하기 위한 방안의 일환으로 요청하여 캐나다의 시계제조전문가인 레이먼드 사운더즈(Raymond Saunders)가 제작한 증기로 작동하는 시계이다. 매 15분마다 멜로디와 함께 마치 증기기관차처럼 흰 증기를 뿜으면서 시간을 알려준다. 그 뿐이다. 관광버스에서 내린 아시아 관광객들이 이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카메라나 캠코더를 준비하여 기다리지만 기대하던 증기시계의 쇼는 몇 음절 멜로디만 들려주고 끝난다. 서울 어느 변두리 극장 식 레스트랑에 조용필이 출연한다고 해서 잔뜩 기대하고 갔는데 모습을 나타낸 것은 조영필이라는 모창 가수임을 알고 허무해 하던 때의 느낌이다. 인간들이여. 세상과 미래에 대해 너무 큰 기대를 가지지 말라. 시간이 흐를수록 삶은 허무로 가득 찬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니 작은 현실을 직시하면서 매일을 충실하게 살라. 이렇게 증기시계는 80이 넘은듯한 노년의 쉰 목소리로 초로의 이방인에게 훈계하는 듯 하다.

증기를 내뿜는 증기시계

개스타운/증기시계 앞에서/시공을 초월하여 예까지 온 정말/형형색색의 구경꾼들이/잠시 후 맞을 허무를/긴장하며 기다린다.//부-부-부-부/부-부-부-부/부, 부, 부//정신 나가게 살아 봐야/기다리는 것은 허무뿐이라고/세상에서 두 개뿐이라 폼 잡던/이 물건/몸 전체로 삶을 강의한다. (증기시계; 필자의 시집 “이방인 향단이” 중에서)



 수십 년의 추억이 어린 서울거리를 떠나 밴쿠버에 왔을 때 그래도 IMF의 희생자로써 괜찮은 새 출발을 했다고 생각했었다. 서울 명동이나 삼성동보다 훨씬 빈약한 다운타운을 만만하게 보면서 이 촌 동네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한국남자도 아니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관광지로 눈에 들어오던 다운타운 거리가 차츰 삶의 현장으로 다가오면서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숫한 장벽들이 시시각각 내 목을 조여 옴을 느꼈다. 증기시계 앞을 숫하게 스쳐 지나며 들었던 부-부-부 하는 시각을 알리는 멜로디는 자꾸 부(不)-부(不)-부(不), 아니야-이건 아니야-이래서는 안돼 라고 하는 소리로 귓가에 맴돌았다. 교민들의 초창기가 대개 그러했던 나도 신고식을 톡톡히 치르고 물질적, 정신적 아픔을 겪고, 어느 정도 세월을 보내고 담담히 개스타운을 찾았을 때는 내 머리에 서리가 앉기 시작하는 초로의 계절에 내 인생이 접어들고 있었다. 굶어 죽으려 해도 정부가 그냥 두지 않는 복지의 나라 캐나다에서 이제는 더 이상 서울스타일의 성공신화 환상을 쫓지 말자 다짐하면서 글도 쓰고 사회봉사도 하면서 지내니 그제서야 증기시계는 내게 부(富)-부(富)-부(富), 잘산다-부자다-마음이 부유하다 라며 내게 이제는 가난해도 행복하게 사는 밴쿠버 사람이 다 되었다고 일러 주는 듯 하다.


 개스타운에서의 볼거리는, 즉 관광객들이 인증사진(?)을 찍는 곳은 일단 개시잭의 동상과 증기시계 앞이라고 할 수 있다. 생전 처음 밴쿠버여행을 왔다면 빅토리아식 고풍의 건물들이 신기해 보이지만 캐나다나 미국이나 유럽 어디나 비슷비슷한 빌딩들이 많아 해외여행, 특히 서구 권 여행을 자주해본 사람들은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보다도 건물 저층에 있는 각종 기념품가게들의 진열품이 더 눈길을 끈다. 한국관광객들이 ‘밴쿠버의 인사동’이라고 이름 붙인 것에 걸맞게 여러 토산품 및 기념품 가게가 개스타운의 중심거리인 워터가(water street) 양쪽으로 즐비하다.  


유리공예상점의 진열장               

서부개척시대의 전통 복장 등 기념품을 파는 가게

 

 뿐만 아니다. 황소걸음으로 왔다 갔다 해도 20여분이면 대충 볼 것 다 볼 수 있는 개스타운이지만 카페, 커피샵, 각국고유의 미각을 자랑하는 식당들이 49개, 패션용품 및 액세서리, 가정용 및 사무용 가구점, 선물가게, 미장원, 건강원 등이 115개, 예술화랑이나 술집, 무도장 등 문화 및 유흥을 즐길수 있는 곳이 19개, 각종 어학원 및 대학이 13개, 건축, 인테리어디자인, 엔지니어, 기획사, 비즈니스 컨설턴트, 영화 및 영상물 제작소 등이 131개나 산재한(www.gastown.org 참조) 명실공히 원스탑 비즈니스 타운으로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한참을 안오다 다시와 보면 수시로 간판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도 사시사철 잘 되는 장사가 드물듯이 밴쿠버도 마찬가지다. 관광객들은 주로 여름철에 몰리고 가을이 되면 썰물처럼 떠나가니 손님 없는 나날들을 비싼 임대료 지불하면서 견뎌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개스타운이 임대료 비싸기로 유명하다. 

 

 개시잭 동상 맞은편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피자가게가 있었다. 다른 피자가게들은 서양인의 입맛대로 느끼하며 짠 피자뿐이라서 잘 가지 않았는데 이곳은 서양인 뿐 아니라 한국인의 입맛에도 맞게 아삭바삭한 빵에 불고기 등의 토핑을 얹은 피자도 있어 자주 가곤 했는데 어느 날 문을 닫았다. 한 곳에서 십 수 년 이상을 영업하면서 아이들 대학도 보내고 집도 사고 했는데 미국 911테러사건으로 관광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던 미국인들이 줄어들었고, 그나마 회복세에 들다가 미국달러화의 약세와 캐나다 달러화의 강세에 따라 또다시 관광객들이 줄어드는데 가게소유주는 5년 임대계약종료 후 재 계약 때 대폭 임대료를 올려 달라고 요구하니 도저히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문을 닫은 것이다. 다른 가게들의 사정도 엇비슷해서 수많은 가게들이 문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하니 갈때마다 달라지는 간판 때문에 거리의 모습도 달라지는 듯 하다.

 

지금은 사라진 스토리엄 극장 입구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개스타운 중간쯤에 위치한 스토리움극장(Storyeum Theatre)이 문을 닫은 일이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의 생생한 역사적 사건과 사실을 8개의 테마무대(set)로 나누어 65분동안 관람 및 체험할 수 있게 한 이 극장은 테마와 관련된 내용물 및 장치를 꾸미는데 22백만 달러나 투입되었으나 관객수 감소와 적자 누적으로 2006년 문을 닫게 되었다. 제1테마무대에서는 자신도 골수암환자이면서 암환자기금을 조성하기 위해 한쪽다리 만으로 캐나다 뉴펀들랜드 주 세인트존스에서 서부의 밴쿠버를 향해 143일 동안 5373킬로미터를 달렸던 테리팍스의 생전 모습, 몬트리올에서 개최된 엑스포 86의 현장,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렸던 동계올림픽에서 캐나다 남녀 아이스하키팀이 금메달을 획득한 경기장면, 밴쿠버가 2010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되는 순간 등을 담은 영상물을 보여주었고, 제2테마무대는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원주민 쓰레일 와우투스(Tsleil-Waututh)부족들의 시각으로 본 인류탄생---남자는 늑대로부터 생겨났고, 여자는 심해 바닥의 침전물로부터 생성되었다는---의 설화를 비롯 고대 인디안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숲속처럼 꾸며진 장소에서 실제 배우들이 나와 이야기해주는 무대로 꾸며져 있었다.     




 제3무대는 제2무대에서 탄생한 최초의 남자와 여자, 소위 원주민 식 아담과 이브의 자손들이 수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겪어온 사랑의 이야기들을, 제4무대는 유럽에서 온 신 이주민들의 정착과정에서의 어려움, 미국과의 분쟁관계 등에 대한 내용으로, 제5무대는 약 1862년부터 시작된 바커빌의 골드러쉬로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의 이야기, 제6무대는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진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가 통합되어 캐나다라는 하나의 국가를 탄생시킨 것과 여성들의 참정권 부여, 철도공사를 위해 대거 투입된 중국인들의 문제 등에 대한 이야기, 제7무대는 1944년도의 기차역으로 꾸며져 2차 대전에서 살아 귀환하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와 이태리 재건을 위해 파병되는 군인들의 모습 등이 실제 배우들에 의해 재현되고, 이윽고 캐나다 태평양 철도(Canadian Pacific railway)통해서 몬트리올에서 출발한 기차가 증기를 뿜으면서 들어오면 역에서 기다리는 아내를 향해 손짓하는 용사들의 모습과 형형색색의 얼굴을 한 이민자들의 모습이 함께 객차 안에 보이면서 캐나다가 다문화주의를 수용하는 듯한 의미를 암시해 주고 있었다. 마지막 제8무대는 출구로 나가는 과정에서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민들이 힘을 합해 지역발전에 이바지함을 나타내는 내용을 역시 영상으로 보여 주었다.

 

 개스타운에 오는 사람들은 한번쯤은 봐야 할 좋은 구경거리를 제공했지만 문제는 두 번, 세 번 보기에는 흥미가 동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들은 시간이 없어서, 밴쿠버 주민들은 영화상영관처럼 내용물이 자주 바뀌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한번 오면 더 이상 오지를 않았고, 그래서 결국 6백만 달러의 적자를 내고 공식적으로 문을 연지 2년 만에 극장은 문을 닫게 되었다.  지금 그 자리에는 반은 주거지, 반은 소극장, 지역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국, 쿠트니 문예학교, 및 각종 미디어회사가 있는 우드워드빌딩(Woodward’s building)이 옛추억을 지우며 차지하고 있다.

 

 이국에서 10여 년 가까이 살다 보니 나도 한국에서의 추억들이 차츰 지워지고 있다. 가끔씩 한국뉴스나 드라마 속의 서울 도심을 보면서 아, 저 골목에는 무엇이 있었는데 하고 추억하는 재미도 사라지고 있다. 그만큼 서울 도심의 모습이 빠르게 변모해 가기 때문이다. 특히 청계천이 복개되고 난 후 방문했던 서울은 고가도로 밑의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뜻이 맞는 친구들과 꼼장어에 소주 한 잔 하면서 미래를 꿈꾸었던 추억은 찾을 수도 없고 세련되게 정비된 주변들이 자꾸 낯설게만 다가와서 서글픈 적이 있었다. 마치 고향을 오래 떠났던 사람이 세월이 많이 흐른 후 다시 고향을 찾으니 예전 흔적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허망한 느낌이 드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밴쿠버에서의 추억은 잊지 않기 위해 개스타운을 가끔 찾는다. 관광객이 북적대는 7,8월도 좋지만 비 내려 고즈넉한 1,2월의 개스타운도 내 아련한 향수를 자극하여서 좋다. 스토리움 극장 앞에서 안내 전단지를 나누어주던 18세기 복장의 금발머리 여인을 보면서 이국에서의 첫출발이 금빛 꿈에 젖어 내리던 시절을 추억한다. 가끔 나태해지고 퇴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 그때의 초심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코리언-캐나디언으로써 한민족의 자긍심을 살리고 내가 살고 있는 지역사회의 발전에 동참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한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세계는 하나. 지구촌 어느 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부지런히 글로 남겨 내가 떠나온 곳의 사람들에게 피부색과 언어는 달라도 사랑하고 미워하고 슬퍼하고 분노하는 모습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절차탁마. 그러기 위해서는 내 사는 곳에서 부지런히 무엇이든 공부하고, 경험하고, 노력하고, 또 누구이던 차별 없이 열심히 사랑해야 하겠다. 개스타운의 가벼운 소요는 참으로 많은 것들을 결심하게 한다.


필자 주: 개시 잭 동상은 2020년 6월에 철거되었다. 죤 데이턴이 인종차별주의자이고 식민지시대 영국 제국주의를 대변하는 표상이며, 유흥업소를 열어 부를 일군 사람이라서 세계 만국인이 찾는 밴쿠버의 중심지인 다운타운에 그의 동상을 둘 이유가 없어서란다. 쩝. 그게 그렇게 큰 일인가? 나는 오리지널 캐나다 사람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 (2024년 8월 23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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