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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인생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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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korwriter Aug 31. 2024

지하철을 타자

시가 있는 에세이 (15)

 지하철을 타자

 우리 모두 한 통(桶) 속이 되자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사는 형편은 서로 달라도

 속속들이 생각은 서로 달라도

 어두운 굴 속 헤치며

 어려운 시절 헤치며

 우린 지금 함께 한 길

 가고 있지 않은가


 지하철을 타자

 졸고 있던 깨어 있던

 서 있던 앉아 있던

 웃고 있던 울고 있던

 말하고 있던 듣고만 있던


 생김생김은 서로 달라도

 서둘러 내려야 할 곳은 서로 달라도

 함께 있는 일순일각(一刻 一瞬)

 그 순간만큼은 


 우리 서로 한 통(桶) 속이 되지 않겠니


 중, 고, 대학교 총 동창회, 단과대 동문회, 학과 동문회, 대학원 동문회, 은행 입행동기회, 은행 퇴직지점장 모임, 지점장 초대부임 지점 출신 직원 모임, 종친회 모임, 무역학회, 상학회, 관세학회 모임, 문학 동인 모임, 모교 출신 문인 모임, 기독실업인회 모임 ---------,

  

 한국에 있을 때 나는 각종 모임에 참석하느라 숨이 가빴다.

 

 가급적이면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은행 영업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무슨 모임에서 초대를 하면 서슴없이 응했고 즉석에서 연회비 내고 회원가입을 하곤 했다. 그런데 모임의 숫자가 늘어나자 참석일정을 조정하는 것이 여간 일이 아니었다. 1년에 한 번, 분기에 한 번, 월에 한 번, 주일에 한 번 이런 식으로 모임 날짜를 구분하는데도 중복되기가 일수였다. 친목모임은 대개 금요일, 학회모임은 토요일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도리 없이 우선순위를 매겨 참석하곤 했지만 어느 모임이던 회원자격은 계속 유지했었다. 학연, 지연, 혈연이 얽히고설켜 돌아가는 한국사회에서는 조직 속에 있지 않으면 왠지 소외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많은 모임 중에서 모임 날이 기다려지는 것이 있고 반갑지 않은 모임이 확연했다. 모든 모임이 대개 회칙에서 ‘설립취지에 부응하는 행사 추진과 회원 상호간의 친목 도모 및 상호 부조’를 목적으로 정해두고 있지만 모임을 구성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모임이 발전하기도 하고 깨어지기도 한다. 발전하는 모임은 우선 회원 상호간 신뢰와 존중이 돋보이는 모임이다. 진심으로 서로를 걱정하고 도와준다. 깨지는 모임은 회원들이 무언가 얻으려고 왔다가 물질적으로 시간적으로 내게 이득이 없다고 생각하면 등을 돌리는 모임이다. 잘 되는 모임은 주고받는 마음이 잘 조화되는 모임이다. 서로가 욕하고 헐뜯기 보다는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때 그 모임은 나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보석 같은 모임이 된다.

 

    또한 발전하는 모임은 재정이 투명하다. 어떤 모임이던 회비를 내지만 그것으로는 행사비용을 충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회장단에서 찬조금을 낸다. 그저  이름뿐인 친목모임에 체면 때문에 적게는 수 십 만원에서 많게는 수 백, 수 천 만원의 찬조금, 기부금을 내는 회장단의 재정지원 없이는 별로 ‘빛나는 모임’이 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게 기금이 모이면 집행부에서 설립취지에 맞는 사업을 잘 해야 하는데 기부는 쥐꼬리만큼 하고 코끼리 몸통처럼 써대는 집행부를 만나게 되면 살림은 거덜 난다. 집행경비에 대한 영수증만 잘 챙겨도 떳떳해 질 수 있는데 그냥 대충대충 넘어가는 한국인의 습성 때문에 종래는 ‘공금횡령’이니 ‘사비지출’이니 하면서 정기총회장은 집행부에 대한 성토장으로 변한다. 이런 모임이 오래 갈 리 없다.


 우리네 삶은 지하철을 타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는 것과 같다. 잠실 역에서 내리는 사람도 있고 명동 역에서 내리는 사람도 있지만 함께 가는 동안에는 같은 운명의 굴레 속에 있다. 예기치 않은 정전사고가 생길 수도 있고, 역사 내의 화재로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갓 난 아기를 어르는 젊은 엄마의 미소를 함께 즐거워하고, 구걸하는 맹인부부의 구슬픈 노래 소리에 함께 안타까워하며, 경로석에 버티고 앉아 노인이 오면 조는 척하는 파렴치에 함께 분노하기도 한다.

 

 밴쿠버 교포사회도 교민 각자가 편도행 표를 사 들고 함께 가는 하늘나라의 기차에 오른 것과 같다. 외롭거나 슬플 때 함께 울고 기쁘거나 즐거울 때 함께 웃으며 ‘영원한 나라에 도달할 때 까지 서로 사랑하며 도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작은 모임’과 같다. 깨어지는 모임보다 발전하는 모임으로 만들어 나가야 낯선 곳에서의 삶이 좀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되돌아 보니>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밴쿠버에 와서도 많은 모임에 참석하고, 또 내 스스로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내가 만든 모임은 '캐나다 한국 문인협회'와 '캐나다 한인 늘푸른 장년회'이다. 

전자는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후자는 소위 '7080' 세대 모임이다. 내가 60대 초반에 시작해서 아직은 노인이라고 칭하기 싫다는 뜻으로 '장년회'라 이름하였는데 이제는 그 세대가 70,80이 되어 간다.

한국에서는 보수, 꼰대 세대라고 하지만 함께 만나면 반갑다. 그 시대 음악, 그 시대 영화, 그 시대 문학과 예술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사람은 연배가 비슷해야 친구가 된다. 한 열 살 까지는 허물없다. 


 그런데 이제는 서서히 가을 낙엽처럼 하나 둘씩 인생을 마감하기 시작한다. 종점은 아직 멀었는데 서둘러 인생열차에서 하차하는 사람들을 보면 한참 슬퍼진다.

도리 없다. 언젠가는 종착역에 도달하여 하차하기 전에 차창을 지나가는 풍경 구경하며 즐겁게 살아야 겠다. 

밴쿠버 지하철은 거의 대부분 '고가열차'. 그래서 바깥구경 하기 참 좋다. <2024년 8월 25일 월요일 새벽 1시 17분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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