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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korwriter Sep 17. 2024

노인들을 위한 나라

수필산책로 (1)

노인들을 위한 나라


“김여사. 예뻐졌네’

“아이참. 팔순이 다 되어 가는데 놀리지 말아요.’

“나이는 나이고, 예뻐진 것은 예뻐진 거지. 요새 연애하나 봐.”


 열한 시에 송년잔치를 시작한다고 신문에 광고되었는데도 꽃 단장을 한 할머니들이 열 시부터 한인회관 내의 송년잔치 장소에 미리 와서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1년 사이 누구는 세상을 떠났고, 누구는 갑자기 병을 얻어 침대신세고, 누구는 손주들이 시집, 장가가게 되었고, 증손주를 보기도 하고---


나이가 든다는 것은 경제적 능력의 상실보다 외로움 때문에 더 힘 드는 법. 한국에서는 노후의 생활비 때문에 걱정이 늘어난다지만 다행히 캐나다는 노령연금(OAS)이 있어서, 그리고 각종 노후복지혜택이 잘 되어 있어서 그런 염려에서 약간은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슬프거나 즐겁거나 함께하였던 가족들이 더러는 결혼으로, 더러는 사별로 멀어져 가는 황혼은 겨울처럼 황량하고 쓸쓸하기 마련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가슴에 쌓였는데 상대가 없다면 누구에게 풀어놓으랴. 그래서 밴쿠버의 노인들은 “노인회 송년잔치”를 더욱 기다리게 마련이다. 오랜만에 동무들을 만나 각종 여흥으로 재미있게 보내고 푸짐한 수다잔치까지 벌일 수 있으니.  


 필자가 팔자에도 없는 노인회 재무이사를 하면서 벌써 7개월여가 지났다. 그 동안 단오절 행사, 어버이날 행사, 여름야유회 행사, 추석잔치, 노인학교 운영 등 여러 행사들을 지켜보면서, 노인회가 없었더라면 고령의 노인 분들은 어디서 즐거움을 찾을 것인가 생각해 보았다.  캐나다에도 지역문화센터가 여기저기 있고 시니어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지만 영어가 원활하지 못하면 그림의 떡이다. 또한 정서가 다른 민족끼리 어울리다 보면 아무래도 속에 쌓인 이야기들은 시원하게 나눌 수 없지 않은가. 


 예전 어머니 생전에 구청에서 운영하는 노래교실, 춤 교실, 문학교실 등에 빠짐없이 참석하신 것은 굳이 노래를, 춤을, 문학을 배우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나면 각자 살아온 이야기들을 약간은 보태가며 나누는 재미에 비가오나 바람이 부나 어머니는 노인들을 위한 행사에 꼭 참석하셨다. 때로는 양말 한 켤레, 라면 다섯 봉지, 플라스틱 그릇 한 점 등을 상품으로 타 오시면 그렇게도 좋아하시던 어머니를 보면, 효자는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 뵙지 못하는 내가 아니라 매일 함께하는 구청의 노인교실 자원봉사자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래도 한국은 어느 정도 예산이 지원되지만 밴쿠버는 연 30불 내는 노인회비와 행사 때마다 모금되는 찬조금으로 운영된다. 행사준비는 한 푼 받지 않는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추진된다. 그나마 젊은 자원봉사자가 거의 없어–힘들고 바쁜 이민생활이라 대부분 젊은 층이 짬을 낼 수 없으니-70이 다 되어가는 노인회 임원진들이 무거운 책걸상 나르고, 청소하고, 각종 행사비품 챙기는 것을 보면 젊으나 젊은 노인네(?)인 필자는 참 안쓰럽다. 


 다행히 이번 송년회 행사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많은 분들이 행사를 위한 찬조금과 찬조물품을 기부했다. 어떤 분은 자신도 현재 넉넉하지 못한 생활을 하면서,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에 아무리 어려워도 그냥 있을 수 없었다며 직접 송년잔치 장소까지 와서 찬조금을 기부하고 갔다. 게다가 그냥 신문보고 왔다면서 자녀가 함께 와서 음식준비랑 행사진행 등을 돕는 분들도 있었다. 


 노인들을 위한 나라. 정부에서 노인들을 위해 완벽한 복지혜택을 베푼다고 그런 나라가 되는 것은 아니다. 노인들을 위한 자발적인 관심과 배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효심이 없다면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러나 이번 노인회 송년잔치에서 나는 보았다.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밴쿠버의 한인사회에 건재함을. 그리고 생각한다. 노인들을 위한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은 우리들의 미래를 위한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감히 묻고 싶다. 누구 평생 늙지 않을 젊은이 있느냐고? 있으면 나와 보라고. 

(2009년 12월 19일 밴쿠버 중앙일보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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