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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korwriter Oct 19. 2024

선이 2

시가 있는 에세이 (22)

2006년 9월 5일 밴쿠버 교민신문 “The plusNEWS" 게재분입니다.


선이 2.


선善아

스물다섯에 너는

아아. 정녕 네가 스물다섯이 되면

내가 울겠지


함박꽃 웃음의 추억과

수줍은 가슴에 숨기었던

너 햇사랑 사연들에 대한 추억은

어떤 도둑놈, 놈이

고스란히 훔쳐 가겠지


그래, 잘 살아라


백목련 웨딩드레스 눈부신

네 성장한 여인女人의 향기

뒤에서

나는 땀을 닦는 척

언젠가 네가 준 연분홍 손수건으로

슬쩍 눈가에 맺히는 이슬이나

훔치리니


그 꼴 당하지 말라고

하나님은 내게 

딸을 주지 않으셨나 보다

하나뿐인 아들의

듬직한 정情도 좋지만

곰살가운 딸의 

애틋한 정情도 느꼈으면 좋았으련만


그래, 지금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꼭 딸 하나 더 낳아

선善이라는 이름 지어줄 것이다.


그러면 선善이는

이름처럼 착하고 예쁜 선善이는

석양夕陽으로 저무는 내 인생에

다시 떠오르는 찬란하고 눈부신

태양이 되리니


아아. 나는 요즘

세상에서 딸부자 친구들이

제일 부럽다.


 내게 딸 셋 가진 직장선배가 있다. 20대 중반부터 함께 근무하며 알게 된 형님 같은 분인데 자상하고 사랑이 넘치는 분이다. 신혼이던 30대 초반에도 그 분과 함께 일한 적이 있는데, 연이어 딸만 둘이던 그는 ‘아들 낳는 비법’을 터득했다며 내게 가르쳐 주었다. 그 덕택인지 나는 첫 번에 아들을 낳았지만 그는 세 번째도 딸이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어떤 야외 가족모임에서 함께 한 적이 있었는데 내 아들을 보며 귀여워하면서도 부러운 표정이 역력해서 내가 다 미안할 정도였다.

 

  그러나 세 딸 모두 훌륭하게 잘 키웠다. 딸들은 음악에 조예가 깊어 모두 음대를 가게 되었고 해외유학을 갔다 온 딸도 있었다. 경험해 본 부모들은 알겠지만 자식들을 예술계통 대학에 보낸다는 것은 재정적으로 참 부담스러운 일이다.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기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제 용돈들은 다 충당했으나 평생을 한 눈 팔지 않고 봉급생활자로 지내온 그는 늘 힘들어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부러웠다. 딸들은 때로 엄마처럼 아버지의 용모, 복장, 습관, 말투 등을 미주알고주알 간섭하기도 하고 잔소리도 하지만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이면 어김없이 ‘아빠. 저희들을 잘 키워주셔서 고마워요. 항상 사랑해요.’라고 쓴 카드와 함께 선물을 챙긴단다. 바이올린, 피아노, 성악을 하는 딸들이 함께 연주하고 노래하면 집안은 늘상 웃음꽃이 피는 꽃밭이 된다고 했다. 

 

  그러던 그의 딸들이 결혼 적령기가 되어 시집가기 시작했다. 첫 딸 보낼 때는 서툴러서 예식장에서는 정신없다가 신혼여행 보내고서 서운한 감정에 눈물이 나더란다. 둘째는 딸의 손을 잡고 신부입장식 할 때부터 눈물나더니 막내는 아직 시집도 보내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눈물이 난단다. 딸 셋에 아내까지 합세해 항상 시끌벅적하던 집안이 오래지 않아 적막강산이 되려니 생각하면 아쉽고 그리운 눈물이 왜 없으랴. 나는 그런 소중한 경험을 하지 못해 아쉽다. 결혼이 늦었던 탓도 있었지만 아들 낳으니 느긋한 마음이 들어 딸 동생 볼 시기를 놓쳐버렸다.                   

 

  이제 기대해 볼 거라고는 딸 같은 며느리 들이는 일 뿐이다. 완전한 한 몫과 반  몫의 경상도 남자 사이에서 아내는 항상 심심했다. 내가 말이 별로 없으니 아들도 닮아 갔고 친구 사귀면서부터는 제 엄마와 대화할 일이 별로 없었다. 여자는 하루 2만 단어를 이야기하고 남자는 7천 단어를 말한다는데 아들과 나 둘 합쳐도 대화상대가 되지 못하였으니 아내는 외로웠을 것이다. 게다가 남자라고 아버지 편을 드니 아내는 가족간 논쟁에서도 항상 중과부족이었다.

 

  그래서 나는 소망한다. 며느리로 들어 올 아이는 아내처럼 재미있게 이야기 잘 하는 처녀였으면 좋겠다. 물론 아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며 착하고 예쁘고, 효녀이면 금상첨화. 부모에게 효도해야 시부모에게도 효도 할 터이니. 이런, 나이 들면서 흑질 같은 욕심만 더 커지는 듯하다.


<되돌아보니>

우리 집에 처음 며느리가 인사하러 올 때는 그저 손님이었다. 나도 생전 처음 시아버지 노릇을 하닌 무슨 말을 어떻게 하고, 어른다운 행동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다.


  그러나 세월이 한 10여년 흐르고, 귀여운 손자까지 안겨주니 이제는 무슨 말이든 허물없이 한다. 신혼 초는 시부모로서 이런저런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새아기가 우리 집 생활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도 힘들었으리라.


  손자가 부쩍 커가니 며느리도 언젠가는 시어머니 될 날 오리라 생각했는지 요즘은 시부모와 다소 편한 사이가 되었다. 나는 뒤늦게 딸을 둔 듯하다. 아내도 이제는 며느리와 제법 수다스럽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아들과 나, 요즘 말처럼 제법 ‘므흣’하다. (2024년 9월 27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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