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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korwriter Nov 09. 2024

스탠리 공원, 거기 그대 있었네

주마간산 여행기 (13)

스탠리 공원, 거기 그대 있었네


  초등학교 시절, 어느 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동상은 김유신장군, 이순신장군, 세종대왕 동상이었다. 삼국통일에 앞장 선 김유신장군, 적은 선박으로 왜적을 물리친 이순신장군,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 이분들은 우리가 ‘가,나,다’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본받아야 할 훌륭한 어른들이었다. 

 

  국가와 사회, 또는 민족을 위해 희생하거나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사후에 흔히 동상으로 남는다. 이로부터 한 사람의 힘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교훈을 얻는다. 동상으로 남으려고 생전에 혼신을 바쳐 자기 일에 몰두한 사람은 없다.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 작은 일도 성실히 해 온 사람들이, 그 삶이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킬 때, 감사함을 기리기 위해 후세들은 동상을 만든다. 세월이 흘러도 동상의 주인공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영원히 살아 남는다. 그리고 어떤 삶이 훌륭한 삶인가를 가르친다. 

 

  스탠리 공원에도 그런 훌륭한 분들이 여전히 살아 숨쉰다. 그들의 동상 앞에서, 변하지 않는 그들의 향기를 기억한다. 비록 그들처럼 나도 하나의 동상으로 남을 수 있지는 못하겠지만 그들의 발자취를 뒤따르고 싶다. 혹 누군가의 가슴에 형태 없는 동상으로 남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여생은 보람 있을 것이다.

 

  여름 불꽃축제가 장관을 이루는 잉글리쉬 베이 해변 길을 따라 스탠리 공원 입구로 들어서면 좌측에 오펜하이머 동상이 있다. 데이비드 오펜하이머(David Oppenheimer)의 흉상이다. 상반신 조각상이지만 왜 그가 거기 있는지를 알아 보는 것도 밴쿠버 역사의 한 귀퉁이를 들여다 볼 수 있어서 흥미롭다.

 

  오펜하이머 라는 성(姓)에서 추측되듯이 그는 독일계 이민자이다. 1834년이 시작되던 첫날, 1월 1일에 포도주 도매상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네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프랑크프르트의 공립학교에서 교육을 받는다. 열네 살 되던 해인 1848년, 정치적 격변과 계속된 흉년으로 생활이 힘들어지자 미국 뉴올리언즈로 이민 가 작은 잡화상에서 일하면서 장부정리(bookkeeping)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금광개발 붐, 소위 골드러시 소식을 듣고 1851년 캘리포니아로 건너 간 그는 무역상, 부동산업자, 식당자영업 등을 하다가 1857년 첫째 부인 사라와 결혼한다. 20여 년간의 결혼생활에도 슬하에 자식이 없던 그녀는 1880년 사망하고, 오펜하이머는 1883년 뉴욕출신 쥴리아 월터와 재혼한다.   

 

  캘리포니아 골드러시가 시들해 지자 1858년 형제들과 함께 BC주 빅토리아로 이전한다. 생필품 도매상을 하다가 프레이저 강과 카리부 지역에 사금채취를 중심으로 한 골드러시가 발생하자 몰려오는 채취업자와 식민지 정착민들에게 음식을 배달하는 케이터링 사업을 하게 된다. 

 

  이쯤 이야기하면 성미 급한 독자들은 짜증이 날 것이다. 그래서 어쩌라고?(So, what?). 평범한 독일인 이민자에 불과한데 왜 스탠리에 있는데? 경력을 보아하니 장사하던 사람인데 밴쿠버를 위해 무엇을 했는데? 의문에 바로 답해 드리는 것이 신상에 좋을 듯 하다. 원고지 칸을 메우기 위해 주저리주저리 읊어 대는 것은 필자도 싫으니까.


  사업을 하면서 돈을 번 그는 차츰 도로건설 이라던지 철도개통에 관심을 가지고 당시 영국 식민정부에 많은 협력을 한다. 시정에 관심을 가지고 1885년 밴쿠버 시의원이 되더니 마침내 1888년 밴쿠버 제2대 시장으로 취임, 1891년까지 많은 일을 한다. 예컨대 소방서 신설, 버라드해협을 건너 노스밴쿠버로 가는 페리 신설, 시내 전차시스템 도입, 캐필라노 강으로부터 도심까지의 수로 개발, 공원, 어린이 놀이터, 시립병원, 도심 묘지 조성 등 시민들의 편리를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 바친다. 스탠리 공원도 그의 시장 재직 시 개장하였다.

 

  그는 자선기관이나 공원부지 조성을 위해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땅을 기증하였고, 재직 중 한 푼의 월급도 가져가지 않았다. 시정관련 접대비를 시청 돈으로 쓰지 않고 개인 돈으로 지불하였다. 모자라는 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BC주 광산개발사업과 설탕정제사업을 통한 광물 및 설탕판매를 위해 미국, 호주 및 영국을 비롯한 유럽지역에 까지 홍보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의 모든 시정사업들이 오펜하이머의 개인사업과 연결되어 있다고 비난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다. 소크라테스, 석가, 공자. 예수 같은 세계 4대 성인들도 반대파는 있었다. 내게 해를 끼쳐서가 아니라 나보다 잘난 사람은 괜히 싫어하는 것이 보통사람들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보통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펜하이머는 다수의 보통사람들을 위해 헌신하였지만 소수의 보통사람들에 의해 마음고생을 하였다. 


  그래서인지 1897년 12월 31일 64세의 나이에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묘소는 밴쿠버가 아니라 두 번째 부인 줄리아가 묻힌 뉴욕 브룩클린이다. 그를 기리기 위해 1911년 반신상이 스탠리 공원 입구에 세워졌고, 2008년에는 캐나다 역사보존위원회가 그를 캐나다의 역사적 인물로 선정하였다. 동시에 당시 시장인 샘 설리반은 7월 12일을 ‘오펜하이머의 날’로 명명하였다.


 데이비드 오펜하이머의 흉상


 스탠리 경


 오펜하이머가 있는 공원 입구의 반대쪽 입구, 즉 콜 하버에서 들어오는 입구에는 프레드릭 아서 스텐리 경(Frederick Arthur Stanly)이 서 있다. 두 팔을 활짝 펼치고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1888년부터 1893년까지 영국에서 파견된 캐나다 총독이었던 그는 공원이름에서 뿐만 아니라 전국하키게임(National Hockey Leagu;NHL) 최종 우승팀에 주어지는 스탠리 컵에도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대대로 귀족집안인 영국 명문가 출신으로 런던에서 태어났으며 역시 명문인 이튼(Eton)과 왕립 군사대학인 샌드허스트(Sandhurst)에서 수학하였다. 보수당 의원으로서 영국 정부의 주요 요직을 거쳤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생적으로 귀족이니 소위 ‘금 숟가락 물고 태어난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쯤에서 나는 캐나다 여기저기에 소위 ‘왕족(Royal Family)’ 또는 ‘귀족(Sir)’들의 흔적이 있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다. 미국도 1775년 독립전쟁 발발 이전까지는 캐나다와 마찬가지로 왕실 및 귀족들이 다스리는 영국정부에 충성했을 터. 그러나 미국은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며 영국 식민지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했지만 캐나다는 여전히 영국 편이었고, 심지어는 미국과도 일전을 벌리기도 했다. 두 나라 국민들의 초기이주민들이 대부분 영국인으로 구성되었지만 지지기반에 따라 나눠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도 캐나다인은 미국인을 ‘버릇없고 이속에만 밝은 사람’, 미국인은 캐나다인을 ‘촌놈들’로 평가한다. 


  군주제를 옹호하는 ‘왕당파’가 득세한 캐나다는 대통령이 아닌 수상이 다스리는 나라이다. 명목상으로 캐나다를 대표하는 사람은 영국여왕이 파견한 총독이다. 이들은 대부분 백작, 후작, 남작, 자작 등의 칭호를 가지고 있는 영국 귀족들이었다. 1952년부터 캐나다인을 총독으로 임명하기 전 까지는.

 

  고려 무신정권 시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며 반란을 일으킨 노비 만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는 근대에 와서 조선왕조의 부활 및 계승을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여전히 왕조를 유지하며 은근히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을 영국의 그것과 비교하면서 격(格)을 높이려고 하는 것을 볼 때 필자는 일본뿐 아니라 영국 왕조의 그림자도 캐나다에 드리워져 있는 것을 못마땅해 한다. 


  신년사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TV에 나와서 하고, 왕세자나 세손부부가 올 경우 마치 동남아시아에 온 한류스타 맞이하듯 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그러나 어쩌랴.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라야 하는 것을. 단지 내가 부릴 수 있는 심술은 이쯤에서 스탠리경 이야기는 접고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역경을 이기고 자기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 정도뿐이다.

 

  브록톤 포인트 등대 가는 길 우측을 보면 단거리 달리기 선수 헤리 제롬(Henry "Harry" Winston Jerome)이 아직도 달리고 있다. 

  그는 1960년, 1964년, 1968년 등 3회에 걸쳐 캐나다 대표선수로 하계올림픽에 참가했다. 1966년 대영제국 및 연방 경기와 1967년 범(凡)아메리카 경기에서 금메달을 받으면서 이미 그의 실력을 인정받았으나 올림픽 에서는 1968년 100m 단거리 주자 부문에서 동메달에 그쳤다. 그러나 당시의 캐나다로서는 그것도 상당한 성과였다.


   그는 1940년 9월 30일, 캐나다의 중서부인 사스카츄완주의 프린스 알버트에서 태어났으나 열두살에 BC주 노스밴쿠버로 이주한다. 1958년 노스밴쿠버 고등학교 학생일 때 처음 단거리경주를 시작했는데 이를 기려 동 학교 인근에 ‘헤리제롬 종합체육관’이 설립되었다. 모교인 미국 오레곤주립대학 체육관과 출생지인 프린스 알버트의 단거리 경주장(track and field stadium)에도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해마다 버나비 센트럴공원의 스왕가든 필드장에서 열리는 국제단거리경주도 그의 이름이 명명되어 있다.


  1969년 은퇴 후 모교인 오레곤 대학에서 체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당시 수상인 픠에르 트뤼도로부터 체육부(Ministry of Sports) 설립을 도와달라는 제언을 받는다. 체육부에서 여러 직책을 맡아 성실히 수행하였으며 청소년 단거리경주 꿈나무 발굴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1980년대에는 캐나다 수상의 상이 주어지는 체육프로그램을 BC주에서 주관해 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82년 12월, 42세의 젊은 나이에 뇌동맥류(brain aneurysm)로 사망하고 만다.


  그는 흑인이었으며, 가난한 하층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스포츠를 통해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였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공부하면서 캐나다 체육발전을 위해 힘썼다. 어떻게 보면 절망에 빠질 수 있는 삶인데도 개의치 않고 오직 한길, 그가 좋아하는 한가지의 목표를 향해 달렸다. 그의 꿈은 이뤄졌고,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사회와 국가를 위해 헌신하였다. 


  그것이 그가 스탠리 공원에서 아직도 달리고 있는 이유이다. 돈벌이도 되지 않는 스포츠, 그것도 별로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 단거리 경주 부문에서, 기록갱신을 위해 어떤 때는 다리 부상-1962년 호주에서 열린 영연방 경기에서 부상, 의사가 다시는 뛸 수 없다고 경고함-을 입어가면서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길을 간 그의 신념과 집념이, 고향에서의 모든 것 다 버리고 낯선 땅 캐나다에서 새롭게 삶을 시작하는 이민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는 듯하다. 


헤리 제롬, 



로버트 번즈의 동상


  내게도 그렇다.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굳이 한국문학을 고집하면서 외롭게 고군분투하는 내게 힘을 주는 듯하다. 돈벌이도 되지 않는 문학, 그것도 힘겹고 바쁜 이민자들의 관심 밖에서 벗어난 한국 문학, 그래도 더 잘 해보려고 노력하다가도 시시때때로 다가오는 자괴감, 무력감, 실망감. 이런 것을 잘 극복하라고 헤리 제롬은 내게 응원을 해 준다.


  응원을 해 주는 사람은 또 있다. 스탠리 동상과 불과 몇 걸음 떨어져 있는 로버트 번즈의 동상이다. 밴쿠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문학가의 동상. 마치 오래 떨어졌던 부모형제를 만난 듯 반갑다. 시인도 자신의 고향이 아닌 이 낯선 땅에서 동상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롭다.


  로버트 번즈는 스코틀랜드 시인이다. 1759년 1월 25일, 앨로웨이라는 작은 농촌마을에서 독학으로 글을 깨친 아버지와 소작농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농촌 오두막집은 현재 번즈 기념관(Burns Cottage Museum)으로 남아 있다. 


  그가 일곱 살 되던 해 아버지는 오두막을 팔고 앨로웨이 남쪽 산기슭의 70에이커 농장을 소작한다. 정규학교를 다니지 못했지만 그의 아버지로부터 읽기, 쓰기, 수학, 지리, 역사 등을 배운 것을 보면 비록 농부였지만 아버지의 교육열이 대단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가르침이 한계에 달하자 몇몇 가정교사들로부터 문법, 수학, 라틴어, 프랑스어 등을 배웠다. 그중 한 명의 도움을 받아 15세에 처음 ‘오, 내사랑 보니처녀여(Oh, Once I Lov’d A Bonnie Lass)’라는 시를 썼다.


  그의 사생활은 약간 문란했었다. 1784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하녀출신인 엘리자베스패턴과 결혼도 하지 않고 1785년 첫딸을 낳는다. 그러면서도 진 아머라는 처녀와 슬그머니 사귀더니 1786년에 아이를 가지게 한다. 혼인약정서를 써 주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화가 단단히 났던 모양이다. 그녀를 삼촌이 있는 다른 지방으로 보낸다. 


  그러나 사랑에 장벽은 없는 법. 1788년 기어이 결혼식을 올린 번즈 부부는 그 동안 쌓인 한(?)을 풀려는 듯 내리 아홉 명의 자식을 낳게 된다. 그래야 살아남은 자식은 세 명이었지만. 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은 진의 아버지가 딸을 다른 지방으로 보낸 사이에 번즈는 메리 캠벨이라는 여자와 또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다. 


  결국 메리가 발진티프스에 결려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그는 다시 진에게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시인의 사랑은 인간적으로는 용서가 되지 않지만 연애를 하면서 주옥 같은 사랑의 시가 많이 나왔으니 문학적인 견지에서는 슬그머니 한쪽 눈을 감아주는 수 밖에 없을 일이다. 


  농사일로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그는 친구의 소개로 자마이카의 한 노예농장에 경리 직을 주선 받고 이민 가기로 작정한다. 그러나 또 다른 친구의 권유로 1786년 7월 31일 칼마크라는 도시에서 출간한 첫시집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쓴 시집(Poems, Chiefly in the Scottish dialect)’이 잘 팔리자 그는 하루아침에 유명시인이 되어 버렸다. 


  시집판매수익도 들어오자 그는 자마이카로 가려던 계획을 접고 본격적으로 시작(詩作)에 전념하기로 결심한다. 시집을 발간한 그 해 11월에 스코틀랜드를 벗어나 좀 더 큰 도시인 영국의 에딘버러로 갔는데 거기서도 그의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각계각층의 인사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손님으로 초대받기도 했는데 특히 당시 유명한 소설가, 극작가, 시인인 월터 스콧 경(소설 아이반호의 저자)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기도 했다.


If a body, meet a body/Comin’ thro’ the rye/If a body kiss a body/Need a body cry?/Ilka lassie has her laddie/Nane, they say, hae!/Yet, a’ the lads they smile at me/When comin’ thro’ the rye.(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려면/밀밭을 건너와요/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키스하려면/그 사람을 울려야 하나요?/처녀들은 누구나 사랑하는 총각이 있지만/없어요! 라고 그들은 말하지요./총각들은 내게 미소를 보내요/밀밭을 건너올 때는)



  초등학교 시절 ‘나아가자 동무들아 어깨를 걸고, 시내 건너 재를 넘어 들과 산으로’하며 무심코 불렀던 동요가 로버트 번즈가 시를 가사로 붙인 스코틀랜드 민요란다. 그러고 보니 뜻도 모르면서 어릴 적에 ‘이쁜이 바지, 미운이 바지/모두 모여라’하고 원어가사를 변형한 노래를 부르던 생각이 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에딘버러 시절 메리와 연애행각을 벌렸던 그는 1788년 다시 진의 품으로 돌아오면서 스코틀랜드 덤프레셔(Dumfriesshire)주에서 엘리스랜드 농장을 경영하였으나 별로 재미를 못보고 1789년 세무서에서 일을 하면서 농장을 포기한다. 


  1791년 상업도시인 덤프라이(Dumfries)로 이주하면서 많은 서정시를 쓰게 된다. 구전되어오던 스코틀랜드 민요에 가사를 붙여 대중들이 즐겨 부르게 하였고, 그러한 노래들은 당시 북미대륙으로 이주하던 스코틀랜드인들의 가슴에 살아 남아 어렵고 힘든 타향살이의 시름을 달래는 역할을 하였다. 


  연말이면 즐겨 부르는 ‘올드랭샤인’도 그의 시가 붙은 스코틀랜드 민요이다. 오랫동안 류마티즘심장병(rheumatic heart disease)증상으로 힘들어 했으나 정작 발치, 즉 치아를 뽑고 난 후유증에 고생하다가 1796년 7월 21일 37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후에 알렉산더 멕라츨란(Alexander McLachlan:1818-1896)이라는 스코틀랜드 계 캐나다 시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으며, 그로 하여금 모국 방언으로 시를 쓰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를 비롯한 모든 스코틀랜드 계 캐나다 이민자들은 로버트 번즈를 정신적 지주로 생각하였으며, 번즈의 출생 일에 맞추어 캐나다 여러 지역에서 시인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벌어지고 있다. 동부의 뉴펀들런드주 에서부터 서부의 BC주에 이르기까지 매년 시인의 탄생일을 기려 ‘로비 번즈의 날(Robbie Burns Day-Robbie는 Robert의 애칭)에 시 낭송, 번즈 작사의 스코틀랜드 민요 부르기, 스코틀랜드 전통 음식 맛보기 등 여러 가지 이벤트를 선보이고 있다. 또한 맥마스터 대학과 사이먼프레이저대학(SFU)의 스코틀랜드 연구센터 등에서도 이날을 기려 마라톤 시 낭송 회를 열기도 한다. 


  밴쿠버의 스탠리 공원뿐 아니라 퀘벡, 뉴브론즈위크를 비롯한 캐나다 전역에서 로버트 번즈의 동상을 발견할 수 있다. 사후 200여 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아직도 그는 스코틀랜드인 뿐만 아니라 이제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가 남긴 문학의 힘이다. 문학이 사람을 움직이고, 사회를 움직이고, 세상을 움직인다.


  해서 나는 내 외로운 한국문학에의 짝사랑에 대한 당위성을 찾는다. 내 자신의 작품은 오래 남지 못하겠지만 우리 한국인들의 가슴속에 아직도 살아있는 민족시인, 예컨대 김소월, 윤동주, 이육사 등을 비롯한 전, 현대 시인들의 아름다운 시들을 교민사회에 전파하면서 한국인으로서의 얼과 정서와 민족적 자긍심을 되살려 나간다면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산천이 바뀌어도 우리들의 혼은 계속 미래를 살아갈 것이다. 


  돈이 되지 않은들 어떠랴. 시간을 좀 투자한들 어떠랴. 먼 훗날 우리 뒤에 오는 이국 땅의 후세대들이 나로 인하여 ‘초혼’, ‘별 헤는 밤’, ‘광야’ 등을 외우고 기억한다면 내 삶은 그로 인해 족하리라. 스탠리 공원 한 모퉁이에, ‘거기 그대 있듯이’ 누군가의 마음 속 한 모퉁이에 내 흘린 땀이 기억될 수 있다면 참으로 영광일 것이다. 아니면 말고. 누가 뭐라던 그냥 문학이나 짝사랑하면서 이대로 살아갈 것이니까. 그 결심은 누구도 내게서 뺏어갈 수 없을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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