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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korwriter Nov 07. 2024

일곱송이 수선화

수필산책로 (8)

일곱송이 수선화


  겨우내 그녀들을 기다려 왔다. 자기자신 외에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나르키소스의 슬픈 전설 때문이 아니다. 2월말부터 서둘러 피다가 이내 고개를 떨군 개나리나 그 크나큰 꽃송이로 하여 도저히 ‘사뿐히 즈려밟고’ 갈 수 없는 북미 산 진달래로는 봄의 몸짓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 북미 땅에서는 그냥 데포딜(daffodil)로 불려지는 수선화. 그녀들의 흔적이 있던 곳마다 걸음을 멈추고 행여나 하면서 살펴보곤 했던 곳은 바로 내가 거주하는 콘도 입구 화단, 메트로타운 전철역 앞 화단, 센트럴 공원 피치앤퍼트(Pitch&Putt) 입구 화단, 그리고 윌링돈 교회 바깥 화단. 내가 그네들을 기다려 온 곳은 주로 그 부근이었다. 


  3월 중순이 되어 가는데도 눈발 흩날리는 얄궂음에 꼬맹이 봉오리들은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가 이내 움츠렸지만 시련의 꽃샘을 이기고 4월의 양광이 더한층 따사로워지자 그네들은 살풋이, 조신하게, 그러나 고고하고 우아하게 그 아름다운 자태를 이윽고 드러내었다. 


저는 대궐 같은 집이나 한 뼘 땅도 없답니다.

(I may not have mansion I haven't any land)

손에서 바스락거릴 지전 한 푼 가진 게 없답니다.

(Not even paper dollars to crinkle in my hands)

그렇지만 그대와 함께 일천 봉에 올라가 아침을 맞이하며

(But I can show you morning on a thousand hills)

입맞춤과 함께 그대에게 황금빛 수선화 일곱 송이를 꺾어 바치겠습니다.

(And kiss you and give you seven daffodils)


  수선화. 금빛 수선화. 환갑 넘긴 영감이 주책없이 지나가는 젊은 처녀를 곁눈질 하듯 나는 자꾸만 그리고 꾸준히 그네들의 여린 봉오리들을 주시해왔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더 이상 뜸들이지도 않고, 마침내 그네들은 내 앞으로 다가와서 화사한 미소를 선물하였다. 나는 브라더스 포(Brothers Four: 60년대 미국의 유명 4중창 그룹)의 일곱 송이 수선화(Seven Daffodils)를 흥얼거리면서 잠시 총각시절로 되돌아갔다. 


   군에서 제대를 하고 발령받은 곳이 기업은행 본점 영업부였다. 3월 중순경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 해 신입사원 연수를 받고 일곱 명의 여직원이 영업부에 배치되었었다. 대학출신도 있었고 고교출신도 있었지만 사회초년병이 된 그들은 모두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당시 은행은 일류직장에 속했고 여성들에게는 특히 입사가 힘든 곳이었다. 입사시험 성적도 좋아야 하지만 외모단정하고 품행 방정해야 하는 것도 필수조건이었다. 그래서 여행원은 좋은 신붓감으로 지목되던 시절이었다. 


   총각과 처녀. 나비와 꽃처럼 얼마나 서로 매력적인 직장동료인가? 나는 그들 속에서 함께 밤새워 일하고, 춤도 추고, 술 마시고, 주말에 등산도 가고, 영화도 함께 보면서 은근히 미래의 동반자를 꿈꾸어 보았다. 인연이 따로 있었는지 제법 공들인 여행원들도 있었지만 다른 곳으로 전근가게 되니 그도 끝장이었다. 그네들과의 관계는 그냥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네들은 자기들끼리도 자주 함께 여기저기 다녔는데 스스로들을 일곱 송이 수선화 라고 불렀다. 꽃말처럼 “존경과 연모”를 받고 싶어하지만 아직은 “자존심과 자기애”에 넘쳐 있는 나이기 때문이었으리라. 모두가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 아름다운 열애 끝에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잘 살고픈 소박한 꿈들을 가지고 있었다.


   세월은 흘렀고 일곱 송이 수선화들도 제 갈 길을 걸어갔다. 여자팔자 뒤웅박 팔자라더니 신입사원으로서의 출발선은 모두 같았으나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달랐을지도 모른다---운명은 달랐다. 어떤 이는 사랑에 버림받기도 하고, 어떤 이는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하고, 어떤 이는 초년에 배우자를 사별하기도 했다. 어떤 이는 혼자 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자녀를 몇 명씩 가져 대가족을 이루어 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아이를 못 가져 부부만 오롯이 살기도 하고----

 

  수선화처럼 고고하고 아름답던 모습들은 그리하여 시들어 가겠지, 벌써 30여 년이나 지나 버렸으니.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선택한 연인들을 사랑했었다. 재산이나 지위나 명예 등은 따지지 않았다. 요즘 세대들과는 판이했다. 1970년대에 꽃다운 처녀들이었던 그녀들은 모두 순수한 사랑에 대한 열정과 갈망으로 충만해 있었다. 세월이 그들을 어떻게 변모시켰던 후회하지 않고 이제는 흘러가버린 추억 속의 사랑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값진 물건들을 사 줄 재산은 없지만 

(I do not have a fortune to buy you pretty things) 

달빛을 엮어 목걸이와 반지를 만들어 드릴 수는 있답니다.

(But I can weave you moonbeams for necklaces and rings) 

일천 봉에 올라가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And I can show you morning on a thousand hills) 

입맞춤과 함께 그대에게 일곱 송이 수선화를 꺾어 바칠 수는 있답니다.

(And kiss you and give you seven daffodils)


  금년 봄도 어김없이 수선화는 피어난다. 그리고 4월 가고 5월 맞는 어느 늦은 봄날, 수선화는 다른 꽃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어김없이 내 시야에서 사라질 것이다. 서운함이야 말해 무엇 하랴. 인생이 다 그러한 것을. 잠시 황홀했던 짧은 순간의 애정을 간직하면서 나는 다시 일년을 기다릴 것이다. 일곱 송이 수선화를 꺾어 바치고 싶은 나의 그대와 함께.

<2012년 4월 21일 밴쿠버 조선일보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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