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전 일이다. 다니던 은행 휴양소-연성장이라고 불렀지만-가 속초에 있어서 여름휴가면 어김없이 우리 가족은 강원도로 향했다. 일정에 맞추어 은행버스가 을지로 본점건물에서 속초 연성장으로 운행되었는데 중간에 한번은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15분정도 쉬어가곤 했다. 간식 사 먹는 맛도 있지만 우선 생리적 요구에 부응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남자 화장실 소변기 위에 스티커가 애교스럽게 부착되어 있었다. 거기 이런 문구가 있었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 화장실 악취가 변기 밖으로 아무렇게나 뿌려지는 소변으로 비롯되기 때문에 은근히 ‘정조준’해 주기를 남성들에게 부탁하는 글귀였다.
어려울 것 없었다. ‘일보 전진’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모자라면 다시 ‘일보전진’하면 된다. 소변기에 가까이 다가 갈수록 악취는 그만큼 줄일 수 있다. 나도 좋고 남도 좋다. 배설물이란 내것도 더러운데 하물며 남의 것이랴. 서로 조심만 하면 서로 악취를 맡을 일이 적어진다.
그런데 남자들이여. 공중변소에서는 ‘일보전진’의 에티켓을 지키는데 집에서는 어떠한가? 타인의 집을 방문할 때 화장실만 들러도 그 집안의 수준을 간파할 수 있다. 집 화장실은 남녀공용이다. 공중화장실처럼 남자를 위한 입석 소변기가 없으니 도리없이 좌변기 뚜껑 열고, 좌변대 열고 볼일을 봐야 한다. 문제는 남자들이 서서 소변을 보는데 낙차가 커서 소변방울이 사방으로 튄다는 것이다.
좌변기 주변에 흩뿌려지는 소변방울을 닦는 남자가 몇이나 될까? 한 두방울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배출된 요소나 암모니아가 마르면서 찌들어 종래는 지독한 악취를 풍긴다. 그정도 되면 세척제로 소변자국을 박박 문질러도 냄새가 잘 가시지 않는다. 예방이 최선이다.
정조준이 잘 안되어 항상 아내에게 야단맞는 친구가 있다. 묘수를 부렸다. 앉아서 소변을 보는 것이다. 큰 일 볼 때 처럼. 그런데 영화인지 드라마인지에서 남자의 ‘그것’이 없는 사람이 쭈그리고 앉아 작은 일을 보는 장면을 보고는 처량하고 한심해서 다시 원위치 했다는 것이다. 대신 볼일 보자 마자 부리나케 쭈그리고 앉아 화장실 휴지로 변기밖으로 탈출한 소변방울을 닦아낸다고 한다. 늙어가면서 더욱 힘들어 지는 것이 젊은때는 박연폭포같이 세차게 흐르던 소변줄기가 점차 가늘어지고 두세줄기로 나눠지는가 하면 분무기처럼 사방으로 튄다는 것.
소변줄기, 소위 ‘오줌발’이 약해지기 시작하면 남자는 점차 의기소침해 진다. 몸의 노화를 알리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모 노인단체에서회원들이 일고여덟시간 걸리는 거리에 있는 온천으로 관광을 간 적이 있었다. 마침 가을이고 해서 버스 주행코스를 경관 좋은 곳으로 택하겠다는 관광회사 측의 배려가 있었지만 노인들이 선택한 경로는 공중화장실이 편리한 곳이었다. 한국은 고속도로를 달리건 지방도로를 달리건 어딜가나 공중화장실이 잘 정비되어 있는데 캐나다는 그렇지 않다. 서너시간을 달려도 공중화장실이 없는 곳이 있으니 노인들은 당연히 한, 두시간마다 ‘볼일’을 볼 수 있는 경로를 선택한 것이다.
나이가 들면 점차 방광의 기능이 약해진다. 정상적인 방광은 소변이 300ml 에서 500ml 정도가 차면 방광근육이 수축하면서 소변을 밖으로 내 보낸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 수축력이 약해져 조금만 오줌이 차도 내 몸에 소변을 내 보내라는 신호를 보낸다. 전립선도 문제다. 나이가 들면 요도를 감싸고 있는 전립선이 커져 요도를 점차 압박하고, 좁아진 요도를 통해 나오는 소변은 자연히 가늘어지거나 쉽게 흩어진다.
100세 시대라지만 60세만 넘으면 인생의 가을이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신체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80을 넘기면 대부분에게 혹독한 겨울이 온다. 아무런 병 없이 잘 지내가다 한 며칠 앓고 세상 하직한다면 큰 복이다. 난방 잘 되는 고급아파트에 사는 것 같으리라. 그러나 긴 세월을 잘 치유되지 않는 병에 시달리다가 주변사람들에게 피해만 주고 가버리면 큰 재앙이다. 노숙자처럼 거리에서 천막치고 겨울나는 것 같으리라.
어쩌랴. 우리내 삶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을 때 까지 섭생을, 운동을, 사귐을, 자선을, 봉사를 잘 하면서 주변을 늘 찬찬히 정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을 소변기 주변 뿐 아니라 바지에도 흘리지 않도록 항상 청결하게 몸을 가꾸고, 젊은이들에 대해 쓸데없는 참견을 자제하고, 말을 아끼고, 덕 베품은 아끼지 말아야 한다. 지켜야 할 이런 덕목들은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성서나 불경이나 철학서적을 통해서 뿐이 아니다. 금언은 사방에 널려 있지만 지키지 못하니 문제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공중화장실에서 느끼지 못한다면 인생을 헛 살은 셈이다. 알고도 모른척 한다면 더 고약한 인생을 산 것이다. 하찮은 규범이라도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는 지켜야 한다. ‘일보전진’하는 행동으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노인네의 삶이 그렇다. 죽음 앞에서는 ‘이보 후퇴’가 없다. 어차피 ‘일보전진’ 해야된다면 과감해 지자. 나는 그래서 요즘 기타를 배운다거나, 한국 고대사를 공부한다거나, 매일 한 시간씩 걷기운동을 하기로 했다. 인생말년의 ‘일보전진’이 내게 무엇을 가져다 줄 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서 삶의 후회로 점철된 악취는 제거해 줄 것이다. 또 모른다. 거기다 내 보람있고 아름다운 말년의 인생이 방향제가 되어 향기마저 풍기게 할 지. 요즘 한국의 공중 화장실 스티커 문구는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로 바꼈다. 바로 나더러 하는 말 처럼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