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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korwriter Nov 11. 2024

가을망령

꽁트 한마당 (3)

가을망령


예전에   제가 썼던 글을 신문, 잡지 등에 발표하고서 복사를 하고 그것을 스크랩해 두었는데 세월이 지나가니 복사잉크가 날아가서 글씨가 흐릿하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냥 두면 영원히 사라질 것 같아, 다소 치기 어리지만,  내 소중한 지난날의 솜씨를 계속 간직하고 싶어 밴쿠버의   언론에 연재되었던 것을 다시 브런치에 올립니다.  배경이 1980년대 초, 중반이고 그 당시 쓴 것이므로   현재 상황과 일부 불일치 하는 점이 있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필자 주]


   10월에 접어들면서 가을빛은 완연하게 서울을 덮고 있었다. 9월 한 달은 기상이변으로 인한 폭우 때문에 침수된 집 안팎을 정돈하랴, 보수공사를 하랴, 정신 없이 보낸 공종삼 대리는 이제야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한낮의 북적대던 소음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한성은행 광화문지점 사무실은 조금 전 까지도 잔무정리를 하던 직원이 마지막으로 퇴근한 후 할 일 없이 공대리가 만들어내는 담배연기만 떠돌고 있었다. 


“공대리님 퇴근 안 하십니까? 사모님께서 만드신 된장찌개 다 식겠습니다.”


   늦은 업무 탓도 있겠지만 혼자서 안양에서 하숙을 하는 관계로 숙직근무를 도맡아서 하는 노총각인 계산주임이 숙직근무를 하면서 공대리가 마음에 걸리는지 한마디 던졌다. 


“일찍 들어가 봐야 뭘 해? 발 닦고 밥 먹고 텔레비전 보고 잠자는 게 일인데. 낙엽도 슬슬 떨어지고 마음도 싱숭생숭하니 여기 앉아서 명상이나 즐기다 가야겠어.”

“어어. 공대리님 큰 일 났군요. 저 같은 노총각도 까딱없는데 가을이라고 마음이 싱숭생숭 하시다뇨? 그거 병입니다. 언제부터 그런 증상이 나타났습니까?”


   언제부터라고 꼬집어 얘기할 수는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공대리는 산다는 것이 시들해졌다. 남자나이 30대 중반이면 자신이 소속된 직장의 핵이 되어 그야말로 몸 바쳐서 몸 바쳐서 일해야 할 나이인데도 요즘 그는 매사에 싫증을 내고 있었다. 아니 매사에 호기심이 없어진 것이다. 도무지 사는 게 재미가 없어지니 은행 일도 신명 날 게 없었다. 그렇다고 농땡이를 부리는 것은 아니다. 은행 영업점 업무가 다 그렇지만 도장 찍고 손님 접대하고 예금계수 신경 쓰고 --- 똑 같은 일상의 반복이 단조로울 뿐이었다.


   밤 9시경. 그는 삼청공원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숙직 근무자에게 눈치 뵈는 것 같아 무작정 지점을 나와서 걷다가 아무 버스나 타고 종점에서 내린 것이 삼청공원이었다. 습관이란 놀라워서 얼마 전 공원 입구에 위치한 금융연수원에서 외국어 야간 과정 교육을 받기 위해 이용하던 버스를 무심코 탄 것이다. 


   공원 오른편의 공무원 교육원에서 약수터 쪽으로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북악을 돌아 온 밤바람이 제법 냉기를 몰고 와선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옷깃을 추슬렀다. 바바리코트가 있었더라면 하고 생각했다. 


   밤의 약수터는 조용했다. 인적이 없었다. 시멘트로 만든 배수로에 앉아 그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완전한 정적 속에서 고임 터로 한 두 방울 떨어지는 약수소리만 그의 심연 깊은 곳까지 울려 퍼졌다. 그는 잠시 무상 속에 파묻혔다가 어느덧 한 여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손가락을 베었어요.)

(아니. 어쩌다가?)

(깍두기 담그는 법을 배우려고 무를 썰다가---)


   7년 전이었던가. 아니 벌써 7년이나 흘러갔는가? 토끼털처럼 포근해 보이는 하얀 베레모를 쓰고 빨간 스웨터에 청바지를 즐겨 입던 여인. 두꺼비 같은 그의 손을 펼치면 얼굴이 완전히 덮일 정도로 작고 귀여운 여인. 남성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체홉의 올랜까 같았던 여인---


   예나 지금이나 약수터는 변함없이 목마른 이의 갈증을 풀어 주는데 세월은 소리 없이 사라져 가고 없었다. 종달새같이 맑은 음성으로 체중이 41kg 밖에 나가지 않아서 걱정이며 그와 함께 배수로에 걸터앉아 밤늦도록 얘기하던 여인의 가녀린 자태는 이제 영원히 세월의 뒤안길로 흘러가 버린 것일까? 


   갑자기 인기척이 공대리의 상념을 깨웠다. 동시에 가벼운 화장품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공원의 맑은 공기 때문인지 젊은 여인의 싱싱한 체취가 자극하듯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어머. 죄송해요. 어두워서 사람이 있는지 몰랐어요.”

“아, 아닙니다. 괜, 괜찮아요.”

“밤 약수가 좋다고 해서 전 이 시간에 매일 들러요. 선생님도 밤 약수를 좋아하시나 보죠?”

“예? 아, 예. 뭐 그런 셈이지요.” 


   상현달의 어스름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훔쳐보는 순간 공대리는 숨이 막히는 듯 했다. 기막힌 미인이었다. 나사가 풀린 듯 느슨해졌던 그의 두뇌가 갑자기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잽싸게 그는 쪽박을 찾아 약수를 퍼서 그녀에게 권했다. 당연하다는 듯 그녀는 사양도 않고 쪽박을 받아 고개를 약간 돌리곤 홀짝거리며 마셨다.


“고마워요. 여기 앉아도 되나요?”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고 했겠다. 정말 진리 중의 진리란 말씀이야. 공대리는 어두운 밤에 무지개를 보는 듯 했다. 여자가 겁도 없이 한밤중 으슥한 곳에서 낯선 남자의 옆에 바싹 다가와 앉았다. 30대 중반의 남자라면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빨리 알아채야 한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이 여인은 필시 젊은 미망인이리라. 물론 이 근처 어딘가에 살겠지. 밤마다 가슴속에 타오르는 뜨거운 그 무언가의 불꽃을 식힐 수가 없어 그녀는 이 약수터를 찾는 것이리라. 


   어쩌다 전 결혼을 못했어요.(새빨간 거짓말) 약수터에서 알게 된 어느 여인의 추억 때문에--- 어머, 선생님. 그 여인은 혹시, 이 세상에 없나요?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단지 변해버렸을 뿐이지요.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 아닙니까? 아니에요. 변하지 않는 여인들도 있어요. 당신같이? 글쎄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우리 이럴게 아니라 밝은 데서 차나 한잔 합시다. 버스 종점 어귀에 조용한 카페가 있으니---네, 좋아요. 지금 몇 시죠? 이제 겨우 10시 조금 지났어요―--. (사이) --- 맥주 할 줄 아세요? 네 조금은요. 제가 한잔 사도될까요? 초면인데 부담 드리는 게 아닐까요? 괜찮습니다. 어이 아가씨 여기 오비맥주 두 병 하고 그 뭔가 멕시칸 샐러드 한 접시---. (사이)--- 끅, 취한다. 어휴. 벌써 열 병 째나 마셨나? 이 여자도 주량이 대단하군. 


   가만있자. 마누라가 친정에 가서 내일 온다고 했지. 그렇다면---흐흐, 여기 조용하고 깨끗한 여관이 어디 있더라? 이봐요. 아저씨.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세요. 아니. 아니야. 미스 민. 집이 어디라고 그랬지? 아이, 몇 번이나 말씀 드렸잖아요. 요기, 요 근처라고요. 


   요 근처가 어디지? 낙원동이요. 낙원동도 모르세요. 알지, 알아. 낙원동 어디쯤? 오진암 옆 골목--- 오진암 옆 골목? 그래, 그래. 그 유명한 요정거리! 거기도 가정집이 있나? 아이, 아저씨는--- 가정집이 어디 있어요? 전부 요정이지. 허지만 미스 민은? 정말 알고 싶으세요? 그래! 빨리! 


   ##관이요. ##관 옆 골목? 아니 ##관이래두요! ##관도 요정인데---그럼 미스 민은? 아이, 걱정 말아요. 전 오늘 비번 이예요. 외박해도 괜찮다구요! 아니, 그보다도 아저씨, 우리 집에 놀러 가시지 않으실래요? 마담 언니에게 애기해서 술값은 싸게 해 드릴게요. 


   눈썹이 휘날리도록 빠르게 여자로부터 벗어난 공대리는 자정이 넘은 시간인데도 개의치 않고 대뜸 공중전화 박스에 붙어서 아내의 친정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 웬일이세요. 이 밤중에? 저 내일 아침 일찍 들어갈게요.”

“여보. 여보. 내일이 토요일이니까 우리 삼청공원 약수터에서 데이트하자. 당신 옛날같이 하얀 베레모에 빨간 스웨터에 청바지 입고---”

“느닷없이 무슨 말씀이세요. 보기 싫다고 하루쯤 친정에 가서 자 보는 게 어떠냐고 하신 것이 누군데--- 아무튼 애 둘 낳고 몸이 불어서 처녀 때 입던 옷은 맞지도 않아요. 당신 마흔도 안 된 나이에 벌써 망령이 드셨어요? 그런다고 연애시절이 되돌아오진 않잖아요. 어서 주무셔요. 내일 집에 들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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