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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korwriter Nov 13. 2024

장미 이야기

수필산책로 (10)

장미 이야기 


   우리 꽃가게에 들여 온 지 한참 지난 붉은 장미 한 다즌(12송이)을 싸게 팔려고 내 놓았다. 그랬더니 60이 넘어 보이는 백인 할아버지가 그걸 샀다. 싱싱한 장미가 다즌(dozen)이면 꽤 비싼데 그 반의 반 값을 받겠다니 싸다는 것이다. 혹시 할아버지가 오래된 장미를 구별 못하고 사는 게 아닌가 싶어 귀띔했다. 


“Those are old. Are you O. K.?" (오래된 장미인데 괜찮으시겠어요?)

"No problem. My wife is old, too." (괜찮아. 마누라도 늙었는걸.)


   31주년 결혼기념으로 아내에게 선물하려는데 나이 60이 넘었는데도 아내는 늙었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래된 장미를 선물한다면서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 웃음에 반평생을 함께 해 온 노신사의 아내사랑이 배어 있었다.


   장미의 대표적인 꽃말은 ‘사랑’이다. 색깔에 따라 가지는 꽃말이 다르나 대체로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 붉은 색은 열정적 사랑, 노랑은 우정 어린 사랑, 흰색은 순결한 사랑, 주황은 매혹하는 사랑, 라벤다는 첫눈에 반한 사랑, 연분홍은 사랑의 기쁨과 영광, 진분홍은 사려 깊은 사랑을 표현한다. 


   그러나 사랑은 열정적이어야 하는 건지 꽃가게에서 많이 팔리는 것은 붉은 장미이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캐나다 남자들은 붉은 장미를 산다. 젊은 총각들은 대개 한 송이를 사지만 어느 정도 결혼연령에 이르렀거나 신혼의 남편들은 1, 2주년 결혼 기념일에 한 다즌 또는 두 다즌의 장미를 산다. 만만치 않은 꽃 값이라도 신혼의 아내에게는 아깝지 않은 모양이다. 


   특히 청춘 남녀간에 자연스럽게 사랑을 고백한다는 발렌타인데이(2월 14일)에는 꽃가게가 문전성시다. 한국은 초콜릿과 사탕바구니를 선물하는데 캐나다는 주로 꽃이다. 한국 젊은이들이 달콤한 먹거리를 찾는 실용파인데 비해 캐나다 젊은이들은 순간의 달콤한 감정을 간직하고 싶은 낭만파라서 그런 것 같다. 그 중에서 장미는 없어서 못 판다. 가히 장미는 사랑의 전령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꽃이 많다고 해도 장미만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오래 받아온 꽃은 없다. 기원전 2000년경에 세워진 바빌론의 궁전에도 이미 장미가 있었고 그리스의 벽화에도 장미가 있었다. 


   장미에는 많은 일화가 있다. 옛날 아도니스라는 미소년은 그리스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받고 있었는데 이를 질투한 아프로디테의 남편 헤파이스토스가 멧돼지로 변하여 사냥을 하던 아도니스를 물어 죽였다. 이때 아도니스가 죽으면서 흘린 피에서는 아네모네가 피었고, 아도니스의 눈물에서는 장미가 피었다고 한다.


   또한 아프로디테의 아들인 에로스와 장미의 유머러스한 전설도 있다. 에로스는 약간 경솔한 편이어서, 올림포스 산의 신들의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깜빡 잊고 있다가 그 생각 이 나서 허둥대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신들에게 바칠 귀중한 술을 엎질러 버렸다. 그러자 그 술이 변하여 진홍빛 장미가 되었다고 한다. 에로스는 새로 생겨난 장미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그 꽃에 키스하려 했다. 그런데 그 꽃 속에 있던 벌이 에로스의 입술을 쏘았다. 아들이 입을 다치게 되자 화가 난 아프로디테는 벌의 바늘을 잘라 장미의 줄기에 심었는데 그것이 장미의 가시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아름다운 여성에게는 남성을 취하게 하는 매력과 함께 가시가 있다. 사랑하면서도 쉽게 마음을 열지 않고 함부로 접근하면 자기방어를 하는 양이 장미가시와 같다. 대부분의 남성들이 경험했을 것이다. 아름다운 여인을 연인으로 삼거나 구혼 신청을 할 때 가시에 찔리듯 아픈 거절을 당한 적이 있었을 터이다. 단 한번의 거절에 좌절하고 다시 시도를 하지 않으면 영원히 짝사랑의 추억 속에 살아가야 하지만 정말로 사랑한다면 몇 번을 찔리면서도 도전할 일이다. 쉽게 얻어지는 사랑은 새벽 물안개처럼 허전하지만 오래 갈구하며 얻어진 사랑은 충만하다. 


   장미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지만 다른 꽃과도 잘 어울린다. 특히 안개꽃과 잘 어울린다. 작은 꽃이 한 줄기에 안개처럼 흩뿌려져 있다고 해서 안개꽃이라 했는지, 그 안개 속에 처연하게 숨어 있는 장미를 보면 안개 속처럼 알 듯 모를 듯 한 여인의 속내를 훔쳐보는 듯하다.


   장미는 봉오리 상태가 싱싱하지만 반쯤 피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사랑을 알 듯 말 듯 갓 스물 넘긴 처녀 모습이다. 활짝 피었을 때는 30, 40대 농숙한 여인의 정염을 보는 듯하다. 순진한 숫총각이라면 똑바로 쳐다보기 민망한 그런 요염한 모습이다. 시들어 갈 때는 애써 늙음을 감추려고 탄력 없는 입술에 붉은 립스틱을 한껏 바르는 50, 60대 여인네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사람들도 취향에 따라 장미를 고른다. 집에 두고 오래 보고 싶은 사람들은 대개 덜 핀 것을 찾지만 우선 당장 사랑의 고백이 절실한 남성들은 활짝 핀 것을 찾는다. 내 사랑도 이렇게 활짝 피었노라 는 표현을 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꽃이 그러하듯 장미도 시든다. 그러나 향기는 오래 남는다. 만개한 후에도 장미의 형태는 남아 있지만 어쩐지 쓸쓸한 느낌이 든다. 아직 완전히 시들기 전에 올드 로즈로 싸게 팔아 본다. 그마저 여의치 않을 때는 장미 꽃잎을 하나하나 뜯어 페틀(petal)로 쓴다. 그런데 이 페틀이 무척 인기 있다. 주말이면 없어서 못 팔 지경이다. 

   

   로즈 페틀 한 박스 만들기 위해서는 무려 20여 송이의 장미를 희생시켜야 하고 그나마 그 주일에 장미가 잘 팔리면 페틀로 사용할 꽃잎이 없으니 귀할 수밖에 없다. 로즈페틀의 쓰임새는 다양하다. 결혼식장에서 행진하는 신혼의 머리 위에 뿌리거나 각종 축하 행사의 휘날레를 장식하기 위해 뿌린다. 또한 목욕탕의 욕조 안에 뿌리거나 침대 시트 위에 뿌리기도 한다. 장미의 달콤한 향기가 심신의 피로를 해소하며, 또한 밝고 유쾌한 기분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진실로 장미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자태뿐 아니라 향기도 사랑한다. 아니 장미에서 퍼지던 그 향기를, 사랑을 고백하던 순간과 함께 기억하고 싶은 지도 모른다. 세월이 흐르고 사랑도 변하지만 순간의 추억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도 장미꽃과 같다. 봉오리 질 때가 있고 활짝 필 때가 있다. 시들어 초라해 질 때가 있고 꽃잎이 뜯겨지는 때도 있다. 삶에도 향기가 있다면 우리는 장미처럼 봉오리 질 때나 시들 때나 변함 없는 향기를 가질 일이다. 그것은 장미처럼 무엇 하나 버릴 일 없이 끝까지 내 안에 간직하다가 아낌없이 주는 사랑의 향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더 시들기 전에, 마침내 버려지기 전에, 우리들의 사랑은 바람에 얹혀 천지 사방으로 번져 가리니--- 


   반백을 넘기려 하는 아내에게 오늘 밤 나는 갓 봉오리 피우려는 장미 한 다발 선물해야겠다. 20여 년 지속되어온 사랑의 향기를 그녀와 나누어야 하겠다. 


2009년 5월 18일 밴쿠버 조선일보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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