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날씨에 따라 기분이 변한다. 맑은 날에는 기분도 맑고 흐린 날에는 기분도 흐리다. 나는 누구에게 부탁전화 할 일이 있으면 쾌청한 날에 한다. 그러면 대답도 쾌청하다. 그러나 흐린 날에 전화하면 대개 ‘생각해 보겠다’는 대답을 듣는다. 생각해 보겠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내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반드시 '아니다(No)'는 아니다. 날씨가 맑으면 뜻밖에 선선히 ‘좋습니다(Yes)'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
그래서 인생은 두고 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현재에 사는 것이기 때문에 현상에 집착한다. 비가 오고 바람은 부는 데 돈 벌 길은 보이지 않고 세월 지나면 고향생각에 한숨짓는 것이 이민자의 삶이다. 서울 친구들은 내가 선진국에서 폼 나게 살고 있다고 부러워하지만 나는 갈수록 그들이 부러워진다. 서울에는 편하게 수다 떨 친구들이 아직은 많이 있기 때문이다.
나이 들수록 그렇다. 부모님 다 돌아가시고 자식은 제 갈 길 찾아가는 초로(初老)가 되니 터놓고 이야기 할 말상대가 필요한데 이민지의 삶은 서로 바쁘고 모두가 한 다리 건너면 밥숟가락 숫자도 훤히 아는 동네 사람들이라 무슨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한다.
한국남자의 수다는 주로 ‘나 혼자 슈퍼맨’이거나 ‘나보다 더 잘난 놈 씹어대기’에 머무르는 것이 다반사다. 음악이니, 미술이니, 문학이니, 심지어는 영화이야기 꺼내도 다음부터는 모임에 끼워주지 않던 것이 한국에서의 경험이라 이민지에서는 아예 대화의 밥상에 올리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 캐나다에 와서 지인에게 내가 만난 ‘재수 없는 사람’에 대해서 몇 번 이야기 했더니 금세 그 사람 귀에 들어가서 ‘곱게 살려면 좋은 소리만 하고 지내라’는 충고로 되돌아 왔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이날 이때까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일기장에 쓰거나 시나 수필의 형태로 에둘러 표현한다.
그러나 가을이 되면 이런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 날씨가 좋아도 마음 울적해 지고, 서울 친구들과 한 시간 씩 ‘씹어대기’로 수다를 떨어도 가슴이 텅 비고 만다. 사회복지제도가 한국보다 훨씬 잘 되어 있기 때문에 환갑을 넘으면 하던 일도 슬슬 정리하고 세상구경 할 계획 세우는 것이 캐나다의 노년층이라지만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삶의 ‘유한성’에 대한 생각이 미치면 울적함은 시도 때도 없다.
무슨 방법이 있으랴. 삶의 ‘유한성’앞에서. 신이 정해준 수명에 대해서 인간이 무어라 항거할 것인가. 인간의 장생불사가 인류의 멸망을 초래한다는 당연한 지식을 터득하고 있으면서도 인생 칠십, 또는 팔구십은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먼저 간 친구들을 생각하면 선택받았다고 자조하지만 육학년(육순)의 문턱에 서니 갑자기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일이 너무 많음을 계산한다.
그래서 내가 택한 방법은 사학년(40대), 오학년(50대)의 후배들을 부러워하기보다 칠학년(70대), 팔학년(80대)의 선배보다 여유가 있다고 자조하는 것이다. 물론 올 때는 순서대로 왔으나 갈 때는 순서가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선배들보다 좀 더 가질 수 있는 시간을 내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며 살려고 한다. 그것이 울적함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이다. (2009.10.12. 코리안저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