튤립, 사랑의 고백

수필산책로 (12)

by vankorwriter

튤립, 사랑의 고백


구름 한두 점 흘러가는 한가로운 하늘. 그 아래로 고풍스러운 풍차가 돌아가고 있다. 사실은 돌아가고 있는지 멈추어 있는지 모른다. 이 모두는 그림 속 정경이니까.

그런데 풍차만 있는 그림은 무언가 빠진 듯한 느낌을 준다. 무엇일까? 유럽의 어느 시골마을 같은데.... 원근으로 그려진 것이라면 풍차는 항상 저만치 서 있고 그 아래는 무언가 넓게 펼쳐진 것이 있다. 바다? 등대가 없는데? 초원? 그럴 수 있겠지. 그러나 드넓은 초원에는 작은 통나무집이 잘 어울리지.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풍차라. 제방 위에 있군. 그렇다면 네델란드를 그린 듯한데. 가만있자. 네델란드는 화훼수출국으로 유명하지 그중에서 튤립...아아. 튤립 밭이 어울리겠구나.


초등학교 시절 사회시간에 우리는 사진 한 두장으로 세계를 배웠다. 영국은 테임즈 강과 국회의사당, 미국은 자유의 여신상, 일본은 눈 덮힌 후지산, 프랑스는 에펠탑, 이집트는 피라미드, 그리고 네델란드는 풍차와 튤립이 어우러진 사진이었다.

사람들은 튤립의 원산지가 네델란드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만큼 네델란드는 튤립 재배하는 원예업 및 화훼산업이 발달되어 있다. 이종교배를 통해 지금도 다양한 색깔의 새로운 튤립을 개발해 수출하고 있다.


튤립의 기원은 페르시아다. 페르시아의 시인 하피스 Hafis는 “아. 이 붉어진 얼굴의 튤립을 보아라. 색깔 있는 잔으로 조금씩 마시다 어느새 취했구나.” 라고 노래했다. 이 꽃을 페르시아에서는 연인에게 구혼할 때 선물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랑하는 마음이 튤립의 꽃 색처럼 타오르고, 사랑의 열병으로 인해 가슴이 검은 뿌리처럼 타고 있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빨간색 꽃은 '사랑의 고백, 노란색은 '바라볼 수 없는 사랑', 흰색은 '실연', 보라색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다.


튤립은 해바라기처럼 태양을 연모한다. 태양이 솟아오르면 봉오리를 열며 눈부신 태양빛을 한껏 받아들이지만 황혼녘에는 봉오리를 닫는다. 연인을 이별하고 돌아앉은 여인의 닫힌 마음과 같다. 냉장고에 넣어 두면 토라진 여인처럼 며칠이 지나도 봉오리를 열지 않지만 4,5월 봄날 햇볕에 내놓으면 내숭떠는 처녀 미남총각 만나듯 살포시 웃으며 꽃잎을 연다.


튤립이 페르시아에서 터키로 언제 흘러 들어간 지는 자세히 모르나 봄에 피는 이 꽃의 귀엽고 깜직한 이미지에 반해 오스만 제국의 터키 슐탄(왕)은 튤립을 제국의 심벌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터키에서는 페르시아어 이름인 “lale"로 불리어지고 있으나 오스트리아 대사가 1554년 이 꽃을 비엔나로 가져오면서 튤립이라고 명명했다. 이 대사는 생전 처음 보는 이 꽃이 터키인들이 쓰는 붉은 터어반(tulbend) 같은 꽃으로 자기 나라에 소개 했는데 이 tulbend 라는 이름이 세월이 흐르면서 튤립(tulip)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버렸다.

튤립을 네델란드에 수입한 것은 1593년 이후 학자와 상인들이었다. 당시 튤립 구근은 상당히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아예 투기바람이 불어 재배업자와 화훼상들은 다투어 튤립구근을 매점매석 하였으며 큰 돈을 벌게 되었다. 그러나 네델란드 의회가 1637년 튤립가격을 고정시키자 하늘모르고 치솟던 구근 가격은 떨어지게 되고 매점매석해 두었던 상인들은 파산지경이 속출하였다. 대학시절 경제원론 시간에 담당교수가 독과점과 정부의 가격조절정책에 대한 주제를 강의하며 “네델란드 튤립 구근 사건‘을 한 예로 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그러나 여전히 튤립은 네델란드 화훼산업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아예 풍차와 제방과 튤립은 네델란드의 상징물처럼 되어 있는 듯하다.


튤립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 한 가지 --- 유럽 어떤 작은 마을에 아름다운 처녀가 살고 있었다. 호수같이 맑은 눈에 착하고 순결한 심성을 지닌 그녀는 모든 총각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 처녀는 좋은 남자와 결혼해서 잘 살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어느 날 세 명의 젊은이가 동시에 그녀에게 청혼을 하러 왔다.

한 사람은 이 나라의 왕자였고, 두 번째는 용감한 기사, 그리고 세 번째는 돈 많은 상인의 아들이었다.

왕자가 그녀에게 말했다.


“아름다운 여인이여. 만일 당신이 나와 결혼해 준다면 장차 내가 받게 될 왕관을 그대의 머리에 얹어 주겠소. 이 나라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 될 것이요.”


그녀는 아무 말도 않고 단지 부드럽고 신비로운 미소만을 보여 주었다.

기사가 그녀에게 말했다.


“아름다운 여인이여. 만일 당신이 나와 결혼해 준다면 내 이 검을 바치겠소. 이 검으로 나는 당신에게 닥쳐올 어떤 위험, 어떤 두려움으로부터도 보호해 주겠소. 이 검은 당신의 명예가 될 것이요.”

기사에게도 그녀는 아련한 미소만을 던질 뿐이었다.

상인의 아들이 그녀에게 말했다.


“아름다운 여인이여. 만일 당신이 나와 결혼해 준다면 내 금고 속에 차고 넘치는 황금을 모두 드리겠소.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가 당신의 누릴 바가 될 것이요.”

상인의 아들에게도 역시 그녀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만 남겼을 뿐이었다.


세 젊은이는 처녀가 자기에게만 승낙의 미소를 보여 준 것으로 생각하고 서로가 그녀와 함께 할 행복한 미래를 꿈꾸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그녀로부터 아무런 확실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욕심 많은 여자 같으니라구. 세상의 권세로는 부족하단 말인가?”

“명예도 모르는 여자야. 돈 밖에 모르는 속물이야.”

“상인은 눈 밖이란 말인가. 흥. 고상한척 하기는.”


세 젊은이는 화가 나서 그녀에게 욕설을 퍼붓고 가버렸다. 너무나 기가 막혔던 처녀는 그 순간부터 병이 나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사실 처녀에게는 권세도 명예도 부귀도 다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세 젊은이 모두가 훌륭하고 모두가 좋은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단지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던져 주기를 바랐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가 가진 것은 내 사랑에 비하면 하잘 것 없는 것입니다.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은 죽는 날까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늦게야 처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세 젊은이는 함께 모여 그녀의 죽음을 위로해 주었고 진정으로 처녀가 바라는 것을 주지 못했던 그들의 무지를 후회하며 슬퍼 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꽃의 여신 플로라는 처녀의 넋을 언제나 생명 있는 튤립으로 피어나게 했다. 꽃송이는 왕관, 잎은 검과 같고, 구근은 황금빛 - 검은 표면을 한 꺼풀 벗기면 이 색깔이다 - 을 가진 아주 귀엽고 아름다운 꽃으로 ---


튤립의 전설을 들으며 세상의 아내들을 생각한다. 그네들의 꿈 많고 청순하던 처녀시절을 상상해 본다. 모두가 백마 타고 올 잘 생기고 멋진 왕자를 기다리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였을 것이다. 그러나 성장하여 평생의 짝을 찾아야 할 때 그네들은 더 이상 환상에 잠긴 처녀들이 아니었다. 그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일까? 나는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것만 확인할 수 있다면 왕자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그가 나를 사랑하니까. 세상 끝날 까지 나만을 사랑해 줄 테니까. 그리고 다른 조건들은 필요 없었다.


그러나 왜 그런지 세월이 흘러 처녀가 딸 가진 어머니가 되면 예전의 기억은 잊어버린다. 그리고 결혼을 앞둔 그네들의 공주에게 충고한다.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란다. 눈에 콩깍지 씌어 결혼하면 평생을 망친다. 여유롭게 살게 되면 없던 정도 생기지만 쪼들리며 살면 있던 정도 달아난다. 잘 생각해라. 엄마 꼴 당하지 말고 집안 배경도 보고 사회적 신분과 경제적 조건도 두 눈 크게 뜨고 살펴야 한다.


그러면 그네들의 딸들은 예전에 그네들이 그러했듯이 엄마에게 외친다. 엄마. 그이가 절 사랑한다고 고백했어요. 저도 그이를 사랑하고요. 그 사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학으로 공부했어요. 이제 겨우 중소기업체 말단 사원으로 채용되었고 돈도 없어요. 하지만 전 그 사람과 결혼할 거예요. 백화점 진열대에 화려하게 장식된 고가상품 고르듯 그런 선택 하고 싶지 않아요. 비록 가판대 위에 놓인 볼품없고 조잡한 장신구라도 제가 좋아해서 선택했다면 평생 저와 함께 할 거예요. 엄마도 그렇게 아빠와 결혼하셨잖아요. 사랑한다는 아빠의 고백 하나만으로 행복하셨잖아요.


우리 집 주변 낡은 이층 목조집 앞마당에 튤립이 심겨져 있어 금년 봄 그 집 앞을 지나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빨강, 하양, 노랑, 분홍색들이 다툼이라도 하듯 자태를 겨누었다. 이른 봄부터 수줍게 움트기 시작하여 5월에 절정을 이루더니 6월 초입에 하나 둘씩 고개를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금빛 구근은 다시 피어날 새로운 내일을 기다리며 땅속에서 쉬고 있을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삶이란 늘상 피었다 졌다 하는 나날의 연속이 아닌가.

어제 있었던 것들은 오늘 사라지고 오늘 존재하는 것은 내일도 존재하리라 보장될 수 없다. 권세도 명예도 부귀도 바람처럼 사라진다. 그러나 우리의 조상이 살았고 우리가 살고 있고 후손이 살게 될 이 땅은 당분간 영속되어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땅 위에는 모든 꽃들이 자라날 것이다. 그리고 그 꽃들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하리라. 꽃들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그리고 튤립- 조금씩 살짝 마셔 취해진 얼굴로 여전히 속삭이리라. 저를 보세요. 아무 것도 필요 없답니다. 사라질 것들이 무에 대수겠어요. 당신 나를 사랑 하시나요? 말해 주세요. 어둠이 몰려 와 내 봉우리를 닫기 전에 고백해 주세요. 저에 대한 사랑만이 이 세상에서 당신을 지탱하게 하는 유일한 이유라고요. 그러면 당신의 고백은 태양이 되어 제 마음을 활짝 열게 될 거예요. 그리고 저는 믿을 수 있어요. 우리 사는 이곳은 비가 오고 바람불고 천둥번개 몰아치는 험한 세상이지만 당신의 사랑이 항상 함께 하고 있다면 내 마음은 언제나 밝고 환하게 피어난다는 것을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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