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받지 못한 자 (Unforgiven 1993)
개요 서부 미국 131분
개봉 1993년 03월 13일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Clint Eastwood
1. Opening 오프닝
-땅을 파는 자, 땅에 묻힌 것들
이 영화는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석양이 지는 저녁, 집 앞 나무아래 말없이 땅을 파는 사내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 사내는 무슨 비밀을 파묻고 있는 것일까? 천천히 타이틀 제목 뜨고 자막은 아주 짧은 문장으로 윌리엄 머니라는 남자의 과거를 불러낸다.
그녀는 예쁘고 어린 아가씨였다.
그녀의 결혼은 엄마에게는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었다. 그녀의 남편 윌리엄 머니는 잘 알려진 강도였고 폭음까지 일삼는 자였다. 그녀가 죽었을 때 어머니는 그를 의심했지만 그녀를 죽인 것은 천연두였다.
그것은 1878년도의 일이었다.
이 오프닝은 앞으로의 비극을 알리는 전주곡 역할을 하며 동시에 주인공 윌리엄 머니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야기시킨다. 그는 정말 날강도에 자신의 아내까지 무참히 살해한 악인일까? 아님 그것은 단지 부풀러 진 소문일 뿐일까?
2. 사건의 시작
-피 흘리는 얼굴, 무표정한 법
장면은 비로 젖은 밤으로 옮겨간다.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사창가 골목을 스친다. 창밖으로는 천둥이, 실내에는 비명이, 그리고 그 안에서 남자의 칼날이 여인의 살을 찢는다. 웬 망나니 같은 손님이 자신의 물건을 보고 비웃었다며 칼을 휘둘러 여자의 얼굴과 가슴에 심한 상처를 낸 것이다. 핏자국은 천장까지 튀었고 울음은 비명으로, 비명은 곧 침묵으로 사라진다. 그녀는 살아남았으나 그녀의 존엄은 그날 함께 도려졌다. 범인은 곧 붙잡혔지만 마을 보안관은 마치 가축이라도 다친 양 벌금형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정의는 실종되었고 제도는 침묵했다.
그 침묵의 틈에서 분노가 자랐다. 그 분노의 이름은 창녀들의 리더 격인 스트로베리. 몸을 팔아 살아온 여자들이 모은 돈, 그것은 복수를 위한 피의 예산서였다. 그들은 현상금을 걸었고 누군가 이 피값을 짊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먼지와 시간 속에 파묻혀 살던 사내를 누군가가 찾아온다. 어리지만 당찬 총잡이, ‘스코필드 키드’. 그는 영웅을 꿈꾼다. 하지만 자신이 찾아온 이 남자, 윌리엄 머니는 영웅도 아니고 전설도 아니며 단지 지난 죄의 무게에 허리를 굽힌 채 아이들과 함께 돼지에게 먹이를 주며 살아가는 이름 없는 자였다.
3. 다 옛날이야기
과거는 잊히지 않는다. 그저 눌려 있을 뿐. 어둑한 황혼이 내려앉은 어느 들판, 윌리엄 머니는 다시금 먼 길을 떠난다. 흙먼지 이는 바람 속으로 사라졌던 과거가 그의 뒷덜미를 잡아채는 듯하다. 그가 찾아간 이는 옛 동료 네드. 한때 함께 죽음을 건너고 피 말리는 현장을 공유했던 친구였다. 마치 고해성사라도 하듯 옛이야기를 털어놓는 그. 그러자 네드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한다.
다 잊어버리게, 윌. 다 옛날이야기야.
하지만 윌리엄 머니는 안다. 그 말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어떤 기억은 잊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어느 순간 흙먼지처럼 되살아나 숨 쉴 틈조차 주지 않고 가슴을 짓누른다. 그는 더 이상 술도 마시지 않고 아내 덕분에 폭력도 멈췄다. 아내는 그에게 단 하나의 구원이었지만
그 구원은 천연두라는 이름의 비극 속에 조용히 사라졌다.
오직 어린 두 아이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는 아이들을 위해 다시 총을 들었다. 이건 정의의 여정도 아니고 복수의 불꽃도 아니다. 이건 ‘생존’이라는 이름 아래 늙고 병든 죄인이 택한 마지막 길이다.
여기에 관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는 정의에 관한 것도 아니고 단순한 복수극도 아닙니다. 이 영화는 그 어떤 변명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 자신도 윌리엄 머니도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였어요.
— Empire Magazine, 2003년 인터뷰 중
4. 가짜 영웅담
마을 보안관실 리틀 빌의 서늘한 시선 아래 두 남자가 끌려온다. 한 명은 영국출신의 자만에 찬 현상금 사냥꾼 ‘잉글리시 밥’, 다른 한 명은 그의 전기를 쓰겠다며 따라다니는 작가 보챔프. 리틀 빌은 그들을 향해 무표정하게 말한다.
그 책 좀 봅시다.
보챔프가 쓴 밥의 무용담. 영웅적인 사냥꾼의 손끝에서 죄인들이 쓰러지고 정의가 승리하는 이야기. 그러나 리틀 빌은 웃는다. 그 얄팍한 활자에 낀 허영과 환상에 조소를 날린다. 그리고 말한다.
나는 그 현장에 있었소.
진실은 다르다. 그들이 신화처럼 떠받든 그 장면에는
비열함, 겁, 우연, 그리고 지질한 죽음만이 있었다. 영웅이란 건, 누군가의 기억이 부풀린 거품일 뿐이고
그 기억은 늘 자신에게 유리하게 편집된다는 것. 사실은 늘 더 더럽고, 우스꽝스러우며 그저 기회와 운에 따라 생과 사가 뒤엉킬 뿐이라는 것. 보챔프는 혼란스러워하지만 여전히 ‘글’을 포기하지 않는다. 밥이 패배의 걸음으로 쓸쓸히 퇴장한 뒤 그는 이번엔 리틀 빌의 전기를 쓰기로 결심한다. 그의 눈엔 또 하나의 영웅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곧 그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그가 목격할 것은 고결한 의지나 드높은 이상이 아니라 잔인하게 패악을 휘두르는 권력의 민낯이라는 것을.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늘 영웅을 원해요. 실제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죠. 신화는 진실을 왜곡해서라도 계속 만들어져요. 이 영화는 그런 신화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예요.
— AFI Archives, 1995년 특별 인터뷰 중
이 영화는 말한다. 영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존재하는 건 그저 ‘영웅이길 바랐던 자’ 혹은 ‘영웅처럼 보이길 원했던 자’ 그리고 ‘그 이야기를 믿고 싶어 한 자들’뿐이라고. 그래서 <용서받지 못한 자>는 서부극이면서
서부극을 해체하는 자학의 서사다. 한 발 한 발, 진실은 허상을 찢고 피로 묻어 있는 땅 위에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5. 초짜와 베테랑
어떤 침묵은 총보다 무겁다. 어린 키드는 자꾸만 소란을 떤다. 허공에 힘을 주고 존재를 부풀려본다. 낡은 총집에 손을 얹으며 이따금 네드와 윌리엄을 슬쩍슬쩍 떠본다.
입술 끝엔 늘 무용담이 맴돈다. 자신은 다섯이나 죽여봤다고. 하지만 그 눈빛엔 아직 총알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애송이의 불안이 스며 있다. 그는 윌리엄의 전설 같은 과거를 기웃거리고 그 전설이 허풍이 아니라는 걸 확인받고 싶어 한다. 마치 그게 자신의 미래라도 되는 양. 하지만 윌리엄 머니는 말이 없다. 그는 전설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과거의 더러운 일’이라 부르며 피한다. 네드 역시, 키드의 시끄러운 과시에
단 한 번도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여기엔 말보다 깊은 침묵이 있다. 그리고 그 침묵이야말로, 진짜 전쟁의 잔재다.
초짜는 늘 떠벌리며 자신을 증명하려 하고 베테랑은 고요 속에서 실패와 후회의 냄새를 맡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영화를 통해 “영웅이란 존재가 사실은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과연 영웅이란 어떤 사람인가요?
살인을 많이 한 사람? 총을 잘 쏘는 사람?
저는 그런 허상을 걷어내고 싶었습니다.
진짜 무게는 ‘그 일을 해본 사람’에게만 남죠.
— The New York Times, 1992년 8월 2일 자 인터뷰
윌리엄과 네드는 키드가 그리는 허상의 전장을 이미 걸어온 이들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성공이 아니다. 총알이 어디로 날아들지 모르는 혼돈 속에서도 무언가를 놓치지 않는 냉철한 감각, ‘돌이킬 수 없음’의 무게를 아는 자의 신중함이다. 그런 면에서 윌리엄은 싸우는 자가 아니라 끝내 ‘도망치지 않는 자’다. 베테랑의 위대함은 결코
많이 이긴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많이 져 본 사람만이
진짜 싸움의 의미를 안다. 이 셋의 운명은 결국 ‘무엇을 감당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입으로는 백 번 말할 수 있지만 방아쇠를 당기고 난 다음의 비극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이는 몇이나 될까?
6. 운명
피로 물든 회한은 어디로 가는가? 결정적인 순간, 네드는 멈춘다. 말없이 고개를 젓고 조용히 말을 돌린다. 누군가는 그를 겁쟁이라 부를 수도 있겠지만 실상 그것은 죽음이 남긴 그림자를 너무도 많이 마주한 자만이 알 수 있는 감각이다. 네드는 이번엔 안다. 그 지점을 넘어서는 순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더 이상 누군가를 쏘고 난 뒤의 침묵 속에 자신을 가두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윌리엄은 그를 향해 조용히 말한다.
그래도 네 몫은 챙겨놓지.
그 말엔 원망도 실망도 없다. 그는 안다. 때로 가장 용기 있는 선택은 총을 겨누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조용히 등지는 일임을. 하지만 세상은 쉬이 돌아섬을 허락지 않는다. 한 번 발을 들이면 이제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속이며 끝내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선다. 비극은 그렇게 시작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지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변화’를 다룬 영화지만 동시에 인간이 얼마나 쉽게 옛 본성으로 돌아가는지도 말하고 싶었어요. 우리는 고통을 통해 성장한다고 믿지만 때때로 고통은 또 다른 폭력의 이유가 되기도 하죠.
— Sight & Sound Magazine, 1992년 10월호 인터뷰 중
네드는 발을 거뒀지만 그가 피하려 했던 비극은 끝내 그를 덮친다.
살인을 저지르면 이 꼴이 난다.
그는 무참히 전시되고 윌리엄은 또 한 번 그 죽음의 책임을 짊어진다. 이 영화는 카우보이 영화의 낭만적인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속엔 비겁하게 살아가는 자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결코 과거의 죄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한 남자의 비극이 녹아 있다.
마지막 장면, 윌리엄은 또다시 그 나무 아래에 선다. 그가 두 손으로 아내를 묻은 바로 그 땅. 이제 남은 것은 피로 얼룩진 두 손과 지켜야 할 어린아이들 뿐이다. 다시 석양이 지고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몇 년 뒤 어머니 안소니아 페더스는 그녀의 딸이 쉬고 있는 하지맨 카운티로 갔으나 윌리엄 머니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과연 사라진 것일까? 혹은 끝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채 어딘가를 떠도는 유령이 된 것일까?
7. Style
사라지듯 남아 있는 것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출에는 묵직한 침묵이 흐른다. 그 침묵은 단지 대사가 없어서가 아니라 인물들의 과거와 고통, 회한과 공허가 단어보다 무겁게 스크린 위에 내려앉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보다 시간을 믿는 감독이다. 누군가의 얼굴이 침묵 속에서 변화하는 그 찰나를 오래 지켜본다. 카메라는 쉬이 움직이지 않고 인물의 얼굴을 떠나지 않으며 그들이 선택을 내리는 그 1초 앞의 떨림까지 놓치지 않으려 한다.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는 바로 그 ‘묵시적 미장센’이 힘을 발휘한다. 거센 음악이나 과장된 대사 없이 바람 소리, 말발굽 소리 그리고 누군가 입술을 깨무는 소리로 장면이 이어진다. 이스트우드는 스스로를 ‘고전주의자’라 부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고전주의는 단지 형식의 차용이 아니라 도덕이 붕괴된 세계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윤리적 질문을 끌어올리는 장치다. 그는 말한다.
모든 장르는 결국 인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총싸움은 소리일 뿐이고, 진짜 울림은 침묵에서 옵니다.
— The Guardian, 2008년 1월 인터뷰 중
<용서받지 못한 자>의 스타일은 철저히 인물 중심이다.
카우보이의 전설을 해체하면서도 그 전설 속에 있던 인간의 상처와 허기를 가장 깊숙이 응시한다. 피가 튀는 장면조차 절제되며 마지막 복수의 총격조차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그건 숙연한 장례식처럼 묘사된다. 누구도 승자가 아니다.
달빛이 지고 석양이 물들면 이야기는 끝나지만 윌리엄 머니의 그림자는 우리 안에 조용히 남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총보다 침묵이 복수보다 회한이 오래 남는 영화를 만들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세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