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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알았던 영화 열두 번째!

작은 아씨들 Little Women 1994 vs 2019

by 달빛바람



1. Opening 오프닝 비교

1994년 <작은 아씨들>의 오프닝은 유년의 기억처럼 포근하고도 어딘가 애잔하다. 매사추세츠 주 작은 시골 마을 콩코드. 소복하게 눈이 덮인 크리스마스이브,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녘의 푸르스르함은 어쩐지 쓸쓸한 기운을 전한다. 그리고 둘째 딸 조의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 기억에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춥고 가난했었다.

이 한 줄의 회고는 단순한 과거의 설명이 아니다. 그것은 한 시절의 촉감이며 그 시절을 통과한 여성들이 남긴 문장의 첫머리이다. 질리언 암스트롱 Gillian Armstrong 감독은 이 오프닝으로 시간의 직선 위에 따뜻한 원형의 감정을 새겨 넣는다. 영화는 원작 소설의 흐름을 충실히 따르되 그 안에 있는 시대의 기품과 여백, 그리고 말간 소녀들의 숨결을 극도로 정제된 방식으로 스크린에 불어넣는다. 인물들의 말투는 마치 오래된 편지처럼 품격 있고 의상과 세트는 한 편의 수채화처럼 부드럽다. 조의 목소리는 단순한 해설이 아니라 그 시절을 함께 건너간 이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연대의 시처럼 들린다.

반면, 그레타 거윅 Greta Gerwig 감독의 2019년 <작은 아씨들>은 시간을 향해 정면으로 맞서는 조의 등 뒤에서 시작된다. 뉴욕의 출판사 앞, 문을 열기 직전의 숨 고르기. 그 순간 조는 누군가의 딸이나 자매가 아닌 한 명의 작가로 존재한다. 이 오프닝은 더 이상 소녀들의 시절을 기억하는 과거형의 서사가 아니라 스스로의 이야기를 지금, 여기에서 다시 써 내려가는 여성의 현재형 시선이다. 감독은 플래시 백 구조를 통해 시간의 선형을 해체하며 이야기의 핵심을 조의 성장으로 집중시킨다.

두 영화의 첫 장면은 마치 두 개의 서로 다른 심장박동처럼 각각의 리듬을 가지고 출발한다. 질리언 암스트롱 감독의 오프닝이 눈 내리는 시골 마을 속 서정적인 가족들의 풍경화라면 그레타 거윅 감독의 시작은 활자와 종이, 열망과 불안이 뒤섞인 창작의 순간이다. 전자가 회상과 감상이라면 후자는 선택과 도전이다. 이러한 차이는 단지 연출 방식의 차이를 넘어서 여성 서사에 접근하는 감독의 시대적 감각과 정체성의 차이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그레타 거윅 감독<작은 아씨들>을 다시 쓰는 것이 곧 여성의 서사를 다시 구성하는 작업임을 정확히 인식한다. 그래서 그녀는 이야기의 시작을 출판이라는 행위에서 연다. 그리고 그것이 허구이든 실화이든 '그들의 이야기를 누가 쓸 것인가'라는 질문을 날카롭게 던진다. 반면 질리언 암스트롱 감독은 여성 서사의 내부로 깊숙이 파고들되 그 안에서 어떻게 감정과 품위가 조화롭게 흐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는 기억의 영롱함으로 다른 하나는 문장의 힘으로 이야기를 연다.

결국 두 감독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진다. 질리언 감독은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묻고, 그레타 감독은 ‘어떻게 다시 쓸 것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의 방향이 곧 영화의 출발점이 된다. 눈 내리는 시골마을의 집이든 뉴욕 출판사의 무거운 문 앞이든 그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각기 다른 시간의 문을 열고 세상에 첫걸음을 내디딘다.



2. 아빠의 편지 vs 조의 소설

질리언 암스트롱 감독의 <작은 아씨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다섯 모녀가 하나의 숨결처럼 맞닿아 아버지의 편지를 읽는 장면이다. 마치 조각상처럼 포개진 딸들의 어깨와 팔, 숨죽인 시선들 사이로 흐르는 목소리는 막내 에이미의 앳된 떨림을 담고 있다. 첫째 메그는 엄마의 어깨에 조용히 기대어 사랑과 신뢰의 마음으로 아버지의 부재를 견딘다. 그리움은 그들을 더 단단하게 엮어주고, 그 빈자리마저도 어떤 따스함으로 가득 찬다. 그 공간 안에서 아버지는 실체가 아닌 하나의 정신적 존재로 기능한다. 그리고 가난하고 헐벗은 일상 속에서도 가족은 가장 값진 자산으로 여겨지며 어머니는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한다. 이 장면은 명백히 가족의 서사이다. 가족의 품에서 성장하고 사랑받으며 인생의 올바른 방향을 배워가는 아이들의 이야기. 청교도적 도덕과 절제, 이타심과 희생은 이 영화가 품고 있는 보석처럼 다듬어진 미덕이다. 19세기의 숨결을 충실히 재현한 질리언 암스트롱 감독의 연출은 시간 속에서 조금은 낡고 빛바랜 세계를 향해 여전히 '이것이 아름답지 않으냐'라고 묻는다. 그리고 그 물음은 감동으로 돌아온다. 시대를 초월한 따뜻함이 바로 그 힘이다.

그러나 그레타 거윅 감독은 이 익숙한 이야기 속에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진다. 같은 인물, 같은 서사임에도 출발점부터 완전히 다르다. 영화는 가족의 따뜻한 품이 아니라 세상 한복판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조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뉴욕, 출판사 문 앞에 선 조. 그 문은 단순한 직장이 아니라 남성 중심의 질서가 견고하게 지배하는 세계의 상징처럼 보인다. 94년 작품에서는 생계를 위해 대중적인 장르 소설을 쓰는 것으로 그려졌지만 최근 작에서는 서툴지만 분명한 의지를 담아 여성의 이야기를 쓰는 작가 지망생으로 조를 새롭게 설정한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자신의 목소리를 어떻게 낼지 모르는 미숙한 작가 지망생일 뿐이다. 자신의 글이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출판이 어려울까 두려워 친구의 작품이라 둘러대고 터무니없이 낮은 원고료 제안에도 별다른 항의조차 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설교가 아니라 즐거움을 원하죠. 요즘 세상에 도덕은 안 팔려요....... 주인공이 여자면 끝엔 꼭 결혼시키고 아니면 죽이든가.

출판사 사장의 이 말은 오래된 고정관념과 여성 서사에 대한 폭력을 축약해 보여준다. 가정을 꿈꾸거나, 남성의 사랑을 받지 않는 여성은 행복할 수 없다는 암묵의 규칙. 그레타 거윅 감독은 이 현실을 조용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조를 통해 '이 모든 걸 바꾸고 싶다'라고 외친다. 그 외침은 바로 영화 전체의 주제이며 21세기판 <작은 아씨들>이 말하고자 하는 중심이 된다. 그리고 이 변화는 상징적으로 ‘편지’와 ‘소설’이라는 두 텍스트의 차이에서 두드러진다. 1994년의 편지는 누군가로부터 받은 사랑의 증표이며 공동체의 연결고리였다. 하지만 2019년의 조는 자신의 언어로 세상에 말을 걸기 시작한다. 그것은 더 이상 아버지의 말이 아닌, 자신의 말, 자신의 문장, 자신의 결말이다. 그리고 이 결말은 결혼이나 죽음이 아닌 자기 서사의 완성으로 향한다.

결국 질리언 암스트롱 감독의 <작은 아씨들>은 함께 자라나는 성장의 이야기를, 그레타 거윅 감독의 <작은 아씨들>은 나로서 살아가는 여성의 주체적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조의 펜은 이제 누군가의 허락을 구하지 않는다. 가족 안에서의 따스한 사랑이 어느덧 세상 밖으로 나아가 싸우는 여성의 목소리로 바뀌는 이 변주는 시대가 바뀌었음을 그리고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음을 조용히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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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바람입니다. 작은 극장을 품은 마음으로 영화와 일상의 자잘한 조각들을 주워 담습니다. 줄거리보다는 스크린 너머에 잠든 숨소리 같은 것들을 조심스레 건져 올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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