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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처럼 여름처럼 영화처럼 열아홉 번째!

소년, 소녀 그리고 ⛱️

by 달빛바람

개요 멜로/로맨스 일본 118분
개봉 2014년 10월 9일
감독 가와세 나오미 河瀬直美


1. Opening 오프닝

이 영화는 일본 규슈 남부 아마미오섬(奄美大島) 작은 마을에서 시작한다. 때는 8월, 한창 태풍이 몰려오는 시기. 파도는 불길한 기운을 내뿜기라도 하듯 하얀 포말을 이빨처럼 내보이며 높이 치솟는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죽음의 이미지. 그리고 전통 축제. 아마미오섬의 전통 축제와 그 속에 깃든 무속적 신앙, 그리고 이를 감싸는 자연의 거대한 숨결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영적 리듬을 만든다. 죽음은 문득 다가오지만 그 또한 삶의 일부이며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바다를 바라보는 각자의 눈빛 속에 담긴다. 이 영화의 시작은 이렇듯 생과 사, 바람과 파도, 인간과 자연이 부딪히며 만들어낸 무의식의 예감으로 가득하다. 가와세 나오미 감독은 전작들에서 그러했듯 이번에도 자연과 인간, 삶과 죽음, 시간과 정지라는 거울을 마주 세운다. 그리고 이 극적인 병치 속에서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붙잡을 수 없는 무언가 가령 정념, 기운, 혹은 영혼 같은 것들을 고요하게 길어 올린다.

보름달이 만조를 부추긴 밤, 하늘은 무심히 빛나고 바다는 밀물처럼 어둠을 삼킨다. 그 어둠 속에 하얗게 불어난 시체 하나가 천천히 떠오른다. 그것은 비극의 예고이자 탄생의 은유이며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의 침묵처럼 영화의 첫 장면을 장악한다. 파도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여전히 넘실대고 고요한 절망을 곁에 두고도 일상은 흘러간다.

이윽고 주인공 소년과 소녀가 등장한다. 소녀는 지난밤 소년을 기다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를 기다렸다. 하지만 소년은 오지 않았다.


2. 카이토

이 영화의 주인공인 카이토는 말이 없고 무뚝뚝한 소년이다. 엄마와 단둘이서 사는 그는 일 때문에 바쁜 엄마가 서운해서인지 아님 원래 말이 없는 건지 항상 단답형의 짧은 대답이거나 침묵뿐이다. 어쩌면 그는 세상의 소음 속에서 자신을 지우는 방법을 너무 일찍 배워버린 아이일지 모른다.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는 그의 일상은 고요하게 굳게 닫혀 있고 일과 가정, 바쁘게 살아가는 어머니의 일상을 그는 감정이 아니라 무표정으로 덮는다. 그의 유일한 말상대이자 동네 친구는 같은 학교 친구인 쿄코이다. 그녀를 만날 때면 어둡고 그늘진 그의 표정에 한줄기 빛이 지나는 걸 관객은 쉽게 눈치챌 수 있다. 헝클어진 머리와 어딘가 우수 어린 눈빛은 그가 깊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는 걸 예상케 한다. 그는 항상 쿄코를 배려하며 걱정한다. 자전거 뒷자리에 쿄코를 태우고 달릴 때 여름 햇살을 가득 받은 나무와 풀, 바다의 윤곽이 어깨너머로 흔들린다. 뜨거운 햇살 속 초록과 바다는 그 자체로 생명의 두근거림을 느끼게 한다. 비록 비극의 그림자가 질 지라도.

이때 카이토를 연기한 배우 무라카미 니지로(村上虹郎)는 극 중 카이토의 아빠 역할을 맡은 배우 무라카미 준(村上淳)의 친 아들로 당시 연기를 배운 적도, 해본 적도 없는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가와세 나오미 감독은 이 소년에게서 가르칠 수 없는 진짜의 얼굴을 보았고 카메라 앞에 세우기로 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우리는 다듬어지지 않았기에 더 진실한 감정의 파편들을 그를 통해 목격하게 된다. 감독은 그에 대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촬영 중 어떤 장면에서는 감정이 어지러워져 대사를 완전히 잊어버린 적도 있다. 오히려 그때 동작과 표정으로 진심이 나왔다.
— 출처: 村上虹郎 인터뷰, シネマトゥデイ (Cinematoday), 2014년 7월 25일

그의 연기는 정제되지 않았기에 오히려 진실하다. 이는 배우의 연기라기보다 영화라는 거울 앞에서 자연스레 쏟아진 어떤 삶의 단면처럼 다가온다. 훈련되지 않았기에 되려 그 사춘기 소년의 내밀한 혼란과 상처는 날것의 감정으로 스크린 위에 떠오른다.

카이토는 파도처럼 예측할 수 없고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솔직하지 않다. 그러나 그런 그의 존재는 작품 속에서 유일한 진실처럼 기능한다. 그는 상처를 감추는 방식으로 어른인 척하고 말이 아니라 침묵과 몸짓으로 감정을 표현한다. 그것은 인간이 가장 연약할 때 취하는 방어이자 동시에 가장 단순한 고백이다. 이 영화 속 카이토는 그런 소년이다. 바다보다 깊은 눈을 갖고 있지만 누구보다 쉽게 표류하는 그 자신이 여름의 그림자이자 비밀인 듯한 한 사람.


3. 쿄코

쿄코는 감정에 솔직하고 서슴없이 바다에 뛰어드는 영락없는 섬처녀이다. 까무잡잡한 건강한 피부색과 커다란 눈망울은 그녀를 싱그럽고 활기 넘치는 여고생처럼 보이게 한다. 허나 그녀에게도 그늘이 있다. 그녀는 아빠가 만들어준 파스타를 먹다 문득 묻는다.

아빠! 엄마는 죽는 거야?

아빠는 애써 무덤덤하게 답한다.

그렇겠지. 의사가 죽는다고 했잖아.

쿄코는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기엔 아직 너무 어리고 이 알 수 없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다. 그녀의 엄마는 신을 모시는 무녀였다. 그래서 그런지 죽음 앞에 평온하고 딸 앞에서도 때가 온 것 같다고 말해준다. 쿄코는 마음속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엄마가 기도하던 사당에 들린다. 큰 무녀와 쿄코와의 대화는 이 영화의 큰 테마이자 죽음에 대한 감독의 태도를 보여준다.

난 엄마의 괴로움을 몰라요. 죽으면 만날 수도 없고 온기도 느낄 수 없잖아요.

- 몸의 온기는 없더라도 마음의 온기가 있지.

그걸론 부족해요.

누구나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엄마가 지금 죽음의 문턱에 있다는 것. 슬픔에 앞서는 분노와 원망. 왜 하필 엄마에게. 왜 하필 이렇게 일찍. 나보다 당사자의 아픔과 고통이 클 거라는 걸 알지만 그것은 상상일 뿐. 타인의 고통은 나의 신체로 전이되지 않는다.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점점 야위어가는 엄마의 신체와 입에서 나는 독한 약 냄새뿐이다.

그러나 쿄코는 조금씩 죽음에 대해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해 나간다. 동네 할아버지가 흰 염소를 매달아 피를 낼 때 그녀는 카이토처럼 얼굴을 돌리지 않고 죽어가는 염소를 끝까지 응시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영혼이 빠져나갔어.

이 말은 그녀가 단지 죽음을 목격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흔적을 체험한 깊은 직감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녀는 이 세상의 생명들이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본다. 그리고 죽음이란 단순히 끝이 아니라 영혼이 빠져나가 몸이 비워지는 변화라는 걸 체감한다. 바다의 조류처럼 죽음도 생의 순환 안에 있다는 것을 그녀는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이렇게 섬 처녀 쿄코는 바다와 죽음을 통과하며 어른이 된다. 단단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섬세해지는 방식으로.

이때 쿄코를 연기한 아베 준코(阿部純子)는 마치 현지에서 섭외한 듯한 자연스럽고 꾸밈없는 매력과 깊은 슬픔을 머금은 조숙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특히 그녀가 바닷속에서 교복을 입은 채 유영하는 장면은 생의 에너지로 가득한 싱싱함을 느끼게 해 준다. 이때 그녀는 겨우 데뷔 4년 차였으며 촬영당시 만 19세였다.

쿄코의 성장은 누군가의 죽음을 바탕으로 일어난다. 그것이 얼마나 가혹하고 고요한 일인지 우리는 그녀의 몸짓을 통해 본다. 그렇게 가와세 나오미 감독은 쿄코를 통해 묻는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남겨진 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배우 아베 준코는 실제로 영화가 촬영된 섬, 아마미에서의 시간을 두고

섬이 자아내는 무수한 생명의 소곤거림, 내가 경험한 이 아름다운 감각들이 관객에게도 전달되었으면 한다. <텐아시아, 2014.09.23>

고 말했다. 그녀는 단순히 한 캐릭터를 연기한 것이 아니라 죽음과 사랑의 감각을 몸으로 기억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관객에게도 전해진다.


3. 죽음과 섹스

쿄코의 엄마는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 안엔 흐느낌과 비명이 아닌 노래와 춤이 함께한다. 감독은 불가해한 죽음이 아닌 자연의 섭리로서 죽음을 보여주고 싶은 듯 보인다. 노래하듯, 춤을 추 듯, 바람이 불 듯, 파도가 치듯, 꽃이 피듯, 나뭇잎이 지듯. 그렇게 한 생은 '행복해. 고마워'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이 영화는 감독이 앞 서 연출한 <너를 보내는 숲>의 연장선 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전작이 남은 이들을 위한 자연의 치유와 애가(哀歌)였다면, 이 영화는 불가피하게 떠나는 자들을 위한 응시와 위무로 보인다. 이때 자연은 생의 에너지와 죽음의 그림자를 품고 인간에게 너그러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안겨준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밀려드는 순간처럼 생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오고 예고 없이 스러진다. 쿄코의 엄마는 신을 섬기는 무녀로서 이미 자신의 죽음을 생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죽음을 향한 그녀의 태도는 마치 꽃이 피고 지는 자연의 윤회처럼 담담하다. 그렇기에 쿄코는 이 알 수 없는 상실의 파도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그 안에서 살아 있다는 감각을 더욱 뾰족하게 느낀다. 그래서 쿄코는 죽음의 문턱에 선 엄마의 말을 들은 날, 카이토에게 키스를 한다. 이것은 단지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려는 시도가 아니다. 죽음은 두려움과 동시에 생의 박동을 실감하게 한다. 그렇기에 내 안의 꿈틀대는 욕구와 자연스러운 욕망에 솔직해지는 것이다. 마치 실컷 울고 난 뒤의 허기처럼. 그래서 쿄코는 엄마가 떠나고 난 뒤 카이토와 섹스를 하고 싶어 한다. 그녀의 고백은 햇살처럼 곧고 투명하다.

카이토.

-응?"

섹스하자.

-못 해.

쿄코의 마음속 분노와 소용돌이는 가라앉았지만 카이토의 마음속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쿄코도 짐작하고 있는 그것. 앞서 나왔던 사건과 그의 마음속 괴로움은 분명 이어져 있다.

그리고 섹스는 이 영화에서 단지 육체적인 결합이 아니다. 쿄코에게 그것은 엄마의 온기가 꺼져가던 그 순간에도 자기 안에 여전히 피가 돌고 있음을 증명하고 싶은 몸짓이다. 눈을 감고 서로를 마주한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것은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사라지기 전까지 살아내고 싶다는 본능적 맥박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삶을 탐하는 방식이자 떠나는 자를 보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죽음을 견디는 유일한 언어일지 모르니까.


4. 고백과 각오

어떤 고백은 태풍처럼 몰아치고 지나간다. 마음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두려움과 분노, 원망이 갑자기 목구멍을 뚫고 솟아오를 때 그것은 단지 말이 아니라 내면의 심연이 일으킨 격랑에 가깝다. 카이토가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그 안에는 어린 시절의 기억, 바다의 공포, 사랑의 흔들림이 동시에 뒤섞여 있다. 그리고 그날 밤 울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태풍이 섬을 휘감고 지나가듯 그의 감정도 사납게 몰아쳤다. 쏟아지는 비, 으르렁거리는 파도, 바람 속에 흩날리는 야자수의 몸짓. 자연은 카이토의 내면과 함께 떨리고 있었다. 그때 쿄코의 아버지가 조용히 그에게 말을 건넨다.

카이토, 파도는 말이야. 많은 걸 집어삼키는 무서운 거야. 서핑은 말이지. 먼바다에서 생긴 파도의 마지막 부분을 받아들이는 거야.

그 말은 단지 서핑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한 은유이다. 우리를 덮치는 감정은 대개 먼 곳에서 시작된다. 어린 날의 상처, 버림받았던 기억, 죽음에 대한 공포, 누군가를 너무도 사랑했던 순간. 그것들은 긴 여정을 거쳐 파도가 되어 우리 앞에 도착한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스스로 선택해야만 한다.

고백은 언제나 대답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 대답을 들을 준비, 그 파도를 정면으로 받아들일 각오 없이는 진실은 다시 침잠할 뿐이다. 고백은 용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수용의 문을 여는 키이기도 하다. 내가 품은 고통이 내 것임을 인정하고 상대의 아픔도 함께 끌어안는 겸허한 결심이 필요하다. 감정의 폭풍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는 법, 가와세 나오미 감독은 그것을 바다와 파도의 언어로 천천히 가르쳐준다.

그리고 드디어 태풍이 지나간다. 고요한 하늘 아래, 파도는 다시 부드러운 리듬을 되찾는다. 쿄코는 파도를 바라보며 동네 할아버지에게 엄마의 죽음을 알린다.

우리 엄마 돌아가셨어요.

그러자 노인은 마치 오래된 진실을 일깨우듯 말한다.

영원히 고향으로 돌아간 거지.

이 말 한마디는 죽음을 종결이 아닌 귀환으로 바라보게 한다. 죽음은 떠남이 아니라 다시 자연으로, 다시 바다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 된다. 쿄코는 그 말을 들으며 엄마의 임종을 지켜보던 밤 불렀던 그 노래를 다시 부른다. 민요 가락의 슬프지만 동시에 따뜻하고 묵직한 그 노래는 영화의 마지막을 가만히 물들인다. 노래는 바람을 타고 맹그로브 숲을 건너 파도 위로 떠돈다. 그것은 쿄코의 울음이자 기도이자 삶을 향한 다짐이 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연은 생의 신비를 품는다. 벗은 몸으로 서로를 껴안는 소년과 소녀는 더 이상 어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움과 슬픔을 건넌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투명한 생의 경지. 이제 카이토는 바다가 무섭지 않다. 죽음과 생의 에너지는 이렇게 또 이어진다. 바닷속에서 알몸이 된 두 남녀는 죽음을 이겨낸 현현하는 생명력을 보여준다.


5. Style 스타일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카메라는 언제나 말보다는 기척을 좇는다.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에서도 마찬가지다. 대사로 감정을 밀어붙이지 않고 대신 바람의 떨림, 파도 소리, 새가 지나가는 하늘, 맨살에 와닿는 햇빛 같은 감각의 요소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마치 자연이 먼저 말하고 인물은 나중에 그에 반응하듯. 그녀의 스타일은 설명이 아니라 기다림이다. 감정은 미리 다가오지 않고 자연 속에서 숙성되다 어느 순간 관객의 마음을 툭 건드린다.

빛의 사용 또한 이 영화에서 중요한 시적 장치가 된다. 유독 수면 위에 반사되는 햇빛, 해 질 무렵의 금빛 노을, 어스름한 숲의 그림자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들의 내면 풍경을 닮은 심리적 풍경이다. 쿄코의 엄마가 떠나는 순간, 방 안에 스며드는 바람과 그 빛은 마치 누군가의 숨결처럼 느껴진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 카메라는 그 빛을 오래도록 비추며 죽음의 아득함과 생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포착한다.

감독의 시선은 언제나 자연과 인간 사이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든다. 사람의 울음과 파도의 포효, 숨소리와 나뭇잎의 떨림은 어떤 순간에는 구분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죽음은 인간만의 일이 아니며 자연의 일부이다. 그래서 섹스 장면조차도 에로틱하게 연출되지 않는다. 오히려 순결하고 신비롭다. 피부를 맞대는 장면보다 그 전후의 침묵과 호흡, 눈빛과 물살, 물속에서 몸을 떠맡기는 순간들이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편집 또한 과감히 생략을 택한다.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 대신, 흐름을 따라가되 어떤 장면은 결의처럼 멈춘다. 관객은 하나의 기승전결 식 이야기가 아닌 누군가의 정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마음 한구석에 자꾸만 남는 것은 이 서정적인 단절과 공백의 시간들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단순히 성장영화도 치유의 서사도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음의 감각 그 자체를 고요히 체화시켜 가는 의식(ritual)에 가깝다. 가와세 나오미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 삶과 죽음이 만나는 경계에서 피어나는 투명한 감정을 조심스럽게 길어낸다. 말보다 빛, 음악보다 침묵, 서사보다 감각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그래서 영혼을 정화시키는 영화가 된다.



봄처럼 여름처럼 영화처럼 열아홉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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