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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커피의 법칙

아이 엠 샘

by 달빛바람

뜨거운 물줄기 위의 인내

— 아버지와 커피의 법칙

가을은 늘 피부로 먼저 찾아온다. 자는 사이 공기의 결이 달라졌는지, 얇은 이불을 끌어당기게 하는 서늘함이 방 안을 감돈다. 창문턱에 앉은 먼지 위로 희미한 햇살이 쏟아지는 아침, 그 서늘함을 달래려 나는 가장 먼저 주전자에 물을 올린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깊게 볶은 원두 봉투를 연다. 봉투를 찢는 순간, 묵직하고 고소한 흙냄새와 그을린 곡물의 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그라인더의 일정한 소음이 퍼진다. 그 단조로운 진동은 나를 세상의 불필요한 소음으로부터 분리해 주는 첫 번째 경계이다. 나는 이 행위를 인내의 연습이라 부른다. 가느다란 물줄기를 조절해 마른 가루를 적신다. 첫 뜸을 들이는 30초의 기다림.
그 사이 원두가 부풀어 오르고, 숨을 고르듯 가라앉는다. 다시 물을 붓고, 멈추고, 또 기다린다. 1초가 빠르면 신맛이 튀고, 1초가 늦으면 쓴맛이 강해진다. 그 미세한 차이가 하루의 맛을 결정한다. 세상에는 단지 속도와 온도를 지키는 것만으로 구원이 되는 일들이 있다.

나는 그 법칙의 반대편에서 자랐다. 나의 아버지는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트럭 정비공이던 그의 손은 오랑우탄의 손처럼 컸고, 손톱 밑에는 닦이지 않는 기름때가 박혀 있었다. 밤늦게 현관문이 열리면 그것은 곧 무거운 추가 나를 향해 떨어지는 신호였다. 그의 알코올 농도에 따라 집의 공기는 하루마다 뒤바뀌었다. 어떤 날엔 깊은 침묵이, 어떤 날엔 폭풍이 찾아왔다.

공포는 형태가 있었다. 거실 구석의 담금주 병들, 현관에 널브러진 스패너들, 그리고 안방에서 새어 나오는 거친 숨소리. 우리는 그 숨소리를 듣고 오늘의 날씨를 예측했다.
그의 힘은 흉기였다. 그 손은 낮에는 엔진을 고치는 창조의 손이었지만, 밤에는 집을 부수는 손이었다. 그의 세계에는 일관성이 없었다. 어제 허용되던 일이 오늘은 금지되고, 오늘의 무관심이 내일의 폭력이 되었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완벽한 보호가 아니다. 예측 가능한 세계다. “이 사람은 나를 해치지 않는다”는 믿음, 그 단순한 약속 하나. 그 믿음이 부서진 자리에서 아이는 자라지 못한다. 다만 버틴다. 나는 오래 버티는 법을 배웠다. 성인이 되어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나만의 루틴을 만드는 것이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시간에 잠들고, 같은 방식으로 커피를 내리는 일. 그건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질서였다.

얼마 전, 영화 <아이 엠 샘 I am Sam>을 다시 보았다.
지적장애를 가진 아버지 샘은 매일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내리고, 테이블을 닦고, 주문을 받는다. 그의 동작은 느리지만 놀라울 만큼 일정하다. 그 일정함이 바로 딸 루시에게 주는 안정이었다. 그는 늘 같은 시간에 아이를 재우고, 같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세상은 그를 미숙하다고 말하지만 루시에게 그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나는 그 장면에서 나를 보았다. 기름때 낀 아버지의 손이 남긴 불안의 그림자가 나를 찢었다면 매일 아침 내가 붓는 뜨거운 물줄기는 그 조각들을 천천히 다시 붙여놓는 접착제다.

커피는 정직하다. 내가 들인 정성만큼의 맛을 돌려준다.
같은 원두, 같은 온도, 같은 시간. 세 가지 변수만 통제하면, 커피는 배신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결같음’이라는 이름의 위로이다. 필터 위에 남은 커피 찌꺼기를 바라본다. 그것은 모든 것을 내어주고 남은 검은 흔적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힘을 움켜쥐고 타인을 다치게 했지만 이 가루는 기꺼이 자신을 비워 한 잔의 위로를 만든다.

우리는 보호받는 존재로 태어나 언젠가 누군가를 보호해야 하는 존재로 자란다. 그 사이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아마도 ‘힘’이 아니라 ‘한결같음’ 일 것이다.

샘은 변호사 리타의 절망을 들으며 조용히 말한다.


“좋은 부모요? 한결같음, 인내심, 그리고 들어주기요.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을 때도 들어주는 척이라도 하는 거요.”

사랑은 감정이지만 관계는 기술이다. 그 기술의 핵심은 인내심에 기반한 일관성이다.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는 인내심. 감정이 요동칠 때 잠시 멈출 수 있는 인내심. 오늘의 약속을 내일도 지키는 한결같음. 그 단조로운 반복이 한 사람의 영혼을 지탱한다.

찬 바람이 창문을 두드린다.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
방금 내린 커피는 뜨겁다. 나는 두 손으로 잔을 감싼다. 이 잔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나의 세계이다. 아버지가 휘두르던 불안의 추가 멈춘 자리. 나는 매일 아침, 이 작고 한결같은 세계를 직접 끓여 마신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적어도 예측 가능한 오늘이다. 사랑은, 그리고 삶은, 아마도 그 위에서만 천천히 자라나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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