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데몰리션>
1. 무감각이라는 기만적인 정적
사람의 마음에는 일종의 안전장치가 있다.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슬픔이 들이닥칠 때, 마음은 스스로 회로를 끊어버린다. 너무 뜨거운 것이 닿으면 일순간 감각이 사라지는 것처럼, 삶의 지반이 무너지는 순간 역설적으로 세상은 고요해진다. 사고로 아내를 잃은 직후, 아무렇지 않게 출근해 숫자를 분석하고 그래프를 살피는 영화 속 주인공 데이비스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그가 강해서 잘 버틴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버티는 게 아니라 마비된 것이다. 통증조차 느낄 수 없을 만큼 깊이 베였을 때 흐르는 그 기만적인 정적. 그것은 회복이 아니라 유예된 붕괴에 가깝다.
나에게도 그런 정적의 시간이 있었다. 외할머니는 내 어린 시절의 배경 그 자체였다. 낡은 앨범을 뒤져보면 백일 사진부터 돌사진, 유치원 졸업과 초등학교 입학, 그리고 중고등학교 졸업사진에 이르기까지 할머니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뽀글뽀글한 파마머리에 화려한 꽃무늬 옷, 세월에 굽어진 허리. 그리고 무엇보다 카메라 렌즈가 아니라 언제나 나를 향해 있던 얼굴과 주름진 미소. 할머니는 나에게 공기처럼 당연히 존재하는 분이었고, 엄마가 바쁠 때나 혹은 엄마 몰래 학원을 빼먹고 도망갈 때 나를 숨겨주던 제2의 안식처였다.
그런 할머니의 세계가 무너진 건 비 오는 날 저녁의 뺑소니 사고였다. 늘 걷던 골목 뒤에서 오토바이가 할머니를 치고 달아났고, 삼촌이 걱정되어 찾아 나설 때까지 할머니는 차가운 바닥에 두 시간이나 방치되어 있었다. 그날 이후 할머니의 몸은 몰라보게 허물어져 갔다. 골다공증과 당뇨를 앓던 노구에 사고의 충격은 가혹했다. 부러진 골반 뼈는 붙지 않았고, 거동이 불가능해진 할머니는 결국 요양병원이라는 낯선 공간에 몸을 뉘었다.
2. 악취와 공포, 외면하고 싶은 진실
처음 요양병원 병실의 문을 열었을 때 나를 맞이한 건 슬픔이 아니라 공포였다. 비슷한 연령대의 할머니들이 똑같은 환자복을 입고 누워있던 병실. 그곳에서는 처음 맡아보는 불쾌한 냄새가 났다. 생명이 서서히 꺼져갈 때 나는 듯한 썩은 냄새, 혹은 누군가의 구토물과 낡은 신체가 뒤섞인 듯한 그 냄새는 나를 압도했다. 4인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검버섯이 핀 한 할머니가 나뭇가지처럼 야윈 팔로 내 옷소매를 잡으며 물었다.
"총각! 여기가 어디야?"
그 낯설고 기괴한 풍경에 놀라 소리를 지를 뻔하다가, 침대에 누워있는 외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다. 그것이 할머니가 가여워서인지, 아니면 이 공간이 너무나 무서워서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이었다. 할머니는 그곳에서 6개월을 계셨다. 마지막 한 달은 면회 오는 사람들을 거의 알아보지 못했고, 오직 당신의 큰딸인 우리 엄마 이름만 불렀다고 한다. 나는 그 뒤로 면회를 잘 가지 못했다. 할머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병실의 냄새와 할머니의 무너진 모습이 내 안의 '당연했던 세계'를 위협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것 같다. 기차 타고 새벽에 내려오너라."
급히 내려가 본 병실의 할머니는 이미 내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살은 다 빠져나가고 몸에는 앙상한 뼈의 윤곽만 남아있었다. 엄마가 내 손을 이끌며 말씀하셨다.
"엄마, 엄마 좋아하는 손주 왔다. 알아보겠나?"
할머니는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 한마디를 듣자마자 병실을 뛰쳐나갔다. 그 지독한 냄새와 죽음의 그림자를 감당할 힘이 나에게는 없었다. 그날 일가친척이 다 모인 날, 할머니는 숨을 가삐 쉬었지만 의식을 잃지 않았다. 엄마는 힘들게 와 준 친지들에게
"엄마가 아직 인사를 다 못했나 봅니다. 오늘 밤은 다 돌아가이소. 미안합니다. "
말하며 모두 돌려보냈다. 며칠 뒤, 엄마가 몸을 닦아줄 때 할머니는 갑자기 엄마 손을 꽉 잡고는 그대로 숨을 거두셨다고 한다.
3. 지연된 애도와 억눌린 파괴
할머니가 떠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무감각했다. 아니, 오히려 엄마가 할머니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엄마가 할머니를 추억하며 가만가만 이야기를 시작하면, 나는 요양병원의 그 불쾌한 냄새와 공포가 다시 몰려오는 것 같아 버럭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다.
"제발 그만 좀 해! 이미 돌아가신 분 이야기를 왜 자꾸 꺼내?"
나는 엄마를 위로할 여유조차 없었다. 사실은 내 안에서 시작된 무너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애먼 엄마에게 날을 세운 것이었다. 나이를 먹고 나서야 깨닫는다. 그때 내가 보았던 엄마의 모습이 바로 '해체'의 과정이었음을. 엄마는 아무렇지 않은 척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밥을 하고 청소를 했다. 자식들에게 전화를 해 잔소리를 하고, 바쁘게 돈을 꾸러 다니며 생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그 일상의 이면에서 엄마는 혼자 할머니의 옷과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사망신고를 하고, 할머니가 평생을 일궈온 작은 집을 처분하고, 텅 빈 방에 앉아 "가스비가 어째서 만 원도 안 나올 수 있느냐"며 지로용지를 붙들고 소리 없이 울었다. 남은 약봉투와 파스를 내다 버리며 엄마가 내뱉은 한숨은 사실 자신의 영혼 한쪽을 뜯어내는 비명이 아니었을까.
영화 속 데이비스가 집안의 냉장고를 분해하고 컴퓨터를 조각내며 "무엇이 고장 났는지 알고 싶다"라고 울부짖던 그 행위는 결코 미친 짓이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슬픔을 보이는 실체로 바꾸어 마주하려는 처절한 시도이다. 엄마 역시 할머니의 흔적을 하나하나 지워가며, 자신의 내면을 가득 채웠던 '딸'이라는 정체성을 해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이 없었다면 엄마는 아마 영영 그 상실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4. 통과의례: 다시 살기 위해 '시작'하는 파괴
영화 제목인 '데몰리션(Demolition)'은 단순히 건물을 부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건축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전제 조건이다. 데이비스가 철거 현장에서 대못을 밟고서야 비로소 "아프다"라고 소리를 지른 것처럼, 우리도 생생한 고통을 마주할 때 비로소 마비되었던 감각이 돌아온다. 그 통증은 비명이 되고, 비명은 눈물이 되어 우리를 덮친다. 그 후폭풍을 온몸으로 맞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이별의 입구에 들어설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무엇인가를 완전히 부수어 본 연후에야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었는지를 배운다. 엄마가 할머니의 유품을 다 태워버리고 나서야 "죽고 나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싶다"라고 가볍게 말씀하셨을 때, 나는 그 말이 허무가 아니라 가장 뜨거운 시작의 선언임을 이해했다. 당신의 엄마와 온전히 이별한 사람만이, 남겨진 이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새로운 생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너짐과 부서짐, 인정과 절망, 그리고 비명 없이는 우리는 결코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낡은 자아의 집을 완전히 허물어뜨리는 그 뜨거운 통증은 우리가 다시 살기 위해 치러야 하는 가장 정직한 통과의례이다. 엉엉 울고, 소리를 지르고, 남겨진 것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내다 버리는 이 처절한 과정은 끝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짓누르던 무거운 껍질을 벗겨내고, 생의 한복판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는 가장 역동적인 '시작'의 다른 이름이다.
이제 나는 안다. 이별은 단순히 누군가가 사라지는 사건이 아니라 그 빈자리를 감당하기 위해 나를 통째로 다시 짓는 일임을. 무너짐은 새로운 지도를 그리기 위해 하얀 종이 위에 긋는 첫 번째 선이다. 이 잔인하고도 뜨거운 통과의례를 마친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진짜 생을 향해 첫발을 내디딜 수 있다. 폐허 위에서 비로소 보이는 하늘이 있듯이 다 부서진 뒤에야 들리는 심장의 박동이 있다. 그것이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