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등ㆍ하교의 담력과 체력
베이비 부머 세대인 우리 나이, 시골 중학교에도
학급수가 최고로 많은(그 시절 기준) 학년이었다.
3개면의 친구들이 모이는 남녀공학 사립학교,
우리 면의 사람들은 원거리라 통학의 어려움이 많았다.
1학년 때는 우리 동네 친구들이 한 반에 두 명씩 배치되어
큰 어려움이 없이 잘 지냈다. 그때만 해도 내성적인
성격 탓에 친구를 잘 사귀는 성격이 못 되었다,
2학년이 되니 반 편성이 우ㆍ열반으로 나뉘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나 싶지만 면학분위기를 살려
좋은 고등학교에 많이 보내 이름을 떨치려는 것이었나 싶다.
우리 학교에서도 전고ㆍ전여고를 꾸준히 보내고 있었다.
반을 그리 편성하다 보니 우리 동네 친구들 셋은 열반에
편성이 되고, 나만 우반에 들어가는 불상사가 생겼다.
우반과 열반은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소위 1위에서 60 위 까지가 우반이고, 여학생 한 반,
남학생 두 반 이렇게 모두 네 반이었다.
나에 하교시간이 문제였다.
원거리인 집으로 하교할 때면 같은 동네 친구들이
끝나는 시간이 달라 함께 갈 수 없었다.
기다리는 것도 한두 번이고, 우리 담임선생님께서는
종례시간이 늘 길었다. 그 어린 마음에 마지막 시간은 하교걱정으로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 마을 친구는 아니고 가는 길에 중간마을 친구 둘이
같은 반이 되었다. 셋이서 하교를 하다 두 명은 차례대로
헤이지고 마지막은 혼자서 5km 정도를 더 가야 했다.
혼자서 물레방앗간을 돌아갈 때는 귀신이 있다는 소문이
있어 가슴이 두 근 반 서근 반 했다. 지금 생각해도 무섭고
외로웠다.
가을날 부엉이라도 나지막이 울 때는 무서움이 더해졌다.
아무도 잘 다니지 않던 길을 조그만 중학생 혼자서 가곤
했던 것이다.
동네 어귀에 다다르면 그 때야 마음이 안정되고 뛰던 심장도
제자리로 돌아가 평온을 되찾곤 했다. 교통수단도 없고
두 다리로 걸어서 등 하교를 하면서 담력과 체력을 함께
길렀다,
그 후 우리 바로 밑 후배부터는 우리 면에 공립 중학교가
설립되었다.(1972.3.11) 우리가 산 넘고 물 건너
사립중학교를 다닌 마지막 세대가 되었다.
그 시절 3년간의 등ㆍ하교의 체력과 담력이 지금의
나를 만든 끈기와 성실함으로 이끄는 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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