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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는 혜성님 Oct 16. 2023

북한출신으로서의 파리여행기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혁명의 수도 평양' 그리고 혁명의 수도 파리

'혁명의 수도’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나요? 현대 사회에서는 단어의 순수한 의미와 상관없이 낯선 느낌을 주는 단어들이 있다. '혁명’이라고 하면 붉은 색깔이 연상되고, 우리 한국 사람들은 경계하게 된다. '혁명'이라는 단어는 북한이 독점한 것 같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살아보니 '혁명’이라는 단어가 참 친숙한 것 같다. 젊은 사람들은 자주 쓰는 단어는 아니지만, revolution이라는 단어 자체에 한국처럼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북한에서 혁명의 수도는 '평양’이라고 배웠다. 우리 인민의 심장, 혁명의 수도… 그런데 ‘혁명의 수도’ '혁명적인 우리 인민의 심장’인 평양은 탈북자들의 90퍼센트가 밟아 본 적도 없다. 나 역시 평양을 가 본 적 없다. 시베리아 근처 북방의 땅 아오지에서 겸손하게 살아온 북한여성이 부르주아 혁명의 수도 파리에 도착했다. 나의 인생에서 역사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다.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샤를드골 공항은 인천공항보다 시설이 낡고 이상한 냄새가 났다. 화장실도 더럽고, 흑인 아주머니가 앉아서 사용료를 받고 있었다. 의자도 노숙자들이 누울 수 없게 팔걸이가 달려 있어서, 공항에서 밤을 새야 하는 여행자들에게는 불편했다. 여권 검사를 기다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양한 국적과 출신의 사람들이 많았다. 프랑스는 오랜 역사동안 다문화를 수용해 왔기 때문에, 혼혈의 혼혈을 거친 2세 3세들이 많았다. 그들의 생김새만으로는 국적이나 인종을 알 수 없었다. 민족주의가 익숙했던 나에게 이렇게 다양한 인종과 문화들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한국 여권의 파워 덕분에 나는 별도의 입국 심사도 없이 입국했다. 북한은 인정하지 않지만, 세계인들은 프랑스를 혁명의 수도로 알고 있다. 프랑스 파리는 예술의 도시, 근대 혁명의 도시, 사상과 철학의 도시 등으로 불리며, 전 세계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 하지만 서울의 현대적인 모습에 익숙한 나에게 파리는 불편한 것 투성이었다. 서울의 깨끗하고 빛나는 바닥과 스크린도어가 있는 지하철과 달리, 파리의 지하철은 스크린도어가 없고, 바닥은 더러워서 언제 청소했는지 의심스럽고, 쓰레기도 곳곳에 버려져 있었다. 지하철은 오래되어서 창문이 없는 객차도 있었고, 문은 승객이 직접 열어야 했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악취가 가득했다. 근데 파리의 지하철은 뚫린 지 백 년이 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노숙자들이 가득한 길거리를 지나갔다. 복지가 잘 되는 나라라고 들었는데, 왜 이렇게 노숙자가 많은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시 남자 친구가 그들은 동유럽에서 온 집시라고 했다. 집시든 아니든, 노숙자와 구걸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불편했다. 소매치기도 많고, 도시도 혼잡하고 더러웠다. 지하철과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야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가 예약한 호텔은 4층이었는데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계단은 콘크리트로 되어 있었는데, 모서리에 나무 몰딩이 붙어 있었다. 콘크리트는 깨져서 모래와 시멘트가 흩어져 있었고, 나무 몰딩은 떨어져서 걸을 때마다 삐걱 거리는 소리가 났다. 중세시대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장발장이 훔친 검은 빵을 들고 마중 나올 것 만같았다.


호텔방에 도착해서 짐을 풀었다. 호텔방은 깨끗하고 편안했다. 티브이는 좀 오래된 것 같았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호텔에서 저녁을 먹고, 다음날부터 시작할 바쁜 일정을 준비했다. 루브르, 에펠타워, 샹젤리제, 개선문, 노트르담 등 유명한 관광지들을 모두 방문하기로 했다. 파리에 온 김에 다시 올 기회가 있을까 싶어서 열심히 관광하고 싶었다. 개선문에 가서는 전망대에서 파리의 전경을 감상했다. 개선문을 중심으로 별형으로 뻗어나가는 길들 과, 먼 곳에 보이는 라데팡스가 인상적이었다. 개선문 앞의 샹젤리제 거리는 고급 명품샵들로 가득했다. 나는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었고, 개선문 벽에 새겨진 조각상들에 더 눈길이 갔다. 북한의 김일성이 평양에 개선문을 지었는데,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만든 것이라고 들었다.


파리의 이름난 관광지들은 센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노트르담 성당으로 가려면 센강을 건넜어야 했다. 사실 센강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남편이지만, 당시는 남자친구였던 프랑스남자와 센강을 함께 걸으며 한강과 대동강이야기를 나눴다. 평양에는 대동강이 있고, 서울에는 한강이 있다. 세계의 수도들은 강을 끼고 형성된 것 같다. 대동강은 가 본 적이 없지만, 한강은 내가 또 전문가가 아닌가? 애국심이 발동한 나는 '센강 별거 없네. 이건 뭐 동네 개울만 하지 않나. 한강이 훨씬 크고 아름다운데?'라고 말을 건넸다. 남자친구는 '크기가 꼭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는 없지'라는 지극히 프랑스인 다운 대답을 들었던 일화가 기억에 남는다.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그리스 신화의 조각상들을 많이 봤다. 프랑스가 가톨릭 문화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리스 로마 신화의 조각상들이 일층 전시실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프랑스와 로마 등 유럽은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히브라이즘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 로마 신화도 유럽의 역사의 일부라고 한다. 또한 이집트에서 발견된 미라의 관이나 석관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남의 나라에 가서 남의 조상 무덤까지 파오다니. 그런 생각도 했다. 다빈치의 그 유명한 모나리자 그림을 나도 물론 봤다. 커닿란 방에 자그마한 초상화 하나 걸려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에펠타워는 거의 마지막 날에 갔다. 에펠타워는 예약을 해야 했는데, 너무 일찍 도착해서 에펠타워 광장에서 와인과 샴페인을 마셨다. 에펠타워 앞에는 넓은 잔디 광장이 있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서 피크닉을 즐기고 있었다. 잔디 광장에 앉을자리가 없을 만큼 붐볐다. 편안한 옷차림과 여유로운 미소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니 프랑스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에펠타워 광장의 잔디밭은 담배꽁초로 더럽혀져 있었다. 잔디를 들어보면 그 밑에 꽁초가 쌓여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고 술과 샌드위치를 먹으며 에펠타워를 감상했다. 광장 가득 메운 사람들은 자유로워 보였고, 편안해 보였다. 특유의 자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있었다. 수많은 관광객들 사이에 묻혀 있으니 나도 덩달아 신이 나 준비해 간 샴페인을 한병 다 비우고, 저녁에 호텔에서 마시려고 구매한 로제와인까지 한 병을 다 비웠다.


분위기에 취한 건지, 술에 취한 건지… 날이 어두워져서 우리는 에펠타워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중간쯤에서 내려서 파리시내를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로 가기 전 빈 공간이 하나 있었는데 세계 여러 나라 국기를 그려 넣고, 파리에서부터 거리가 적혀 있었다. 북한국기 바로 밑에 태극기가 있었다. 북한깃발을 보니까 갑자기 내가 고향에서 참 멀리 떨어진 곳까지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 사람치고 에펠타워에 올라온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 생각이 들었고, 드디어 그렇게 소원하던 자유를 내가 찾기는 찾았구나라는 안도감마저 몰려왔다.


북한에서 태어나 자란 나에게 프랑스는 우리가 지겹도록 배워왔던 서구 제국주의의 상징이었다. 어쩌면 왜곡된 교육 때문에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파리를 나는 객관적으로 보고 느낄 수 없었다. 처음부터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서구의 침략자 때문에 일본이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었고, 일본 때문에 우리는 분단이라는 비극적인 역사를 겪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일종의 피해 의식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프랑스에 살면서, 파리를 다시 방문했을 때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파리는 프랑스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유서 깊은 도시이기도 하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가 함께 빛나는 아름다운 도시이기도 하다. 어쩌면 세계인들이 파리를 사랑하는 이유는 건축물의 아름다움과 예술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프랑스 사람들이 걷어온 역사와, 그 역사들을 통해 배우고, 반성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프랑스라는 나라를 존중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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