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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가 푹 주무시러 가셨어요

by 초록

외할아버지 글을 쓴 뒤 불과 몇시간 후,, 아버지께서 친할머니가 위독하다고

한국에 들어와야 할것 같다고 알려주셨습니다.


덴마크 현지시간 9월 25일 새벽 1시 15분 저희 할머니께서 임종하신 시간입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너무 무서웠어요.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현실 같지 않고, 지금 당장 갈 수 없다는 사실에 갑갑하기만 합니다.


어제 부모님의 연락을 받은 후, 급하게 오늘 밤 11:40분 한국행 비행기를 끊었습니다.


저희 할머니는 저에게 있어서 단순한 할머니가 아니에요.

어려서 부터 부모님 모두 맞벌이를 하셨기에, 제 등하교와 밥, 잠은 모두 할머니와 함께 이뤄져왔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진학고 기숙사 생활을 하고부터, 대학교도 서울로 가서 자취를 하게 되었고, 학사 졸업 후에는 현재 유럽에서 지내고 있죠.

어려서 부터 함께 자라와서 그런지 애틋한 마음이 깊었고, 시험 후나 방학이 되면 항상 본가로 내려와 할머니와 함께 시간을 같이 보냈습니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있으면 항상 같이 있을때 보다 결핍과 애정이 커지듯, 자주 못뵌다는 마음이 계속 걸렸습니다. 학사 졸업 후엔 취직해서 집에 자주 내려가야지라고 생각했던 것도, 유학을 하게 되며 무산되어버렸죠.


그래서 올해 1월, 대학원 방학기간에 짧게 한국을 1주일 다녀왔을때에도, 친구들도 만나느라 할머니와 오래 같이 있지 못했습니다. 또 저희 할머니께선 이전에 세번의 큰 수술을 겪으셨음에도, 이를 이겨내셨던 강한 분이셨기에, 언제든지 제가 시간이 나면 함께 할 수 있다는 믿음도 있었어요.


그런데 1월에 1주일의 휴가를 보내고 다시 덴마크에 오면서 부터, 아무 이유없이 무언가 악몽과 걱정에 밤마다 시달렸습니다. 대략 3-4월 부터요. 그냥 막연하게 불안감에 휩싸였어요.

그저 지나가는 순간일 뿐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다 석사 1년 과정을 마치고 긴 여름방학이 다가와, 한국에서 길게 휴가를 보내며 할머니와 같이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을 한 참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제가 출국전 연락으로 할머니께서 식사를 4-5월부터 너무 안하시다보니 살이 10키로가 넘게 빠지셨고, 건강검진 결과 폐와 심장이 약하다고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순간 겁이 났지만, 큰일은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여러번 되물었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 호전될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탑승했습니다.


한국도착 후 다음날, 아버지께서 할머니의 폐가 더 나빠질 수도 없는과정에 이르렀다고 말해주셨어요. 폐암이었습니다.


그 시기를 트랙해보니, 대략 작년 끝 겨울 또는 올 1월 초반에 건강에 문제의 씨앗이 피었던것 같더라구요. 작년 겨울에 할머니와 영상통화를 하면 너무나도 건강하게 기운 넘치신 모습이었고, 올 1월에 뵈었을때도 건강한 모습으로 저보고 계속 친구들 보러 나가 놀라고 하셨을 정도였어요.


그러다 들었는데 5월달쯤 할머니께서 혈뇨를 정말 심하게 보셨다고 하더랍니다.

그저 신장 기능 문제인줄로만 아셨던 걸수도 있죠.

폐암진단을 받고 난 후에도, 여러 검사예약을 남겨두고, 저희는 여전히 할머니께서 항암치료를 받게 되신다면 기운을 회복하고 견딜수 있도록, 할머니의 식사에 힘을 줬습니다.


그러다 7월말~8월초 검사를 받으신 날, 이미 암세포가 뇌, 폐, 심장, 뼈, 림프선 등 모두 퍼져버려 사실상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의사선생님이 진단을 내렸어요.

마음은 먹고 갔지만 그 소식을 들으니, 아 이젠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계시는 과정을 지켜봐야만 하는구나 싶었어요. 그 과정은 너무나도 무력했습니다.


8월 11일 할머니께서 그나마 드시던 죽 마저 드시기를 거부하시고 베란다 식물에 물을 주셨습니다.

광복절을 보내고 그 주 주말, 할머니께서 5일째 식음을 전폐하시더니 결국 기운을 거의 잃으시고 누워만 계셨습니다. 그 날 저희 어머니께서 할머니를 붙잡고, 제발 한번만 밥을 드셔달라고 붙잡고 엉엉 우셨습니다. 할머니는 눈을 뜨시더니 괜찮다고, 배가 부른데 어떻게 먹냐고, 내가 알아서 다 챙겨먹으니 걱정말라며 우시는 어머니의 머리를 쓰다듬으셨어요.


폐암의 다른 증상으로 음식을 넘기는 과정이 불편해지게 되면서, 음식을 거부하며 장 기능이 떨어지고, 배에 가스가 많이 차게되어 복부팽만이 일어나 안먹어도 배부름을 느끼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8월 18일, 저희 할머니께서 결국..거의 쓰러지시다 시피 기운을 잃으셨습니다. 놀란 아버지께서 할머니를 차에 모시고 대구 가톨릭대학교 호스피스 병동으로 오셨습니다.

저는 오전에 병원을 다녀오고 바로 병원에서 아버지와 합류해 할머니를 휠체어에 모셨어요.

그날 그 순간은 정말 생생하니 무서웠습니다.

할머니께서 눈이 완전히 풀리신 상태로, 몸에 힘도 하나도 없고 그냥 어떻게 설명하기 힘그신 몰골이셨어요.


급하게 호스피스로 모시고 링거를 맞히고 다음날이 되니 할머니는 이젠 눈도 아에 감으시고 하루종일 잠만 주무셨습니다.

이대로 끝인가 싶었지만 다행히도 링거를 며칠 맞으시니 그래도 할머니의 삐쩍마르신 몸이 조금은 돌아오고, 눈을 조금씩 뜨시며 말씀도 하시기 시작했어요.


집에 가자. 내방 데려다 도.


할머니의 가장 편한 곳이자 보금자리를 그리워하시며 가고싶어 하셨어요.

우리모두 마음은 굴뚝같지만, 할머니의 상태를 보아선, 집에 모셨다간 바로 돌아가실것 같아 그럴수 없었어요.


그렇게 매일 병원을 왔다갔다하며 저는 학교 개강일 전날까지 할머니의 곁에서 시간을 보냈어요.

왜 건강하실땐 이렇게 시간을 안보내다가, 지금 이렇게 힘들어하시는 순간이 와서야 나는 옆에 있는걸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또 나에게 제일 소중한 사람이 이렇게 힘들어 하고 있는데, 난 왜 할 수 있는게 없지 라는 생각도 정말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8월 27일, 당일날 병원에서 본 할머니의 모습이 마지막 순간이 아니게 되길 바라며 다시 코펜하겐 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연구실 출근을 하면서 매일 언제가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침마다 가족 톡방을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러다 이번주..

외할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고 바로 다음날 할머니 또한 컨디션이 나빠졌다는 소식이 왔어요.


아직은 조금 더 견디시겠지..싶었는데 어제 밤 12시가 지나고 새벽 1시쯤 저는 지쳐 잠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잠들고 불과 몇분뒤,, 오늘 아침 6시에 일어나 카톡을 확인해보니 할머니께서 임종하셨다는 소식이 와있었습니다.


며칠전, 할머니와 통화했을때 할머니께서 보러와라, 한 12시쯤 와라 라고 하셨던 말씀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할머니께서 저를 부르는 마지막 말씀이었던걸까 싶더라구요..


왜 이별은 아무 준비없이 어느순간 이렇게 찾아오는 걸까요.

왜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해도, 이 슬픔을 이겨낼 순 없는걸까요.

오후 3시 45분..대략 8시간후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갑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할머니의 발인 전에는 도착할 수 있겠더라구요.


이 못난 손자를 지금까지 키워주신 저희 할머니, 너무 사랑합니다.

할머니께서 태어나신 순간에는 제가 없었기에 함께 하지 못해서, 마지막 순간에는 함께 하겠다고 결심했지만, 이 마저도 지키지 못한 이 손자가 너무 미안하고 죄송하고, 보고싶고 그립습니다.


휴대폰 갤러리엔 아직도 웃고계시는 할머니가 그대로 있는데..이젠 그 모습을 다시 볼수없다는 사실이 너무 힘듭니다.

가지 말아주세요. 조금만 더 있어주세요 하는 부탁도 이제 알고보니 제 욕심이었나봐요.


그동안 저희 가족을 위해 헌신하시며 저와 제 동생을 이렇게까지 돌봐주신 할머니..할머니는 제 어머니였습니다.


이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다음생엔 부디 제가 할머니를 보살피고 키우고 사랑하게 해주세요.

사랑합니다 할머니. 우리 할매. 이제 그만 힘드시고 푹 쉬시고, 놀러나가세요.

꼭 다시 만나러 가겠습니다.


2025년 9월 25일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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