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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경 Dec 25. 2023

말이 20년이지...

에픽하이 20주년 콘서트 기념 헌정글

내가 해야 할 일
벌어야 할 돈 말고도 뭐가 있었는데
내가 가야 할 길
나에게도 꿈같은 게 뭐가 있었는데
있었는데
꿈이 있었는데...


입직한 뒤 내 능력과 의지를 어선 업무에 일상이 몇 년 지워졌다. 더는 걷기가 힘든데 아무도 멈춰주지 않았다. 알고보니 퇴직한 과장님도 그때가 자신의 공무원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절이라고 했다. 같이 일했던 동료는 온갖 일을 내가 뒤집어썼었다며 당시 상황을 평했다. 미화될 법도 한 그때로 단 1분1초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 피해망상에 빠지기 좋았던 그 시절 에픽하이의 빈차가 있었다.

 

빈차 뮤직비디오에는 투컷이 빈 식당에서 혼술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가 홀로 소주를 마시는 장면에 맞춰 나도 함께 소주를 털어 넣곤 했다. 날숨으로 알코올향을 느끼며 나는 얼마나 그리고 몇 번이나 그릇된 선택을 했길래 스스로를 여기로 몰아넣은 것일까 생각했다. 저 가사를 들을 때마다 다시 만나지도 못할 거면서 내가 나에게 죄짓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더는 죄짓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되풀이될까 절대 잊지 않 나의 역사다.


빈차뿐만 아니라 어른 즈음부터 에픽하이 노래는 내 습관이고 BGM이었다. Fly를 들으며 재수학원 선선해진 바람을 맞았고, 대학시절 Lesson 시리즈는 가슴을 뛰게 했다. Amor Fati와 백야는 혼란한 삶의 안개를 걷어주고 한걸음 내딛게 해 주었다. 하루를 넘겨 퇴근할 때는 신발장 들었다. 필요한 순간마다 선물 같은 앨범을 준 그들이 고다.


그 마음 그대로 2023.12.17. 에픽하이 20주년 콘서트 갔다. 에픽하이는 인사와 함께 이번 콘서트가 스탠딩 콘서트고 의자는 외투 걸치기용이라고 경고했다. 이전 콘서트와는 다르게 초반부터 Fly, Fan 등 뛸 수밖에 없는 곡들을 연달아 불렀다. 팬들도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다른 콘서트 때와는 다르게 체력과 도가니를 아끼며 최선을 다해 뛰지 않았다. 하지만 20년이란 세월을 함께 한 음악들은 쉴 새 없이 흘러나왔고 콘서트장은 쉽게 하나가 됐다.   


20주년 콘서트답게 에픽하이 완전체가 모였다. 제3의 멤버 윤하가 온 것이다. 물론 제4의 멤버는 투컷이다. 윤하는 우산과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노래를 함께 불렀고 솔로곡 사건의 지평선도 불렀다. 게스트는 성시경이었다. 타블로는 게스트로 성시경을 섭외한 이유가 연말에 성시경 콘서트 표 구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성시경의 음색은 독보적이었다. 전날 과음하고 일어나자마자 전공시험장에 와서 군더더기 없는 답안을 쓰고 나가는 단과대 수재 같았다. 너의 모든 순간과 너에게를 불러주고 갔다. 성시경은 게스트인 자신의 역할이 가수와 관객들을 쉬게 해주는 것이라면서 관객들을 자리에 앉게 해 주었다. 그는 실력과 인성을 겸비한 자다.


오랜 팬이 그렇듯 언제부턴가 에픽하이 앨범을 들으면 나이를 함께 먹는 오랜 친구를 곁에 둔 것 같다. 성시경은 에픽하이가 고맙다고 했다. 셋 다 유부남임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 그들이 자신에게 용기를 준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 인간 영혼의 지도를 새롭게 밝히겠다고 외쳤던 그들이 평범한 게 두려워서 꾸던 꿈, 이젠 평범한 게 부럽군이라고 읊조린다. 세월에 따라 변하는 그들의 가사에 변해가는 나도  발맞추며 힘을 얻는다.


와카스 아메드의 책 <폴리매스>에는 재능의 교집합 개념이 등장한다. 특정 분야에서 압도적인 재능이 아니더라도 각 분야의 어느 정도 재능을 서로 연결하면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는 의미다. 재능의 교집합을 생각하면 타블로가 떠오른다. 타블로는 당신의 조각들이라는 단편소설을 냈지만 천재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르지 않았고, 압도적인 랩스킬을 가진 래퍼는 아니다. 하지만 비트 위에서 그는 독보적인 작가고 시인이다. 서정적 가사부터 허를 찌르는 펀치라인까지 거를 게 없다. 가사 듣는 맛으로는 에픽하이를 대체할 그룹이 없다. 그들이 데뷔한 지 20년이 지났지만.


20주년 콘서트에서 타블로는 울먹였다. 20년 동안 음악할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고. 나도 고맙다. 언젠가 에픽하이가 음악활동을 하지 않는 날이 올 것이다. 타블로가 작가로 제2의 인생을 살면서 삶의 페이지를 채워갔으면 좋겠다. 미리 고마워!


* 힘이 되어준 에픽하이의 빈차 뮤직비디오

https://youtu.be/pTD9Jysi3_g?si=orUZw4NFsY9DH4HO

삶이 반대로만 가는 것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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