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경 Dec 31. 2023

이것이 북유럽 감성입니까.

밀레니엄 시리즈 1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 서평

드라마를 선뜻 정주행 하지 못한다. 본방사수는 더욱 못한다. 시리즈물에 빠지게 되면 긴 시간을 기기 때문이다. 영화야 내 취향이 아니어도 2~3시간이면 끝나지만 드라마는 한 시즌이라도 다 보려면 며칠이 걸리는 와중에 나는 중도하차를 잘 못한다. 주말마다 보는 영화가 너무 뻔하거나 지루하면 주말을 제대로 보내지 못한 것 같아 찝찝함을 안고 잠든다. 그래서 드라마는 취향이 비슷한 사람에게 결말까지 괜찮다는 확인을 받고 보기 시작한다. 워킹데드 후반시즌에 당한 이후 생각이 확고해졌다. 후반부는 의리로 꾸역꾸역 보았기 때문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소설책에는 어차피 메모를 하지 않아서 -김홍이나 장강명 작품을 제외하고- 밀리의 서재에 없으면 도서관에서 빌려본다. 회사 도서관 사서님은 신청한 책을 매번 즉시 구매해 주신다. 나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빌려 읽을 만한 책을 신청하는 것으로 나는 소극적인 도리를 지킨다. 스웨덴 소설은 읽어 본 적 없지만 52개국 9천만 부 판매라는 메가히트를 기록했고 평도 좋아서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을 도서관에 신청했. 분량이 700페이지에 육박했기 때문에 지난 크리스마스 연휴에 읽기 부족하지 않았다.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은 정의로운 경제기자 미카엘과 천재해커 리스트가 미스터리한 사건을 해결하는 스웨덴 사회파 추리소설이다. 저자는 기자 출신 스티그 라르손이다. 이야기는 스웨덴의 추운 겨울을 주된 배경으로 삼는다. 이 소설의 가장 뛰어난 점은 배경 묘사라고 생각한다. 가본 적도 없는 스웨덴의 추운 겨울을 따뜻한 이불속에서 만끽하는 느낌 자체가 만족스러웠다. 다가 스탠드를 끄는 순간부터, 다음날 아침 이불속에서 이어서 읽을 포근함 기다려다. 또한 등장인물들이 처한 공간을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표현한 점이 소설에 몰입하기 쉽게 만들었다. 미카엘이 지내는 스웨덴 소도시의 한적한 작업실과 리스트의 아파트, 재벌가의 거실 등 공간 부담스럽지 않고 불친절하지도 않게 그려진다.


서술 방식 또한 취향에 잘 맞았다. 작가는 필요 없이 개입하지 않았다. 전지적 작가 시점과 3인청 관찰자 시점 사이에서 담백하게 상황을 그려주었다. 작가는 경제기자의 사명이나 사회적 책무를 말할 때는 전지적 작가 시점을 활용하여 자신의 가치관을 직설적으로 표현했고, 인물 사이의 미묘함과 긴장감을 표현할 때는 3인칭 관찰자가 되어 절제했다. 절제된 자유주의가 이룩한 성숙한 개인주의 사회 분위기를 보여주는 듯했다. 작가는 전지했지만 굳이 들여다보지 않았다.


주인공들도 매력적이다. 미카엘은 신념이 투철한 경제기자다. 소설은 재계의 비리를 폭로하려다 역풍을 맞고 소송에서 패배한 미카엘을 보여주면서 시작다. 정계 부패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기자정신을 발휘하는 정치기자와는 달리 경제기자는 재계의 나팔수 역할을 하는 세태가 그는 불만이다. 더불어 기자로서의 사명과 사람사이 관계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도 나오는데 이는 캐릭터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현실성을 부여한다. 그와 함께 사건을 해결하는 리스트는 소설 안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유한 천재 해커다. 세상에 대한 무심함이 사람으로 환생한다면 그녀일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매력이 넘친다. 미카엘의 인간적 고뇌와 리스트의 인간적 교류를 지켜보는 것도 이 소설의 백미다.


배경 설정과 전개가 군더더기 없고 정교했다. 소설가 장강명은 본인의 에세이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에서 소설을 3가지로 구분한다.

① 사실성을 추구하는 소설 : 현실세계에서 볼 수 있는 인물들이 등장해서 사건에 휘말리는 소설
② 사실성은 없을지라도 개연성과 핍진성을 추구하는 소설 : 잘 쓴 SF소설, 정교한 판타지 소설
③ 사실성, 개연성, 핍진성을 추구하지 않는 소설 : 비현실적, 비합리적 사건이 벌어지는 소설


장강명은 ①소설은 사실성을 장점으로 하여 강력한 현실감과 몰입감, 설득력을 주고 독자가 현실에 관심을 갖고 거기에 참여하도록 이끈다고 말했다. 또한 앞부분은 ①이나 ②인데 결말을 ③으로 마무리하여 역량부족을 보여주거나, 개연성과 핍진성까지 무시하는 ②소설을 보면 탐탁지 않다고 했다.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의 경우 ①을 따른다. 미카엘이 해당 사건에 개입할 수밖에 없는 설정으로 시작하는 모습은 삶의 소용돌이를 잘 나타내며 작품의 사실성을 높였다. 저자는 설정을 발단-전개 과정을 위해서만 활용한 것이 아닌, 설정을 통해 결론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하며 서사의 개연성과 핍진성마저 간과하지 않았다. 해킹 원리까지 자세히 설명하는 서술은 사실을 추구하는 언론인 출신답게 집요함을 잘 보여 준다. 공교롭게도 장강명 역시 언론인 출신이다.


사건 해결과 트릭 설명에 초점을 맞추어 결말을 향해 직선적으로 급히 달려지 않는 점이 낯설면서도 편안했다. 인물의 감정선을 담담하면서도 부족하지 않게 묘사하면서 서사를 전개해 나가는 속도가 적절했다. 스웨덴 조용한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 추리를 가미한 듯한 분위기가 좋았다. 주인공의 섬세한 내면 묘사를 통해 공감과 몰입을 이끌어내는 소설과는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의 첫 스웨덴 소설은 표현 방식이 프랑스 소설과 많이 달랐다. 예를 들어 감명 깊게 읽은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에서는 사랑에 대한 알랭드 보통의 철학이 등장 인물들의 사유를 빌려 자세하고 적으로 드러난다. 에세이에 서사적 형식만 살짝 가미한 방식이다. 최근 읽은 『자기 앞의 생 』 역시 삶과 죽음에 대한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의 생각이 문장 사이사이에 피어든다. 경험상 프랑스 소설이 관념을 소설의 큰 축으로 삼고 그 위에 서사를 가미한다면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은 정교하게 짜인 서사 구조 안에서 등장 인물들 무미 건조한 행태로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요란 떨지 않는 아크네 스튜디오 풍 옷을 좋아한다. 단순하고 깔끔한 이모지 페이스가 보여주듯 아크네 스튜디오 옷들은 담백함과 스트릿한 감성을 적절히 담아다. 아페쎄와 스투시사이에서 정교한 균형을 이룬 게 나에겐 아크네다.  소설의 방식은 아크네와 닮았다. 장황하지 않은 담백한 묘사가 좋고 추리 소설의 본질을 놓치지 않은 구조와 다그치지 않는 전개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을 추천한다.


소설 첫 문장은  '스웨덴 여성의 18%는 살아오면서 한 번 이상 남성의 위협을 받은 적 있다.'이다. 매 챕터마다 스웨덴 여성의 폭력에 관한 통계자료를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간접적으로 부연 설명하지 않는다. 소설의 서사구조를 통해 보여줄 뿐이다. 언론인 출신답게 저자 스티그 라르손은 지난 폭력, 인종 차별, 파시즘 등 스웨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장강명의 말처럼 라르손도 독자가 현실에 관심을 갖고 거기에 참여하길 원했을 것이다. 재미와 더불어 사회파 소설이 줄 수 있는 또 다른 순기능이다. 이례적으로 마지막 문장에 다다르기 전에 회사 도서관에 밀레니엄 시리즈 2 :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를 신청했다. 전해지지 않을 것 같지만 이 자리를 빌려 도서관 측에 감사 말씀을 전한다. 매번 감사합니다.


* 저자는 애초 밀레니엄 시리즈 총 10부작으로 계획으나 3부작까지 집필하고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후 차기 공식 작가가 밀레니엄 시리즈 3부작을 추가로 집필해서 세상엔 6부작까지 나왔다.  



작가의 이전글 말이 20년이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