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내가 캔버스 앞에 서 있다는 기분이 든다.
나는 붓을 내려두고 그간 칠해 온 캔버스를 본다.
삶은 캔버스를 칸칸이 다 채워야만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캔버스를 보면서 나를 채워온 과정이기도 했다.
계속해서 캔버스를 여백으로 남길지 채울지, 채운다면 어떤 색이 좋을지 본다.
본다고 해서 어떤 그림이 될지 알 수 없지만 그리는 과정에 내가 가득하길 바란다.
억지로 여백을 채우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망설이다 의도치 않은 여백을 남기고 싶지 않다.
필요 없는 물감을 찾느라 캔버스를 등지지 않겠다.
타인의 캔버스를 흉내 내지 않을 것이다.
언제까지 그릴지, 어떤 그림이 될지 모른다.
과정에 내가 충분히 있다면 흔들리는 붓끝이라도 괜찮다.
어떤 색으로 채웠다는 것은 그 외 모든 가능성을 놓았다는 의미니까.
중요한 사실은 한번 지나간 칸은 채우지도 비우지도 못한다는 것과 방금 또 한 칸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저 본다.
* 표지 : Mark Rothko - Untitled (Red), 1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