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도 일요일 알람은 필요 없었다. 디즈니 만화 동산을 봐야겠다는 마음으로토요일마다 일찍 잠들었기 때문이다. 알라딘, 미키마우스, 전사골리앗과 함께 시작해야 일요일다웠다.
중학생이 되면서 만화와 어린이날을 졸업하고 토요 명화를 챙겨보기 시작했다. 티브이 끄고 당장 자라는 소리가 안방에서 들려왔기 때문에 소오강호, 동방불패, 사랑의 블랙홀, 다크시티 등 숨죽이면서 본 영화들에는 애틋함이 있다. 그 시절 영화들이 재개봉하면 영화관으로 예전의 나를 만나러 간다.
왕가위 감독 기획전으로 재개봉한 중경삼림을 보았다. 지금 들으면 유치한 대사는 지금 보아도 뛰어난 미장센이 잊게 해 준다. 예술은소수의 천재와 흥망성쇠를 함께 하는 게 아닌가 싶다. 화양연화의 미장센과 음악이 완성도 높고 절제되었다면, 중경삼림의 흔들리는 앵글 안에는 낭만적 혼돈이 있다. 90년대 호황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는 특유의 여유와 낭만이 넘친다.
세기말을 훌쩍 지난 지금 세상은 점점 넘쳐나지만 그게 여유와 낭만은 아니다. 우리는 좀 더 빨리 갈 수 있음에도 바빠졌고 넘쳐나는 사진 속에 낭만은 없다. 페이와 663의 미묘함이 섞여 흐르던 시장의 후텁지근한 공기는 영화에만 남아있다.그렇기에 예술이 더욱 의미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