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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경 Nov 03. 2024

예술이 밥 먹여주냐고?

예술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마들렌 같다. 최근에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 『환야』의 배경은 황금기를 지나 밀레니엄을 맞이하는 일본이다. 경제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사람들은 황폐했다. 덕분에 직접 겪은 적 없는 시대를 엿봤다. 지난주 EBS 일요영화에서는 <첨밀밀>을 방영해 줬다. 가본 적 없는 1980-90년대 후반 낭만과 혼돈이 뒤섞인 홍콩을 보여주었다. 일요일 오후  쓸 땐 기리보이의 <산책>이나 <물>을 틀어 놓곤 한다. 평온했던 감성을 불러와 평온을 품은 글을 쓸 수 있게 도와준다. 대청마루에 누워 덜덜 거리는 선풍기 소리를 들으며 부지런히 내리는 비를 멍하니 보는 여름감성일 땐 <기쿠지로의 여름> O.S.T를 듣는다. 예술은 단선적인 시간 흐름으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킨다.


이미지 중심의 작품에는 유독 시간을 초월하는 힘이 있다. 이미지 중심 작품서사나 사건, 인물이 중요성이 낮아서 특정 감성을 포용력 있게 불러기 때문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으면 눈 내리는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경이 떠오른다. 아무도 없는 눈 덮인 들판엔 나무 한 그루만 덩그러니 서 있다. 그리고 영화나 음악에 비해 문학은 개인이 독자적이고 주체적으로 작품 이미지를 수용하기 때문에 특정 감성을 소환하기 수월하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반갑다. 언어적, 문화적 장벽이 없는 한국 문학의 저변을 조금이나마 넓혀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소설 『롤리타』에는 "YOU LIE-SHE'S NOT.""JULY  WAS HOT."을 비롯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정성스러운 언어유희가 담겼다. 역자의 각주 덕분에 유희를 알아들었다. 블라디미르는 험버트를 통해 1940년대 미국에 만연했던 정신분석학을 수시로 비꼰다. 재치 있는 랩가사 펀치라인 같다. 영어를 충분히 잘한다고 해도 원서만으로는 정성을 다 알아 읽을 순 없다. 공감대가 없 뉘앙스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문화적 공감대가 있는 작가가 한글로 써준 문학이 얼마나 귀한가.


국적 외에 공통점이 없는 사람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내게 감흥을 주지 못한다. 그녀의 인류애적 감수성이 오히려 와닿는다. 그녀는 세계 곳 전쟁으로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기자회견을 마다했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라는 문장은 우연히 쓰이지 않았다. 5.18에 대해 많은 주장을 담은 비문학 텍스트와 달리 그녀의 『소년이 온다』의 문장은 간접적이지만 진하게 다가온다.

https://brunch.co.kr/@f0915a0762ff407/116


반면 한국 영화계 저은 좁아지고 있다. 국내 최대 독립영화제인 서울독립영화제 내년 예산이 전액 삭감되었다. 여백이 가득한 영화가 보고 싶을 때, 독립영화 말고 대체재가 없다. 사회적으로도 의문이다. 세계에서 가끔 주목하는 한국 영상 콘텐츠의 토대는 다양하고 실험적인 작품들이며, 다양하고 실험적인 작품들은 신인 감독들에게서 나온다. 신인 감독들의 등용문이 바로 독립영화제다. 봉준호, 김성수, 류승완 감독 모두 서울독립영화제 출신이다. 문화적 공감대가 있는 감독이 자막 볼 필요 없이 만들어준 영화가 얼마나 귀한가. 아쉽다. 차곡차곡 담아둔 예술은 해방구가 되니까.


"자존심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잖아."

"자존심이 밥 먹이 주는 거 아니지. 그런데 그때는 사람이 밥만 먹고 사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

- 장강명의  『산 자들』 중에서 -





* 사진 : https://m.choroc.com/goods/WG018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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