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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가 바람이 될 때

by 주경

최근 일요일에도 해야 할 일이 머릿속에서 떠다녔다. 누워만 있다가 저녁에 회사에 가곤 했다. 오늘은 온전히 쉴 수 있는 일요일이라 커피를 내려 서재에 왔다. 책들이 보인다. 가장 오래된 책이 뭘까? 『프랑스혁명사』인가? 『군주론』인가? 『수상록』도 눈에 들어온다. 제목을 훑으면 서재에 틀어박혀 한 단어씩 쓰고 지우는 저자들이 떠오른다. 한 줄 한 줄 읽고 싶은 충동이 든다. 언제쯤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는 날이 올까. 아직은 불편 없이 활자를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인지능력이 있어 다행이다.


지난주 월요일 점심에는 혼자 호수공원에 갔다. 23~28도는 공원 잔디 위에 돗자리를 펴고 누워있기 최적 기온이다. 누워서 하늘을 보다가 문득 남은 생에 내가 이런 피크닉을 몇 번이나 올 수 있을까 궁금했다. 비가 오지 않고, 공기질이 나쁘지 않고 선약이 없는 봄-가을 점심을 몇 번이나 맞이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순간이 소중히 다가왔다. 이해할 수 없는 업무와 공감할 수 없는 이기와 관심 없는 소음에 둘러 쌓여있을 때 몇 시간 뒤면 혼자 하늘을 보고 누워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힘이 된다. 하늘을 보며 누워있을 때면 공기 같던 자유가 바람처럼 체감된다.


주말에 비가 왔다면 피크닉 가기 전 월요일 열 시쯤에 공원 관리부서에 파라솔이 다시 펴졌는지 전화를 해야 한다. 담당자만이 공원 파라솔을 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루틴이 누군가를 충족시킨다. 내 루틴은 누군가를 어떻게 충족시키고,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업무와 이기 그리고 소음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집착하며 읽는 시기가 온다. 그 시기에 일정량의 활자를 읽지 않으면 갈증이 난다. 손에 책이 없으면 칼럼이라도 읽어야 한다. 일정량의 활자를 읽고 나면 뭐라도 쓰고 욕구가 생긴다. 뭐라도 쓰고 나면 더 읽고 싶어진다. 다행이다. 세상엔 바다만큼 넘치는 활자가 있어서. 이 마음을 담아 지난가을 <헤어질 결심> 굿즈 책갈피를 잃어버려서 금속 책갈피를 제작 주문했다. 새 책갈피에 '유한일생 무한유희'라고 새겼다.


인간은 스러지지만 책은 남는다. 덕분에 인류는 유한을 무한히 이어나간다. 책이 없다면 인간은 저장 기능 없는 캐릭터 성장형 게임을 하는 셈이다. 자고 읽어 나면 레벨이 초기화되겠지. 몽테뉴도 마키아벨리도 소불도 다 스러졌다. 누군가가 그들의 발자국에 이어 계속 앞으로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고마울 뿐이다. 스러져간 이들의 일상에도 업무와 이기와 소음이 있었을까. 그들은 여한 없이 읽고 쓰다 갔을까.




공원에서 바람을 느낄 때만 아껴 듣는 음악이다.

https://youtu.be/gJTiZZKis0Y?si=eKcDwOj0EHPCZ5qR

에픽하이 - Oceans. Sand. Tre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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