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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던 일기를 쓰지 못했다.

"산회를 선포합니다."

by 주경


이상으로 국무위원후보자 인사청문회를 모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위원님 여러분 수고 많으셨습니다.
장시간 답변하느라 고생한 ㅇㅇㅇ 후보자와 정부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ㅇㅇㅇ 수석전문위원 및 보좌진 등 국회 직원 여러분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산회를 선포합니다.

- 인사청문회의록 중에서 -


드디어 끝났다. 45일 같았던 지난 19일이 스쳤다.


새 정부가 들어섰고, 내가 근무하는 부처에도 6월 말에 새로운 장관후보자가 내정되었다. 장관 후보자가 내정되면 인사팀을 중심으로 재무팀, 감사실이 3일 안에 인사청문회 요청안을 국회에 제출해야 한다. 인사청문회 요청안이 국회에 제출되면 20일 이내에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가 열린다. 인사청문회 요청안을 제출하고 인사청문회가 열리기 전 20일간 해당 부처 공무원들은 소관에 따라 국회에서 요청하는 개별자료, 사전자료제출요구서, 서면질의요구서, 구두질의요구서에 대응해야 한다. 요청 자료가 많다. 예를 들어 부처에 요구된 서면질의요구만 1,200건이었다.


내 일상도 인사청문회로 채워졌다. 연일 새벽 2~3시 퇴근을 하면서 예전 격무부서에서 근무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12시에 퇴근하며 오늘은 사람답게 잘 수 있다고 좋아한 날에는 새벽 한 시에 다시 불려 나와 세시까지 일하고 들어갔다. 주말에도 밤 11시에 누웠으나 업무 연락을 받고 새벽 3시까지 재택근무 했다.


2017년 입직하고 나서 업무 때문에 받는 하루하루 날짜만 바뀐다는 느낌을 지우려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후로 거른 적이 없던 일기를 처음으로 걸렀다. 청문회가 임박했다는 막연한 불안에 6월 내내 브런치에 글 하나 올리지 못했다.


일기를 빠트렸다는 것은 일상을 놓치고 있다는 의미다.

2025.7.7. 일기


두 가지 생각이 힘이 됐다. 청문회 기한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과 인사청문회 의미다. 인사청문회는 후보자의 업무수행 능력, 자질 및 도덕성, 준법성, 책임성을 국회가 국민을 대신해 다각적으로 검증하는 제도다. 삼권분립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사회에서는 누릴 수 없는 검증 기회다. 민주사회 시스템에 꼭 필요한 제도기 때문에 의미 있는 일이다. 무의미는 허무를 주지만, 의미는 동력을 준다.


장마마다 읽던 하루키를 읽지 못했다. 대신 퇴근 후 호텔에서 잊지 않고 챙겨간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독본>을 읽었다. 피곤해서 책을 펼치지 못하고 불 켜둔 채 잠든 날도 있었지만 앞으로 <소설독본>을 접할 때면 올해 인사청문회를 떠올릴 것이다. 임시 사무소 건물 1층에 나인블럭 네오 원두의 산미도 장마와 함께 생각나겠지. 다시 일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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