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평론
우아하다. 박찬욱 감독은 경지에 올랐다. 무엇을 들려줘야 관객에게 여운을 남기는지, 어떻게 해야 아름답게 담기는지 공식이라도 발견한 건 아닌가 싶다. 헤어질 결심은 남편 살인사건 피의자인 송서래와 담당 형사 장해준의 멜로 영화다.
나는 영화가 종합예술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며 매주 영화를 보고, 인생 영화도 여럿 꼽을 수 있지만, N회차 관람객을 이해 못 한다. 하지만 헤어질 결심은 두 번 봤다.
* 스포일러 포함
해준은 서래가 꼿꼿하고 올곧은 사람이라서,
서래는 해준이 품위가 있는 사람이라서 좋다고 했다.
서래가 밀물과 함께 바닷속에 잠겼고, 해준이 차오르는 바닷물 위에서 서래를 찾아 헤매며 영화는 막이 내린다.
여운이 남는 대사 세 개를 추려 헤어질 결심이 들려준 이야기를 전한다.
해준은 자신의 품위가 자부심에서 나온다고 했다. 해준은 직업적 자부심을 통해 본인의 품위를 지켜온 형사다. 그런 형사가 사랑에 눈이 멀어 수사를 망쳤고 본인은 붕괴되었다고 말한다. 해준은 서래를 믿고 사건을 자살로 종결했으나, 범인은 서래였다. 해준은 살인사건 증거물인 핸드폰을 서래에게 건넨다. 진실을 알게 되었지만 서래를 위해, 증거를 인멸하고 스스로 붕괴를 택하는 것이다.
거센 바람에 가지가 아무리 흔들려도 나무는 바로 서있을 수 있다. 품위란 어떤 일에도 꼿꼿하고 당당한 것이다. 품위를 갖춘 사람은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점이 자신에게 있고 자부심에서 비롯된 자기 확신이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일이 자부심을 훼손했다면 당사자는 붕괴될 수밖에 없다. 자부심과 품격으로 거센 바람을 버틴 사람일수록 뿌리와도 같은 자부심 붕괴는 견디기 힘들다. 그런 이에게 자부심 붕괴는 죽음과 별다르지 않을 수 있다.
해준을 보면서 칸트의 도덕적 삶의 기준이 떠올랐다. 칸트에게 도덕이란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의무와 책임을 다한다 함은 자신의 의지에 따른 선을 실천하는 것이다.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닌, 본인 의지에 따라 선을 실천하기 때문에 더 빛나고 어려운 상황일수록 더욱 값지다. 승진에 도움도 안 되는 미결 사건에 그만 집착하라고 주위에서 만류해도, 해준은 미결사건의 범인은 당연히 잡아야 하니까 잡는다. 이런 직업적 사명은 칸트의 도덕률을 지키며 살았던 해준에겐 품격을 지탱해 주던 뿌리였다.
결정적 증거가 되는 핸드폰을 바다에 버리라는 해준의 말이다. 살인사건 증거물이었던 핸드폰은 사랑의 징표가 된다. 저 말은 본인 직업윤리까지 망치면서 서래를 지키겠다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진실을 알게 된 이상 서래와 함께 할 수 없다는 이별통보다. 반면 서래의 사랑은 이때 시작된다. 서래는 이별 후에도 핸드폰을 바다에 버리라는 음성파일을 되뇌며 해준을 곱씹는다.
우아하다. 절절함을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아 여운이 남는다. 말보다 중요한 건 마음이고, 마음보다 중요한 것은 행동이다. 헤어질 결심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 시인의 말하기 방식을 따른다.
서래가 해준의 관할 구역에서 재차 살인 용의자가 되어 나타나자 해준은 자신이 만만하냐고 다그친다. 서래는 본인이 그렇게 나쁘냐고 물으며 울먹인다. 살인이라도 하지 않으면 해준을 만날 수가 없어서 두 번째 남편을 죽였다고 했지만, 사실 두 번째 남편이 수사를 무마한 해준을 협박하려 했기 때문에 서래는 해준을 위해 남편을 죽게 만든 것이다.
또한 서래는 죽음도 불사하며 해준을 붕괴 이전으로 되돌리려 한다. 증거물을 돌려주고 본인이 사라짐으로써 해준이 사건을 바로잡아 다시 품위 있는 형사가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서래를 지키기 위해 해준의 정체성은 죽었고, 그런 해준을 되살리기 위해 서래는 죽음을 택했다.
이어서 영화가 해준과 서래의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담았는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헤어질 결심은 안갯속 잘 짜인 대칭구조 영화다.
헤어질 결심은 산에서 바다로 가는 영화다. 산은 해준을, 바다는 서래를 암시한다. 영화 1부에서는 해준의 시선에서 서래를 바라보는 산 이야기, 2부는 해준이 서래에게 가는 바다이야기로 볼 수 있다.
핸드폰을 부수거나 소각시키지 않고 하필 '바다에 아무도 모르게' 버리라고 하는 대사에는 의도가 있다. 시나리오를 쓴 정서경 작가는 핸드폰이 깨지거나 불타 없어지 않고 바다 깊은 곳의 둘만 아는 사랑으로 비치길 원했다고 한다. 핸드폰을 아무도 모르게 바다에 던지라고 한 해준의 말에 서래는 바다에 잠겼고, 해준은 영영 서래를 찾아 헤맬 것이다.
또한 구소산은 서래의 첫 번째 남편인 기도수를, 호미산은 해준을 의미한다. 구소산에서 서래는 남편을 밀어 죽이고, 호미산에서 서래는 해준과 함께 어머니 유골을 뿌린다. 항일운동 국가유공자인 외할아버지가 서래에게 호미산을 물려줬지만, 국가는 서래의 소유권을 부정했다. 사랑하지만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존재인 해준과 호미산은 닮았다.
해준은 미결 사건에 집착한다. 미결 사건 기록과 사진들을 벽에 붙여 놓고 잊지 못한다. 미결은 해준에겐 불면증이다. 이를 잘 아는 서래는 사건이 해결될 때마다 관련 사진과 기록을 대신 불태워주고 해준에게 숙면을 선사한다. 잠복중, 차량 동행중의 숙면에도 서래가 있다.
서래는 전남편의 자살로 종결됐던 사건을 다시 미결로 되돌리면서 사랑도 미결로 남긴다. 서래가 핸드폰을 해준에게 건네고 바다에 잠김으로써 해준은 붕괴된 자아를 되찾겠지만, 본인은 해준의 발 밑에 미결로 남음으로써 해준에게 잊혀지지 않으려 한다. 벽에 본인 사진을 붙여놓고, 잠도 못 자면서 본인 생각만 하라고 해준에게 말한다. 현실적으로 이뤄지기 어려운 사랑은 미결로 남겨짐으로써 영원한 진행형이 된다.
헤어질 결심은 안개 같은 모호함을 테마로 삼는다. 초반부 해준의 시선이 명목상 잠복이지만 실제로는 서래를 걱정하는 시선인 것처럼, 영화는 수사물인 듯 보이지만 멜로다.
서래가 이포에서 입은 드레스는 보는 사람에 따라 파란색이나 녹색으로 보이는데, 이는 범인인 것 같기도 하고 연인인 것 같기도 한 모호함을 나타낸다.
이 외에도 질곡동 살인사건 범인의 대사는 해준의 속내를 암시하고, 서래가 주로 보는 드라마 대사가 현실에서 차용되고, 진심을 전할 때는 번역앱 목소리가 여성으로 바뀌는 등 곳곳에 박찬욱 감독의 섬세한 의도가 담겨있다. 곱씹을 맛이 있는 영화다.
특히 해준이 소용돌이치는 파도 속에서 서래를 찾아 헤매는 마지막 장면은 영화관에서 봐야 한다. 정서경 작가조차 화면에 그렇게 담길 줄 몰랐다고 한다.
뻔한 흥행 공식을 따르지 않고 우아한 영화를 만들어준 박찬욱 감독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박찬욱 감독이기에 이런 다양성 가득한 영화를 상영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11.8일까지 돌비 시네마 5개 지점에서 헤어질 결심이 재개봉한다. 세 번째 볼 결심과 함께 내 인생 영화 리뷰를 마친다. 마침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