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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경 Jun 18. 2023

주말 산책

을 거를 수 없는 이유


퇴근길에 강을 건넌다. 운이 좋아 노을이 짙게 물드는 날이면 석양을 등지다리를 지날 수 있다. 강 하나 넘었을 뿐이지만 왠지 세상의 허상과 소음을 씻어내고 조금은 차단해 버렸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껏 안온해진다. 남몰래 찾아 들어온 무인도 같다. 비슷한 감정을 주말에 산책하면서 느낀다.


집 주변 하천을 따라 정비 산책길을 걷는다. 시간을 정해두진 않고 해질녘에 산책할 수 있을 정도로만 저녁 일정을 조율한다. 마음 내키는 곳까지 원하는 만큼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럽다. 쫓긴다는 착각에 빠져 불필요하게 전력질주 해대는 세상을 관조한다. 목적 없는 걸음 내 삶이 유영하는 듯한 여유를 담는다.


산책은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 주거나 신선한 생각도 던져준다. 주제를 정해놓고 걸으며 생각을 정리할 때도 있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꼬꼬무하며 자문자답할 때도 있다.  뇌과학교양철학 책에서 신선한 생각이나 통찰은 무의식인 행동을 할 때 잘 떠오른다는 내용을 보았다. 샤워나 산책 등 무의식적인 행동을 하면서 기발한 생각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공감한다. 출퇴근이나 샤워할 때 또는 산책 중에 복잡했던 머릿속이 정리되기도 하고 읽은 책이 선명하게 다가오기도 하고 새로운 발상이나 글감이 떠오르곤 했다. 예전에는 술자리 가기 전 주제를 하나씩 준비해 가서 술 마시며 상대방과 의견을 나누기도 했는데, 술을 끊은 후에는 산책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산책은 그 자체로도 자연스러워서 좋다. 산책하면서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를 고 미묘하게 달라진 초여름선선함을 맡으며 들판 위 무심히 핀 꽃과 매번 다른 표정을 짓는 하늘을 담는다. 자연에 한발 한발 내딛으며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저 산책로를 걸을 뿐인데 마음이 충만해질 때가 있다. 되돌아보면 주말에 자연 속에서 여유를 가지고 한걸음 한걸음 걷는 것은 쉽지만 당연하진 않다.


간혹 주말 저녁 내내 일정이 있어 산책을 못할 때가 있다. 주말을 그렇게 보낸 일요일을 밤에는 침대에 누워도 머릿속이 정돈되지 않는다. 기껏 뽀송뽀송하게 말린 옷가지를 서랍에 구분 없이 쑤셔 넣고 억지로 닫아둔 기분이다. 초점이 어긋나거나 구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들을 지우다만 것만 같다. 이제 산책은 주말에 커피 내려마시기와 더불어 포기 못하는 루틴이다.


내게 산책은 허기나 대충 떨쳐내려는 영양섭취가 아니라, 순간과 과정에 집중하며 먹는 정찬에 가깝다. 단축해야 할 기록이나 일률적인 목적지가 없다. 삶이 어디쯤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음미하여 속도와 방향을 느끼는 내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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