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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리우스 이안 Jul 16. 2021

연필의 위엄

1 휴식은 있어도 탈주는 없다

  

  지난해 2월 친구가 택배를 보냈다. 꽃다발 같은 연필 한 아름, 편지와 달달한 간식이 담긴 선물상자를.

  친구 덕분에 만년필의 세계에 들어선 나는 그 옆에 위치한 연필의 세계 역시 훌륭하다는 걸 막 알아차렸을 때였다. 다양한 분야를 잘 아는 나의 친구 J에게 연필에 관심이 생겼다고 말하니 그가 좋은 연필들을 엄선해서 보내준 것이다.      


  연필들을 꺼내보았다. 아주 어렸을 때 사용했던 연필의 사각거림만 기억하는 나에게는 생소하면서 신비로웠다. 파란색, 초록색, 형광색, 검은색, 노란색, 갈색 등 바디컬러가 다양했고 만들어진 나라도 다양했다. 우리나라, 포르투갈, 독일, 스위스 등에서 생산한 연필들이 내 책상 위에 모여 있었다.

  이때까지 연필의 매력을 모르고 살았던 게 아까울 정도로 나는 연필 한 자루 한 자루가 그 자리에서 좋아졌다. 지퍼백에 예쁘게 담겨 있는 연필을 하나씩 꺼내 보면서 얼핏 봐도 특징이 다 다름에 놀랐다. 한 가지 종류로만 이루어진 꽃다발도 아름답지만 여러 종류로 이루어진 꽃다발은 다른 느낌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물론 친구가 한 종류로 12자루를 보냈다면 나는 그것에 반했을 것이다.

  첫인상이 참 중요하듯 그가 내게 열두 종류가 넘는 연필을 보여주었기에 나는 이 다채로움에 반해버렸다. 만일 전자의 경우였다면 브랜드 하나에 먼저 몰두했을 것이고, 다채로움을 나중에 알았을 것이다. 그것도 괜찮지만 나는 첫인상에 영향을 많이 받으니 다양한 연필의 세계가 처음부터 중요해졌다.      


  어쩌면 만년필의 세계가 깊고 넓다는 걸 앞서 보여준 것처럼 연필의 세계도 그러하다는 걸 한눈에 보여주려는 친구의 큰 그림이 아니었을까. 늘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도와주는 친구에게 감사를 전한다. 그대의 눈썰미에 치얼스. 방대한 자료수집과 핵심 내용 브리핑을 단숨에 해준 수고로움에 한 번 더 치얼스.


  연필의 위엄은 이렇게 시작한다. 마음에 드는 연필 하나를 손에 쥐면 끝없는 시작을 체감하게 된다. 넓고 지고지순한 연필의 세계에 들어서게 되고, 연필에 대한 열정이 잠시 식을 수는 있어도 그곳을 빠져나갈 생각이 들지는 않게 한다. 처음과 끝이 한 군데에 있는 느낌. 훗날 다른 대상에 열정을 쏟더라도 어느 날 새로 나왔다는 연필이나 한정판, 단종되었다고 들었던 희귀한 연필을, 그냥 색이 예뻐서 지금 안 사면 안 될 거 같은 연필을 우연히 보게 된다면 다시 연필의 세계에 몰두하게 될 거란 이야기다.     

  필기구 마니아 생활에 휴식은 있어도 탈주는 없다. 내가 잠시 그런 시기를 겪었으니 나에게 탈주는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지난 일 년 동안 필기구 사이클이 이렇게 형성되었다. <만년필-연필-만년필-볼펜-샤프-연필> 일 년 사이에 나는 다시 연필로 돌아왔다. 그 전에는 만년필로 필기구에 입문했기에 만년필의 세계도 다시 돌아왔던 셈이다. 필기구의 세계에 이 종류들이 포함되어있기에 시작은 있어도 완전한 끝은 없다. 변주는 있어도 돌고 돌아 필기구를 골고루 사용할 것이다.


  학교를 다닐 때엔 집에 있던 볼펜 하나를 주워서 가지고 다녔는데 성인이 되고 나서 이 세계에 들어선 나 자신이 아직도 낯설다. 사람 속은 알 수 없다고 불시에 또 어떤 새로운 세상에 들어설 수 있으니 주의를 해야겠다. 이번에는 준비된 상태로 들어가고 싶어.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가면 정신이 없으니까.     

  다시 연필 이야기로. 이것도 대단하지 않은가. 연필이 눈앞에 있으면 쓰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 연필 하나로 별 이야기가 다 나온다. 그러더라도 다시 연필을 쥔 손을 집중하게 되고 필기감과 그립감에, 사각사각 소리에, 비어있던 종이를 채우는 글자에 집중하게 된다. 아무 말이나 쓰다 보면 생각나지 않았던, 무의식에만 어렴풋이 있었던 생각을 글로 적을 수 있다. ‘나한테 이런 생각, 감정, 마음이?’라는 느낌이 든다면 연필 덕분이다.


  내게는 마음에 드는 연필을 발견하는 단계가 있다. 연필을 우연히 마주하면 종이에 직선과 곡선을 그린다. 그러면 심의 진하기가 어느 정도인지 쓸 때 꺼끌꺼끌한 느낌이 드는지 부드러운지 연필을 잡을 때 편한지 조금 불편한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무 말이나 쓰고 손가락으로 연필을 잡아 휘휘 돌려보면 이게 내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 최종적으로 알 수 있다. 아주 쉽고 간단하게.     


  사람마다 선호하는 연필이 다르므로 이건 내게 편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다. 같은 걸 좋아하는 동지를 만났을 때 반갑지만 나는 친구들이 선호하는 연필과 필기구가 다 다르다는 게 좋다. 그걸 왜 좋아하는지 어떤 색 펜을 가장 많이 쓰는지 이야기하는 표정도 좋다. 작은 필기구에 담긴 이야기는 무궁무진하고 나는 그 이야기들을 들으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취향을 또 알게 된다. 서로의 관심사 범위를 확대하며 우리는 한 해를 보낸다.      


  다시 친구가 보내준 연필 이야기로. 그 많은 연필을 써보려면 이왕 제대로 하고 싶었다. 그러기에 필사가 좋을 것 같았다. 하루에 한 번 좋은 글을 새로운 연필로 적기로 했다.

  그래서 지난해 2월부터 올해 7월까지 거르지 않고 하루에 한 번 필사를 해왔다. 필사를 시작한 지 오백일이 넘었고, 로이텀 노트를 네 권째 쓰고 있다.


  작심삼일이 언제나 나를 이겼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하루도 빠짐없이 아직까지 꾸준하게 뭔가를 하고 있다니. 연필의 영향은 듀오링고에도 닿았다. 몇 년 전 이 언어교육 어플로 한창 독일어와 스페인어를 재밌게 하다가 연속 날짜를 놓쳐버려 그만두었다. 매일 10분씩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일 년이 막 되려던 그날 5분만 교육을 받았더니 연속 날짜가 허망하게 사라졌다. 먼저 독일어도 그랬고, 스페인어도 그랬다. 마의 일 년을 넘지 못하고 나는 흥이 깨져버렸다.

  잊고 지내다가 연필로 매일 필사를 한 후로 듀오를 만날 용기가 생겼다. 연속 날짜를 채우지 못한 후로 흥미를 잃은 나를 무섭게 다그쳤던 듀오. 다시는 안 만날 생각으로 듀오의 경고 알람을 무시했는데  매일 필사를 하는 습관이 3주 지속되었을 때 이 루틴도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번에는 프랑스어를 배우기로 했다. 대학 때 두 학기 동안 교양과목으로 들었으나 고양이라는 단어만 남은 프랑스어를.      


  일년이 지나 나는 드디어 불란서 말로 노란 고양이, 검은 고양이, 하얀 고양이, 빨간 고양이를 구분할 줄 안다. 480일 동안 매일 기초 프랑스어를 배웠으니까. 지금도 진행 중이다. 아직 삼색 고양이는 모르지만 언젠가 배울 것이다.


  연필은 매일 꾸준히 하는 일에 대한 내 편견을 없앴다. 평생을 나는 그런 일을 못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을 줄 알았으니. 모두가 꾸준히 무언가를 할 필요는 없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얼렁뚱땅 와장창 빙글빙글 나의 세상에 작은 질서를 가져왔기 때문에 꾸준함은 제법 중요해졌다. 방랑자는 잠시 정착해 쉴 수 있는 곳을 찾았을 때 즐거운 법.     


  끝으로 연필의 또 다른 위엄, 나는 이 글을 로디아 노트에 파버카스텔 카스텔 9000 연필로 먼저 적었다. 얼마 전 핫트랙스에 갔다가 친구가 처음 선물해준 이 연필이 우연히 보여 더 진한 심으로 사 왔다. 그런데 이 연필이 글쎄 처음 필사를 시작한 날 썼던 연필이지 않은가. 필사 노트의 첫 번째 장을 펼쳐보고 연필의 이름이 똑같은 걸 보고 이 위엄에 압도되었다. 이런 우연이! 연필의 세계의 인도함을 받는 자는 결코 길을 완전히 잃지는 않으리니. 멀리 돌아가더라도 가야 할 길을 언젠가는 갈 것이다. 다시 이 연필로 돌아왔듯이.

  연필의 세계에 아직 안 들어오신 분 어서들 오시라. 연필을 하나를 들어서 살펴보면 시작되니 어서들 오시라. 새로운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필사의 시작, 파버카스텔 카스텔 9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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