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요.
8년 전 여름, 술을 죽어라 마시던 스무 살에 존 애브넛 감독의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를 보았다. 그날부터 나는 아직까지도 이를 인생영화라고 말한다. 나보다 2년 먼저 세상에 나왔고 나보다 더 편견이 없던 그 영화를.
다정한 안부 인사 같은 “무슨 영화를 가장 좋아해요?”라는 물음에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요.”라고 대답해왔다. 좋아하는 것에 대한 범위가 이상하게 넓어서 가장 좋아하는 ( )을/를 물었을 때 늘 두세 가지 대답을 했다. 이것은 이래서 좋고 저것은 저래서 좋았다. 각자의 장점과 매력이 있는데 어떻게 하나만 고를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이 영화만큼은 단번에 답할 수 있었다. 물론 폴 페이그 감독의 <더 히트>가 그 자리를 여러 차례 둘러보고 갔지만. 지조가 조금 있는 나는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이 영화가 좋다.
똑같은 대답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어느 날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내게는 한번 빠지면 그걸 몇 번이고 다시 보는 습관이 있었다. 마음에 드는 영화가 있으면 세 번 이상은 다시 봤다. 그런 나의 습관을 거스르고 단 한 번 본 영화를 인생영화라고 해도 될까.
물론 단 한 번의 경험으로 그것이 인생 최고의 경험임을 말할 수 있다. 한 번 본 영화를, 한 번 본 책을, 한 번 가본 여행지를 인생 최고의 무언가로 정해도 된다. 그런 경험은 강렬하며 다시는 그런 감정과 열정을 느낄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을 준다.
다만 나의 경우, 나와 같은 경우에 그래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때론 ‘외않되’라는 표현이 정말 완벽하게 삶의 ‘얼렁뚱땅 와장창’이지만 어떻게든 잘 흘러가 훌륭한 결과를 보여주듯 안될 건 무엇인지 정확하게 나타내는 것처럼. 이 일도 안 될 게 뭐 있는가 싶지만. 보고 또 보는 걸 즐겨하는 사람으로서 걱정 아닌 걱정, 각성 아닌 각성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렇다. 어린이 시절 <뮬란>을 100번 정도 다시 봤다. 부모님은 다른 영화도 보여주셨지만 꼭 뮬란을 보겠다며 그것만 틀어달라고 요구했다. 커서는 <겨울왕국>을 자막 버전과 더빙 버전으로 19번 봤다. 요즘 들어 그 끈기와 고집을 좋은 곳에 사용하면 좋았으련만 하는 후회가 들지만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
예정된 마니아였던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좋아하는 드라마 장면이나 책의 구절을 몇 번이고 다시 봤다. 마음에 든 음악은 하루 종일 그것만 들었다. 그거 아시는가. 봤던 영상을 또 보면 이전에는 못 보았던 부분들을 볼 수 있다. 가령 두 인물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말하는 사람이 아닌 듣는 사람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있다. 처음 볼 때는 말하는 사람에 집중하느라고 주변을 잘 안 보니까. 주변의 인물들과 분위기도 함께 그 장면에서 박수갈채를 만들어낸다.
그냥 대사가 좋아서 분위기가 좋아서 눈빛이 좋아서 보고 또 봤다. 그러면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벅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열심히 살지 않아도 등장인물이 멋지게 잘 살고 있으니 대신 뿌듯한 마음도 있고, ‘저 순간에 저런 판단을 하다니!’ 하는 감탄도 있었다. 하긴 좋아하는 데 이유가 있는가. 이유가 많을 때도 확실히 없을 때도 있다. 어떠한 단어로 표현 못해도 추상적으로 좋아하는 마음이 있기도 하니까.
그런데 왜 이 영화를 한 번만 보고 제일 좋아하는 영화라고 해왔던가. 이유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마음에 들었던 것 같은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인생을 걸고 말할 때는 그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추상적인 마음을 좀 더 정확히 추적해보기로 했다. 좋아하는 작품을 생각하면 몇몇 장면들이 바로 떠올랐다. 그 장면들의 이미지가 얼마나 오래 마음에 남아있느냐가 좋아하는 작품의 정도를 정한다. 따뜻하고 산뜻한 느낌을 주는 이미지도 있지만 충격적이어서 기억에 남는 이미지가 있다.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에서는 세 가지 이미지가 내게 남았다. 한 사람이 양로원에서 어르신의 이야기를 듣는 장면, 잇지와 루스가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 죄 없는 사람이 차별과 폭행을 당해 등에 깊은 상처가 난 장면. 그 세 장면만이 내가 기억하는 프그토(줄여서)였다. 차별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과 그 상황에서도 편견에 굴복하지 않는 형형한 눈빛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의지하는 모습이 남았다.
어떤 사람들은 작품을 한 번만 보고 다시 보지 않는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나처럼 작품을 한 번만 보지 않는다고 한다. 내 의문은 후자에 속하는 것이다. 여러 번 보는 걸 선호하는 사람으로서 딱 한 번 본 작품을 인생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선정해도 되는가 하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다.
그럼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프그토를 보면 되는 게 아닌가. 시도를 하지 않았던 건 작품에서 슬픈 부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슬픈 부분들보다는 좋았던 부분들만 기억하고 싶었다. 그렇다. 이건 핑계다. 물론 머지않아 내 인생을 가져다붙인 영화를 다시 볼 것이다. 지금 당장 실행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다시 보았을 때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영화가 느껴진다면 1) 실은 내 착각이었을 수 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완전히 달라서 이전처럼 만족하지 않을 수도 있다. 2)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것처럼 말하고 다닌 게 창피하다. 3. 환상이 깨진 후 나는 새로운 인생영화를 찾아야 한다. 4. 합리화의 끝. 진짜로 안 될 게 뭐가 있는가. 별일이라고. 그냥 인생영화라고 편하게 얘기하라.
이 네 가지 중 하나라도 걸릴까 봐 두려운 거다. 인생영화의 답을 갱신해야 할 때가 온 걸지도 모른다. 그 기한을 연장하거나 새로 바꾸어야 할 수도 있다. 별일 아니면서도 별일인 걱정이다. 나 같은 분 또 계시는가. 이 넓은 지구에서 나와 같은 걱정 아닌 걱정을 하시는 분이 어딘가에서 작은 의문을 지니고 있을 지도.
어쩌면 다음 글에서는 결국 프그토를 두 번째 본 소감을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그래도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정확히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일상에서 우연히 인지한 일에 대해 쓴 에세이인가 감상문인가. 얼렁뚱땅 넘어가는 와중에 결론이 이미 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