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

2025.12.15

by conair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대표적인 실존주의 작가 카뮈의 ‘이방인’ 첫 구절이다. 엄마가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고 엄마의 죽음에 별 다른 슬픔도 느끼지 못하며, 엄마의 장례식 날 항구의 해변가에서 우연히 만난 낯선 여인과 잠자리를 하고, 살인동기로 ‘태양 때문입니다’라고 답하는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부조리’의 상징인지도 모른다. 아니, ‘부조리’에 온몸으로 맞서고 있는 불행한 ‘우리’ 일지도 모른다.


영어를 잘해서가 아니라, 영문학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단지, 언론사 기자나 피디가 되려면 유리한 학과가 영어영문학과나 국어국문학과라는 고3 담임 선생님의 진학지도 때문에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그렇게 어설프게 영문학도가 된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대학시절 배운 강렬한 한 단어는 단연 ‘부조리’다. 그렇지 않았으면 대단히 어려웠을 영어단어 ‘absurdity’는 나에게 대단히 기본적이고 친숙한 단어가 되었다.


‘부조리(不條理)는 불합리·배리(背理)·모순·불가해(不可解) 등을 뜻하는 단어로서, 철학에서는 의미를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을 뜻한다고 위키백과에서는 말한다. 영문학도로서 배운 것을 떠올려 보면 시치프스신화에 나오는 시치프스가 처한 상황이 부조리한 상황을 가장 잘 대변한다. 시치프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코린토스의 왕이다. 제우스의 분노를 사 저승에 가게 되지만 저승의 신 하데스를 속이고 이승으로 와 삶의 기쁨을 누리던 시치프스는 결국 '타나토스'의 손에 끌려 저승으로 가게 된다. 저승에는 가혹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데스'는 기슭에 있는 큰 바위를 높은 바위산으로 굴려 올려 바위가 늘 그 꼭대기에 있게 하라고 명했다. 시치프스가 온 힘을 다해 꼭대기로 굴려 올린 바위는 하염없이 아래로 추락한다. 그럼 다시 굴려 올린다. 또 떨어진다. 영겁의 시간 동안 이 일을 계속해야 한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시치프스는 잘못이 없다. ‘아폴론’의 소를 훔친 도둑 ‘헤르메스’를 고발한 것이 잘못인가? 사랑하는 딸 '아이기나'의 실종에 천근 같은 한숨을 내쉬고 있는 강의 신 ‘아소포스’에게 독수리로 둔갑한 제우스가 납치해 갔다고 일러 준 것이 잘못인가? 도둑과 납치범을 벌하는 것은 정의로운 일이다. 그럼에도 절대자인 제우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이유로 끝남이 없는 ‘삽질’을 해야 하는 가혹한 형벌을 받는 상황, 바로 이 상황이 현대인이 처한 부조리한 상황이다. 나의 불행은 나의 잘못이 아님에도 나의 잘못이라고 비난받아야 하는 사회. 그보다 더 부조리한 것은 나조차도 나의 불행이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상황. 일요일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나면 나태해지고 성실하지 못한 내가 된 것 같아 왠지 찝찝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사회.


다시 대학교의 희미한 기억을 되살려 보면 이 부조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딱 한 가지 방법은 ‘sincerity’이다. 부조리한 상황을 만든 신조차도 지치게 만드는 ‘성실함’. 이것뿐이라고 배운 것 같다. 정재찬 교수는 그의 저서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에서 ‘설탕처럼 달지 않은 인생이라도 끝까지 묵묵히 사는 게 인생이며, 식빵 가장자리를 떼어버리지 말아야 하듯 고통이라고 해서 그것을 인생으로부터 제거하려 해도 안됩니다. 죽을 때까지 밥을 먹듯, 죽기까지 성실하게 사는 것, 그것이 인생입니다.’라고 말한다.


정말 제우스는 부조리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바위를 굴려 올리면서 심지어 그것을 즐기기까지 하는 ‘반항’을 하는 시치프스에게 사면을 내릴 것인가? 그런 신이 우리에게 필요는 한 것인가? 인간이 ‘부조리’를 극복하는 방법은 정말 그런 ‘반항’밖에는 없는 것인가?


지금은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한 밤중에 강도들이 들어와서는 남편을 묶어 놓고 남편이 보는 앞에서 부인을 차례로 윤간한다. 남편은 ‘당신은 미친개에게 물린 것이다. 당신의 잘못은 없다’라면서 부인을 위로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남편은 밤이 되면 부정한 여자라며 부인에게 폭력을 가한다. 정신을 차리고선 후회하며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지만 폭력은 멈춰지지 않는다. 이성과 감성의 시간이 교차한다.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은 아들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다. 교회에 다니면서 겨우 마음을 다 잡고 자식을 죽인 살인자에게 용서를 말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아간다. 하지만 그 범인은 뻔뻔하게도 아직도 아들 잃은 슬픔에서, 아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그 어미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하느님이 죄지은 자기를 용서해서 하루하루 감사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이미 저를 용서하셨습니다’라고 말하는 부조리한 상황에서 어미는 억장이 무너지고 납득이 되지 않아 할 말을 잃었다. 돌아와 울부짖는다. ‘이미 용서를 얻었는데, 내가 어떻게 다시 용서해요?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느님이 먼저 용서할 수 있어요?’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고통을 주는 신이 존재하는 사회. 시련은 신이 당신을 단련케 하기 위해 주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단련은커녕 삶과 존재의 의미조차 잃어버리게 만드는 시련. 이성으로 도저히 제어가 되지 못하는 끔찍한 상황을 만드는 신. 우리에게 그런 신이 정말 필요하기는 한 것인가? 그러한 ‘부조리’를 우리는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가? 쿼바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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