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과 롱샷

2026. 03. 05

by conair

‘나 당신 친구들 모임 같이 가기 싫어’ ‘ 에잉, 왜?’‘실제로는 잘 지내지 않으면서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기 싫어’‘원래 다들 쇼윈도 부부로 사는 거야’


일요일 밤 아내와 함께 애완견을 데리고 한 시간 가까이 산책을 하다가 갑자기 농담처럼(?)나눈 대화다. 이 대화의 내용대로라면 같이 산책도 안 할 것 같은데 그래도 같이 산책은 하니 심각하지는 않은 거라고 예단하고 농담처럼 반응을 했지만, 왠지 안사람의 진짜 심정이 정말 어떤지 걱정되기도 했다. 우리는 정말 쇼윈도 부부일까?


가끔씩 아내는 자신이 남편에게 너무 순종적이라는 말을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다고 불평을 한다. 부부모임을 하고 난 후 ‘그래도 당신이 최고야’라는 말을 자주 해 주는 아내였기에 그냥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당신이 순종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존중하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이겠지’가 나의 변명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밖에서 나의 흉을 보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나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아내가 다른 사람 앞에서 나의 흉을 보지 않아서 남들의 눈에는 아내가 순종적으로 보였을 수 있다. 자존감이 높아야 하는데 자존심만 높은 남편은 아닌지 돌이켜 보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몇 개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고 한다. 전문용어로 페르소나(persona)다. ‘실제 성격 또는 개인적인 성격과는 다른 한 사람의 특정한 성격’이라는 뜻도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페르소나의 의미는 가면이다. 이는 타인과의 사회적인 상호작용을 위하여 만들어낸, 성격이나 이미지 등을 의미한다. 아내가 나에게 갖고 있는 불만 중 하나가 바로 나의 페르소나이다.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대단히 다정하고 친절한 가면을 왜 집에서는 쓰지 않느냐고 불평한다. 특히 아침에 일어난 직후 이런저런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나의 습관에 대해 ‘아, 아침에 피곤해서 그렇구나’라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아내에게는 전혀 없다.


결혼을 하게 되면 연애를 할 때는 보지 못했던 일들이 보이게 되고 그러한 ‘보임’ 때문에 결혼은 비극이 되기도 한다. “인생은 가까이(클로즈업)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롱샷) 보면 희극이다.”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멀리서 동경과 환상으로 보던 연애 시절의 파트너가 클로즈업으로 다가오는 결혼시절엔 결점과 허점 투성이로 가득 차 있다.

이와는 별개로 결혼 생활을 하다 보면 나의 행복이 상대방의 불행이 되는 경우가 많다. 내가 편하면 상대가 불편하게 되고 내가 여유가 있으면 상대는 바쁘게 된다. 그래서 결혼생활도 타협과 양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적절한 타협과 양보가 불가능한 일들이 많아지면 불만은 가중되고 의사는 불통이 되며 결국 결혼생활은 파국을 맞게 된다. 정치에만 타협과 양보가 필요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오랜 결혼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는 것처럼 나의 행복을 포기할 만큼 상대방을 사랑하는 일은 너무나 어렵다. 그래서 사랑은 어려운 것이다.


학부모들을 상담해 보면 의외로 자신의 아이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자식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 오해를 해서 선생님이 자신의 아이를 편견을 가지고 보고 있다고 서운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자식의 장점을 못 보고 어린아이 취급을 하는 부모들도 많다. 다른 아이들은 다들 의젓하고 모범적인데 자신의 아이만 아직 철이 덜 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곤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을 내뱉고야 만다. ‘누구누구 좀 닮아라.’ ‘누구누구 반만큼이라도 해봐라.’ ‘누구누구는 또 반에서 1등 했단다.’ ‘너는 맨날 그런 친구들만 사귀니.’

아이가 사춘기로 접어든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집에 들어가면 아내와 아들이 한 판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내는 아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 너무 화가 난다고 한다. 워낙 애처가(?)인 나는 항상 아내 편을 들었던 것 같다. 심지어 아들은 아빠가 엄마와 미리 짜고 똑같은 말로 자신을 나무란다고 투덜대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한 번도 없었을 정도로 아이에 대한 생각은 아내와 같았으며 교육에 대한 생각도 거의 일치했었다. 그런데 그런 나의 아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리더십이 뛰어나고 사교성이 좋은 아이로 인정받고 있었으며 반에서 실장도 하고 있었으니, 나와 아내는 아이를 너무 클로즈업해서 보기만 하고 롱샷으로 멀리서 지켜보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한편, 자신의 부모를 존경하는 아이는 극히 드물다. 사회에서 어느 정도 지위와 명예를 갖추고 존경받는 부모도 집에서는 찌질한 소시민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한양대학교 정재찬교수가 쓴 책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반면에 또 우리 자녀들은 부모님이 당최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집안에서 바라보면 도대체 존경할 구석이라곤 하나도 안 보이는데 사회에서는 그런 부모님이 칭송을 받는다니 이걸 어찌 받아들여야 한단 말입니까. 그래서 자녀는 이렇게 그 격차를 단숨에 해소해 버립니다. 우리 부모님은 위선자야!’


교사는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고 모범적인 학생들을 많이 보기 때문에 자신의 자식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많다. 이러한 믿음 때문에 자신의 아이들이 그에 미치지 못하면 속상해하고 끊임없이 충고와 조언으로 채찍질한다. 하지만 깨달아야 한다. 자식이 더 이상 나의 조언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그저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을. 더 이상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된다.

나의 아들은 내가 근무하는 고등학교를 다녔다. 어느 날 고3인 아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진학과 학업에 대한 담임의 조언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한 참 듣고 보니 내가 늘 아들에게 하던 이야기였다. 고3 담임만 10년 이상을 한 진학 진로 베테랑인 아버지의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 잔소리였고 첫 고3을 맡은 담임의 말은 너무나 감동적이었던 것이다. 학부모 회의가 있어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모님들에게 아이가 부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더 이상 조언을 하지 말라고 부탁한다. 대신 담임선생이 부모의 입을 대신 할 수 있도록 전화를 자주 하라고 당부한다.

오늘 저녁엔 아내와 치맥이라도 하며 넌지시 물어보아야겠다. ‘당신의 행복을 위해 내가 포기해야 할 것은 뭐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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