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진

2022. 03. 13

by conair

나는 노래와 춤에 별 소질이 없다. 그럼에도 원래 가무를 즐기는 한민족의 후예여서인지 부르고 추기를 좋아는 한다. 부부동반 대학 동기들 모임은 대체로 술을 곁들인 식사 후 노래방을 가는 것이 대체적인 코스인데, 노래방 코스는 기본이 두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 넘어도 아쉬워하며 노래방을 떠나는 경우도 있다.


만약 노래와 춤 둘 중 하나를 해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춤을 출 것이다. 사실 버스킹이나 작은 연주회가 열리는 축제의 장소를 우연히 마주친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Shall we?’라며 춤 줄 것을 제안하는 나를 상상해 보기도 한다. 만약 그것이 국내가 아닌 해외라면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모리교수에게 말년의 즐거움 중 하나는 노구의 몸을 이끌고 클럽에서 춤을 추는 것이었다. 모리교수가 참 멋지다고 생각하며 클럽을 다니는 노년의 나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동시에 만약 우리나라에서 퇴임한 대학교수가 클럽에 춤을 추러 다니는 것이 가능할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클럽에서 춤추는 장면이 내 머릿속에 뚜렷이 남아있는 영화는 곽지균 감독 정보석, 강수연 주연의 ‘그 후로도 오랫동안(1989년 작)’이다. 대학 1학년 때 겪은 성폭력으로 정신적, 육체적 방황을 하고 있는 불어학원 강사 수미(강수연)는 밤이 되면 금발을 하고 클럽을 다닌다. 클럽은 그녀의 목숨을 부지해 주는 유일한 탈출구처럼 보였다.


춤추는 장면이 인상적인 영화를 꼽는다면 주저 않고 ‘여인의 향기’와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고를 것이다. ‘여인의 향기’의 시각장애인 퇴역장교 프랭크 슬레이드(알파치노)가 추는 탱고를 보면 모두 다 탱고의 매력에 흠뻑 빠져 내일이라도 당장 댄스학원에 등록하고 싶어 질 것이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본 사람이라면 붉은 석양과 흰 구름이 걸린 아프리카의 초원에서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을 배경으로 사랑하는 여인과 블루스를 추는 것을 버킷리스트에 올려놓을 것이다. 비록 내가 로버트 레드포드가 아니더라도, 내가 메릴 스트립이 아니더라도 영화 속 그 케냐에 가면 그들처럼 애틋하고 낭만적인 사랑을 할 수 있으리라 굳게 믿으면서.


2012년 풀브라이트 재단에서 보내주는 약 2달 기간의 미국 연수를 간 적이 있다. 편도 비행기 값은 지불해야 했지만 대신 매일 10달러 정도의 용돈을 받았으니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연수였다. 풀브라이트는 중등 교사뿐만 아니라 대학교수 대학생들에게도 다양한 장학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내가 다니는 학교에는 풀브라이트에서 선발해 보내주는 원어민이 매년 근무를 하고 있는데, 이들은 교육청에서 선발해 배치하는 소위 에픽 원어민 보다 수준이 높은 경우가 많다. 풀브라이트는 이런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에 우호적인 외국인들을 양성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해외연수 프로그램보다 좋았던 점은 미국의 학교에 2주 정도 견학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미국 학교를 제대로 경험하고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또 우리 문화를 전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프로그램 중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포크댄스를 배우고 ‘브로큰 스포크’라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댄스클럽을 방문한 것이다. 40명의 연수생들을 위해 클럽을 통째로 빌렸는데, 남자는 나 하나 뿐 이었다. 사실 이 연수 프로그램에 남자는 단 세 명뿐이었는데 두 명의 남자 선생님은 클럽 방문에 흥미가 없어 댄스 프로그램에 참가를 하지 않았고 덕분에 나는 많은 여선생님들과 춤을 추는 기이한 기회를 가졌다.


나에게는 아직 실현 불가능한 꿈이 하나 있다. 메디슨 스퀘어가든 30주년 콘서트 Black or White에서 마이클 잭슨이 추는 빌리진 춤을 완벽하게 재현해 보고 싶은 꿈이 그것이다. Bucharest에서 열린 the dangerous tour의 빌리진도 좋지만 내게는 메디슨 스퀘어가든의 빌리진이 압권이다. 어느 해인가 대구 동화사 승시축제 마지막 날 동화사 통일대불 앞마당에서 세기의 명공연을 소개하는 행사가 열렸다. 통일대불을 배경으로 한 대형스크린 속 공연 명장면과 해질 무렵 고즈넉한 산사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시간 이었지만 무엇보다 정목스님이 평화로운 목소리로 들려주는 시적이고 영감에 가득 찬 해설은 환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스님이 뽑은 최고의 공연도 역시 메디슨 스퀘어가든의 빌리진 이었다.


이제 일흔 중반이 되어 버린 나의 큰 누님은 말년에 춤과 사랑에 빠졌다. 나와 거의 나이차이가 20살 가까이 나다 보니 나를 업어 키우다가 시집을 가셨고 가끔씩 세상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로 나를 아껴주던 누님이다. 자주 전화를 드려 안부를 여쭈어야지 늘 생각만 하다가 오랜만에 전화를 해 요즘도 춤 추러 다니시나요 여쭈니 코로나로 전혀 다니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제 호호할매가 되어 다닐 수도 없다고 하신다. 열심히 춤추러 다니시던 말년이 인생의 전성기 였다라는 누님의 말씀이 쓸쓸하다. 그나저나 난 언제 빌리진 음악에 맞춰 춤을 출 수 있게 될까? 졸필을 줄이고 오랜만에 메디슨 스퀘어가든의 빌리진이나 감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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