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조직사이, 다시 배운 HR(#3)

#3. 피플리더의 첫번 째 실패: 하지 말았어야 할 평가

by 사람과조직사이

인하우스 피플리더로 들어가자마자 맞이한 평가 시즌,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올해는 평가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국 평가를 했다.

그리고 그 해의 평가는,

이후 몇 년 동안 회사를 괴롭히는

수많은 평가 이슈의 출발점이 되었다.


1. 이미 ‘평가를 한다’고 선언된 회사

새 회사에 합류했을 때, 평가 시즌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전사 공지에는 “올해는 평가를 실시합니다”라는 문구가 올라가 있었다.


문제는,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라는 점이었다.

회사와 각 조직 간에 합의된 목표가 없었고

각 조직 리더는 무엇을 기준으로 평가할지 몰랐다

평가권자마다 “평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도 제각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상사의 입장에서는 “평가를 무를 수는 없다”였다.

평가를 멈추자는 이야기는

대표와 주요 리더들이 계획한 모든 것을 거스르는 일이기도 했다.


피플리더가 되고 처음 맞이한 큰 이슈 앞에서

나는 이미 싸움의 판이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2. 목표도 기준도 없이, 보상을 위한 평가가 강행되다

합의된 목표가 없으니, 우리는 이렇게 평가를 설계했다.

구성원 개인이 본인이 기여한 바를 스스로 작성하도록 하고

리더가 그 내용을 바탕으로 1on1 면담을 통해 평가를 매기는 방식.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했다.

“자기 기여를 스스로 적고, 1on1으로 논의한다”는 말만 들으면

요즘 기업들이 추구하는 참여형 평가 같기도 했다.


하지만 실상은 이랬다.

무엇을 ‘기여’라고 볼지에 대한 기준이 없었고

리더마다 중요하게 보는 포인트도 제각각이었으며

평가의 목적은 솔직히 말해 “보상 테이블을 짜기 위한 점수”에 가까웠다.


이렇게 되자, 평가의 수준은

리더의 역량과 성향에 따라 완전히 달라졌다.


어떤 리더는 자기 나름의 기준을 만들어

정성껏 1on1을 진행했다.


어떤 리더는

“어차피 다 연봉 올려줄 사람 정해져 있잖아”라는 태도로

형식적인 면담만 하고 점수를 눌러 찍었다.


결국 조정위원회가 “평가 조정의 마지막 방파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리더들이 각자 매긴 점수를 토대로

조정위원회에서 논쟁을 벌이는 구조.


그 자리에서 가장 크게 작동한 기준은

안타깝게도 “공정성”이 아니라 “힘의 크기”였다.



3. “평가 기준”보다 먼저 자리 잡은 메시지

그 해 평가가 남긴 가장 큰 흔적은

‘점수’가 아니라 메시지였다.


“우리 회사 평가에서 중요한 건

결국 상사에게 얼마나 잘 보이느냐야.”


합의된 목표도, 공통 기준도 없는 평가가 반복되면

구성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메시지는 이것뿐이다.

회사 전체가 지향하는 방향은 보이지 않고

리더마다 잣대가 다르고

조정 단계에서는 특정 사업부의 의견이 더 크게 반영된다면


구성원이 느끼는 건

“잘 일해야겠다”가 아니라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할까”가 된다.


그리고 이 인식은,

단 한 번의 잘못된 평가 시즌만으로도

쉽게 뿌리 내린다는 걸 실제로 경험해버리게 되었다.


고객에게 이럴 수 있다는 상황을 설명만 해보았지,

내가 온전히, 그것도 처절하게 경험하게 될 줄이야!



4. 피플리더의 첫 실패: 끌려가는 평가, 끊지 못한 고리

돌이켜 보면,

그 해 평가의 가장 큰 피해자는 구성원들뿐만 아니라

HR 조직과 나 자신이기도 했다.


평가가 거듭될수록

특정 사업부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평가 등급 조정 회의는 어느 순간

“성과 논의의 자리”가 아니게 되어버렸다.


어느 날, 나는 이런 말을 직접 듣게 된다.

“피플리더가 안 된다고 하면, 본부장님한테 이야기하지 뭐.”


그 순간 깨달았다.

우리는 평가 제도에 조정위원회를 둔 게 아니라,

권한을 가진 몇몇 사람들의

로비 창구를 하나 더 만든 셈이었다는 것을.


그 고리를 끊고 싶었다.


그래서 이후에는 최소한

“합의된 목표”만이라도 만들자고 마음먹고

목표수립 프로세스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특정 사업부는 온갖 이유를 대며

반 년이 넘도록 목표 확정을 미뤘다.

“지금 상황이 워낙 변동적이라서요.”

“일단 올해는 이렇게만 가보죠.”


그 사업부가 미웠다.

그 사업부 편을 들어주며

“지금은 저쪽에 너무 부담 주지 말자”고 말하는 대표도 미웠다.


그리고,

가장 나중에 미웠던 건

그 모든 상황 속에서

“이 평가는 하지 말자”라는 말을

더욱더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나 자신이었다.



5. 그때 나는,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을까

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나는 두 가지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새로 온 피플리더로서의 현실적인 힘의 한계

그리고 HR로서 “이건 하면 안 된다”고 느끼는 직업적 양심


현실적으로는

“이미 공지가 나갔고, 대표와 직속상사가 강하게 밀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 온 팀장이 끝까지 막아서는 것은 어렵다”는 판단이 있었고,


한편으로는

“그렇다고 해서 기준도 없이 평가를 강행하는 것이

과연 HR이 할 일인가”라는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정답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때 내가 했던 선택들,

그리고 하지 못했던 말들이

지금 기준에서 모두 틀린 것도,

모두 옳았던 것도 아닌 것 같다.


다만 분명해진 건 하나였다.

문제는 ‘평가’가 아니라 ‘평가 이전’에 있었다는 것.


목표가 합의되지 않은 상태,

기준이 없이 강행되는 평가,

“보상을 위한 점수 매기기”로 축소된 제도.


이 모든 걸 한꺼번에 안고 들어가면서도

“일단 올해는 이렇게라도 돌려봅시다”를 선택한 것.


그게 내가 경험한

피플리더로서의 첫 번째 실패였다.



6. 다음 이야기: HR은 무엇부터 진단해야 했을까

이 실패 이후,

나는 “평가를 어떻게 잘 돌릴 것인가”보다

“평가를 하기에 앞서 무엇부터 진단해야 하는가”에

더욱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리 회사는 지금 목표·역할·조직 설계가 어느 정도 정리되어 있는가

리더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해야 하는지 공감대를 갖고 있는가

구성원들은 평가가 공정하다고 느낄 최소한의 장치가 마련되어 있는가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없다면,

평가를 시작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조직에 더 큰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


다음 글에서는

이 실패 이후 내가 시도했던

목표수립과 평가 기준 정비의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시 한 번 부딪혔던

사람과 조직 사이의 장면들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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