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물갈이"라는 한 마디가 만든 파장, HR리더의 책임을 배운 날
평가가 처음 도입된 해,
나는 리더들을 대상으로 평가 설명회를 열고 있었다.
해서는 안 될 평가를 억지로 진행하고 있다는 무거운 감정이 이미 깔려 있었고,
그래도 “하는 이상, 최대한 왜곡을 줄여보자”라는 마음으로 설명 자료를 만들었다.
평가 제도의 구조, 프로세스, 역할, 일정까지 차근차근 설명하고,
마지막에는 정리 차원에서 ‘평가에 대한 오해’를 짚어주고 있었다.
성과급, 승진, 줄 세우기…
리더들이 머릿속에 떠올릴 법한 단어들을 하나씩 걷어내며,
“평가의 본연의 목적”을 다시 상기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평가를 하면, 소위 편하게 말하는
‘물갈이하려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할 수도 있다는 점 잘 압니다.”
내 의도는 분명했다.
“물갈이”라는 단어가 실제로 존재하는 불안이라는 것을 인정해 주고,
그래서 오히려 그게 평가의 목적이 아님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모인 리더들은
이미 여러 회사를 거치며 평가를 경험해 본 사람들,
직책자로서도, 구성원으로서도 평가의 양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 말이 “불필요한 자극”이 아닌
“공감과 리마인드”로 받아들여질 거라고 믿었다.
설명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무난하게 마무리됐다.
예상 가능한 질문들이 이어졌고,
감정적인 반발이나 갑작스러운 공격도 없었다.
그날의 진짜 장면은,
설명회가 끝난 뒤에 시작됐다.
설명회가 끝나고, 나는 직속상사와 마주 앉게 되었다.
상사는 내 말을 처음부터 부정하지는 않았다.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 자체에는 공감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어진 말이 나를 콕 찔렀다.
“메시지는 이해되는데,
피플리더가 ‘물갈이’라는 단어를 쓰는 건
오해를 살 수 있어요.”
리더들을 대상으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에서,
단어 하나가 어떤 파장을 만들 수 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특히, 이제 막 평가를 도입하는 첫 해.
불안과 긴장이 뒤섞인 상황에서
피플리더가 “물갈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것은
“혹시 정말 그런 의도가 있는 건 아닌가?”라는 상상을 자극할 수 있다는 거였다.
거기에 한 가지가 더 얹어졌다.
“힘들게 만들어 둔 HR조직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한 번에 깨뜨릴 수도 있어요.
기존 멤버들이 쌓아온 신뢰가 흔들릴 수도 있고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나는 “내가 그렇게까지 잘못한 건가?”라는 생각보다는
“HR 조직이 꼭 긍정적인 이미지만 가져야 하는 게 맞나?”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평가의 본질을 직설적으로 말한 것뿐인데,
그게 문제라면 이건 너무 겉모습만 관리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처음에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시간을 두고 상사의 설명을 상기시켜 봤다.
상사는 본인이 그동안 HR조직의 이미지를 쌓기 위해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어떤 싸움들을 견디며 조직 안에 자리를 잡았는지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이 회사에서 ‘HR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얻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여기서 피플리더가 ‘물갈이’라는 단어를 쓰는 건
그 이미지 전체를 흔드는 신호로 읽힐 수 있어요.”
그 설명을 듣고 나서야,
조금씩 상황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컨설턴트 시절, 나는
회사 안에서 상대적으로 ‘바깥사람’이었다.
현장의 불안과 불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듣기 거북하더라도 필요한 말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위치에서” 할 수 있었다.
진단 결과를 내고,
내 관점을 담은 제언을 전달하고 나면
나는 다시 프로젝트의 밖으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피플리더라는 자리는 달랐다.
그 회사의 HR에 대해 “책임지는 자리”였다.
내가 사용하는 단어 하나,
내가 택하는 문장 하나가
조직이 HR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구성원이 HR을 어떤 부서로 인식하는지에
직접 연결되는 위치였다.
컨설턴트의 언어와
피플리더의 언어는
같은 내용을 말하더라도
요구되는 무게와 책임이 다르다는 것을
그제야 온전히 이해하게 됐다.
그래도 한동안은
마음속에서 이런 반문이 사라지지 않았다.
“HR조직이 긍정적인 이미지만 가져가는 게
정말 맞는 걸까?”
평가, 구조조정, 인사이동, 징계…
HR이 다루는 많은 일들은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고 아픈 주제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HR은
늘 “좋은 이야기만 하는 부서”가 아니라,
때로는 불편한 진실을 직면하게 하는 역할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상사의 말을 곱씹으며
조금은 다르게 생각하게 된 지점이 있었다.
부정적인 이슈를 다루더라도
HR이 ‘어떤 언어로’ 그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신뢰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같은 우려를 말하더라도,
“물갈이”라는 단어를 쓰는 방식과
“평가가 해고나 인력 조정 수단으로만 오해되지 않도록 하겠다”라고 말하는 방식은
같은 현상을 다루면서도
조직이 느끼는 인상과 신뢰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때 처음으로,
“내용”만 옳다고 해서 충분한 건 아니구나
라는 걸 몸으로 배웠다.
다시 떠올려도 그 해는 평가를 하지 말았어야 하는 해였다.
목표도, 기준도, 합의도 없이
평가가 “보상을 위한 점수화”로 흘러가던 시기였다.
그 현실 자체가 힘들어
심리적으로 이미 지쳐 있던 상황에서,
“물갈이”라는 말실수까지 더해졌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경험이 내 정체성을 바꾸는 작은 전환점이었던 것 같다.
컨설턴트로서의 나는
진단을 하고, 관점을 전달하고,
때로는 불편한 말도 서슴없이 하는 역할이었다.
피플리더로서의 나는
그 말 뒤에 남는 후폭풍까지 함께 책임져야 하는 역할이었다.
같은 주제를 이야기하더라도
어떤 단어를 선택할지,
어느 정도 수위를 조절할지,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해도 되는 타이밍인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결국 나는
“물갈이”라는 단어 하나에서 시작된 이 일을 통해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달라졌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하게 됐다.
“나는 지금,
사람과 조직 사이에서
어떤 언어를 쓰는 HR인가?”
이제 다시 돌아보면,
그날의 나는 분명 서툴렀지만 솔직했다고 생각한다.
리더들이 실제로 갖고 있을 법한 불안을
단어 하나로 응축해 꺼냈고,
그 뒤에 “그게 평가의 목적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진심으로 전달하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솔직함이 조직이 어렵게 쌓아 올린 신뢰와 긴장 관계를
건드릴 수 있는 방식이었다는 점도 인정하게 됐다.
사람과 조직 사이에서 HR이 쓰는 언어는
이 두 가지 사이에서 늘 줄타기를 하는 것 같다.
불편한 현실을 너무 순하게 포장해
아무도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지 않기
그렇다고 해서
직설적인 한 마디가 쌓아온 신뢰를 무너뜨리는 ‘폭탄’이 되지 않게 하기
그날의 “물갈이”는
조금 과격한 표현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내가 어떤 HR이 되고 싶은지,
어떤 언어를 쓰는 피플리더가 되어야 하는지
조금 더 또렷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다음 글에서는,
첫 평가 시즌 동안 평가 이후 보상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HR과 리더가 어디까지 같은 정보를 보고 있어야 하는지,
연봉·보상 정보 공개 범위를 두고 상사와 부딪혔던 경험을 중심으로 풀어보려 한다.
어쩌면 누군가의 “지금 이 시기”에도
조금은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기대를 담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