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10시쯤, 85세 친정어머니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너 밥은 먹었니? 콩물 맷돌에 갈아놨는데 좀 가져갈래? 이서방 콩국수 좀 해주게!" 한밤중에 무슨 콩국수냐며 내일 가져가겠다고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아, 그게 아니고 내가 지금 허리가 아파서 꼼짝을 못 해. 아까 맷돌을 들다가 삐끗했는지 원."
어머니는 그날 맷돌을 들다 안 좋은 디스크가 파열되어 결국 3개월을 병원에서 꼼짝없이 누워 계셨습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가지고 계셨던 절구, 떡시루, 그리고 맷돌만 보면 화가 났습니다. 유독 음식 만드는 게 취미이신 분이 한번 뭔가를 만드시면 큰 다라이에 한가득 만들어 이 집 저 집 나눠주시곤 했습니다. 옆에서 쳐다보는 것도 지겨웠고, 한 번 음식을 하고 나면 여기저기 아프다고 하셨습니다. 맷돌이 얼마나 무거운데, 골다공증도 있으신 분이 그걸 드셨다니요! 예전에 갖다 버리고 싶었는데, 결국 이런 사고가 난 것입니다.
응급실로 어머니를 모시고 입원시킨 후 다시 집을 정리해보니, 맷돌에 갈린 콩물은 이미 쉬어 있었습니다. 허리를 다치신 지 꽤 되었는데도 참고 참다가 밤에 전화를 하신 거였습니다. 빨리 전화하시지, 제가 또 뭐라고 할까 봐 걱정되어 밤새 참다가 전화하신 걸 생각하니 속이 탔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맷돌을 보며 진짜 갖다 버릴 거야!' 하고 들었는데, 너무 무겁고 세척하기도 힘들었습니다. '이러니 허리가 나가지!' 맷돌을 들자 머리에서부터 흐른 땀이 목덜미를 스치며 뚝뚝 떨어졌습니다. 배에 힘을 줘야 들 수 있었습니다. '이 노인네 정말 대단하네, 대단해!' 허탈한 웃음이 나왔습니다. '미련한 우리 엄마, 나를 괴롭히는 우리 엄마' 하며 속으로 외쳤습니다. 이게 뭐라고 그렇게 열심히 만드시나.
삼복더위에도 밤새 콩을 불리고, 아침에 삶고, 다시 식혀 맷돌에 갈면 큰 다라이 가득 콩물이 나옵니다. 이 통 저 통에 담아 냉장고에 식힙니다. 꼬박 24시간이 지나야 잘 삶은 메밀국수 위에 우유같이 뽀얀 콩물을 붓고, 얼음을 동동 띄우고 수박 한 조각을 얹어 콩국수를 맛볼 수 있습니다.
"엄마, 그냥 콩국수 맛집에 가면 한 그릇 시원하게 먹을 수 있어요! 뭘 이렇게 힘들게 이걸 갈아요! 아니면 믹서에 갈아 드시든가요!" 제가 한마디 하면, 어머니는 "여기에 갈아야 맛있지! 그리고 어디 파는 것만 하니?" 하시며 맷돌을 돌리셨습니다.
한번은 줄 서서 먹는 시청 앞 콩국수 맛집에 모시고 가서 드셔보시라고 했습니다. "여기는 NASA에서 쓰는 부품으로 만든 기계로 갈아서 아주 곱게 갈려 맛있대요!" 한 숟가락 드시고는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구수한 맛이 없구나.너무 곱게 갈았어! 맷돌로 갈아야 콩물 맛이 구수해지지."
그렇게 콩국수에 대한 추억을 생각하니 벌써 10여 년 전 일입니다. 나이가 드니 어머니 입맛을 닮았는지 저도 마트에서 좋은 콩을 사다가 집에서 콩물을 만들어 국수를 해 먹습니다. 요즘은 두유 제조기도 있고 진공 믹서기도 있어 버튼 하나 누르면 불려서 끓이고, 다시 갈고, 다시 끓여 30분 내로 홈메이드 콩물을 직접 집에서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이 기계들을 보시고 "세상 좋아졌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아니면 "그래도 나는 맷돌에 간 그 콩물 국수가 좋다"고 말씀하실지 궁금한 마음이 듭니다. 아마 후자였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에게는 콩물 국수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중요한 의미였으니까요. 힘든 노동과 오랜 시간을 들여야 얻을 수 있는 그 특별한 맛,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당신의 사랑과 정성이 어머니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했을 것입니다.
요즘같이 더운 날이면 24시간 꼬박 걸려 정성껏 맷돌에 간 그 추억의 국수가 가끔 생각납니다. 단순히 맛있는 콩국수가 아니라, 어머니의 깊은 사랑과 고집이 담긴 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그리운 어머니의 맛, 그리고 그 맛에 얽힌 소중한 기억들이 저의 여름을 채웁니다. 어머니의 맷돌 콩물 국수는 저에게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어머니의 삶과 사랑이 담긴, 영원히 잊히지 않을 유산과도 같습니다. 그 맷돌은 비록 저에게 화를 불러일으킨 존재였지만, 이제는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